[154화] 압박
“뭐… 못 믿으시겠다면 실험해 봐도 좋지만, 대한민국 안에 있는 한 저희가 못 찾을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 이건 제 명함입니다. 되도록 빠르게 결정을 내려 주시면 좋겠군요. 제가 참을성이 많이 없어서… 사장님도 이렇게 서로 존중하면서 쭉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히 험한 일 겪지 마시고요. 제가 한 번 눈이 돌면 엄청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그럼 전 이만 가 보죠. 확실히 경고했습니다.”
벌레같이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경일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곧 히죽거리며 웃었다.
웃던 김형성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분식점을 나갔다.
분식점을 나가는 경일의 표정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잠시 이야기 한것 뿐인데, 뱀을 마주한 듯 징그럽고 기분 나쁜 소름이 돋는 작자였다.
이번엔 제대로 큰 똥을 밟은 기분이었다.
경일은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스탄다비아가 샤벨 타이거의 등장으로 비누의 제조에 타격을 받고, 다른 영지와의 관계가 악화되며 기껏 알려 준 염색 기술을 써먹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인구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스탄다비아에는 많은 어려움이 생겼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농사지을 경작지가 늘어나고, 감자의 수확이 늘어 급한 불을 끄긴 했으나, 여전히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경일이 평소보다 조금 더 공격적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암시장의 이용 횟수가 늘어나고, 대규모 식량을 거래하는 일도 잦아지게 되었다.
‘미스릴을 거래한 건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네. 찝찝한 느낌이 들어서 암시장을 이용할 때 평상시보다 조심한 게 주요했구나. 미행을 완전히 떨어뜨리지는 못했지만, 미스릴을 판 사실을 안 들킨 것만 해도 다행이지. 만약 내가 미스릴도 거래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이렇게 점잖게 나오지 않았을 게 분명해. 자신들의 힘을 보여 주는 과정 없이 바로 나를 납치하려 들었겠지.’
경일은 불행 중 다행으로 미스릴 거래는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여간 저런 새끼들은 하는 짓이 변하지가 않네. 공권력을 움직여 자신의 힘을 보여 주는 게 무슨 매뉴얼로 정해진 거야? 꼴에 길드가 크다고 이번에는 구청이 아니라 경찰을 동원했군. 하… 대체 가만히 있는 날 건드리는 놈들이 왜 이리 많아? 내가 길바닥에 떨어진 주인 없는 돈도 아니고… 나 참. 이것들은 또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방법을 고민 중인데,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길호의 얼굴이 보였다.
“제기랄! 개 쓰레기 놈들”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며 욕을 내뱉는 이길호는 경일보다 더 화가 난 모습이었다.
“형님, 세보 길드가 어떤 곳인지 아세요?”
그런 이길호를 향해 경일이 물었다.
“네. 열 군데 정도의 암시장을 관리하는 중형 길드입니다. 이것저것 벌여 놓은 사업의 규모도 제법 크고, 돈이 된다고 하면 불법적인 일도 가리지 않고 한다고 알려진 길드입니다.”
주로 암시장에서 소문만 듣던 경일보다는 스캐빈저 활동을 오래 한 이길호가 아는 게 훨씬 많았다.
“음…….”
그 말을 듣자 경일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번에는 제법 골치 아픈 상대가 달라붙었다.
지난번처럼 무작정 쳐들어가서 해결하기엔 상대의 세력이 너무 강하고 컸다.
게다가 확실히 조금 전 남자에게서 강자의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저 정도 수준의 헌터들이 모인 곳인 만큼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여느 날과 같이 한참 장사를 준비 중인데 분식점에 까만 가죽 잠바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김경일 씨, 맞으시죠?”
남자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누르는 듯한 위압감이 묻어있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중부 경찰서 형사 박영준입니다. 이쪽은 허상현 형사입니다.”
형사들은 신분증을 경일에게 내밀어 자신의 신분을 확인시켜 주었다.
“김경일 씨가 대규모로 암거래를 진행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잠시 경찰서로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들은 마치 범인에게 하듯 경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앞뒤로 둘러싸며 길을 막았다.
경찰을 누가 보냈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세보 길드에서 보내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빠르게 하라는.
잠시 경일과 대치하던 형사들은 당연히 자신들을 따라올 거라 생각하고 분식점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경일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김경일 씨, 뭐 합니까? 빨리 따라오세요.”
박영준 형사가 고개를 돌려 경일을 노려보며 화난 목소리로 짧게 이야기했다.
“뭐 하긴요. 보면 모릅니까? 가만히 서 있네요.”
경일은 그런 형사들의 모습이 같잖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입가에 조롱기를 머금었다.
공무원이라는 작자가 뒷돈을 받고 이런 짓을 하는 모습에 혐오감이 치솟은 것이다.
“지금 우리랑 장난하는 겁니까!”
그러자 허성현 형사가 큰 목소리로 화를 내며 경일을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수갑을 채우려는 듯이 그의 손이 허리에 걸린 수갑을 만졌다.
하지만 경일은 형사들의 압박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장난? 장난은 그쪽이 하는 거 같은데. 영장 있습니까?”
경일에 말에 형사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박영준 형사가 얼굴을 굳히고는 낮게 으르렁거리듯 서늘한 목소리로 경일에게 말했다.
“임의 동행입니다. 순순히 따라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겁니다. 지금 협조하면 우리도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릴 수 있지만, 이렇게 뻣뻣하게 나오시면 나중에 좋지 않으실 겁니다.”
그가 대놓고 경일을 협박하자, 가만히 지켜보던 손주아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일반 시민들에게 형사의 존재는 무섭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질수록 공권력은 시민의 생활에 더 강하게 끼어들었다.
또한 정부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과도하게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묵인했다.
그러다 보니 일선에서 시민들을 상대하는 경찰의 권력이 자연스럽게 강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시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라고 준 권력을 자신들을 위해 남용하는 등,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변모해 갔다.
강한 권력을 등에 입은 집단이 시간이 흐를수록 썩어 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권력을 쥐게 된 형사들의 행동이 거침이 없어지는 건 당연했다.
형사들은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이 이렇게 뻣뻣하게 나오는 경우를 겪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형사인 자신을 보면 알아서 꼬리를 말았다.
자신들에게 찍혀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사람들이 잘 알기 때문이다.
보통 뒷배가 든든한 경우가 아니라면 저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산동네에서 분식점이나 운영하는 경일에게 대단한 뒷배가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뒷배가 있다고 한들 세보 길드보다 대단하겠냐는 생각 때문에 절차를 지키지 않고 기분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이봐요,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어서 갑시다. 이럴수록 죄가 더 무거워집니다.”
박영준 형사는 마치 판사가 된 것처럼 행동했다.
웃기지도 않을 노릇이었다.
하지만 마냥 그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게, 실제로 형사가 조서를 어떻게 꾸며 주냐에 따라 형량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지금 경찰이 시민을 상대로 협박하는 겁니까?”
“허~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당신, 괜히 후회할 짓은 하지 말지? 보아하니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객기를 부리는 모양인데, 그러다 감옥에서 일 년만 살고 나올 것이 십 년으로 늘어나는 수가 있어.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오지? 우리도 이런 산동네까지 다시 오려면 귀찮으니 서로 좋게 해결하자고.”
그는 협박과 설득을 교묘하게 섞어 말했다.
늘 하던 대로 용의자에게 겁을 준 뒤,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 했다.
사건을 발로 뛰어 조사하기보다는 용의자를 협박해 알아서 실토하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이 방법은 간단한 수고만으로 자신의 실적을 올릴 수 있고, 무엇보다 잘 먹혀들었다.
귀찮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증거를 찾지 않아도 되니, 그들은 대체로 협박하는 걸 선호했다.
하지만 경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만약 이들이 자신이 암거래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으면, 이렇게 임의 동행을 요구하지 않았을 거라는.
“후회해도 내가 할 테니, 남의 장삿집에서 행패 부리지 말고 이만 나가시지.”
그렇기 때문에 경일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오히려 더 세게 나갔다.
행패란 말에 열 받은 형사들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수갑을 채워 끌고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너, 두고 보자. 감히 형사를 무시해! 내가 절대 가만히 안 둔다. 아주 피가 바짝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괴롭혀 주지. 일개 분식점 사장 주제에 형사를 건드리고도 잘살 수 있을지 보자고!”
박영준 형사는 만만하게 본 경일이 오히려 자신을 몰아붙이자 자존심이 크게 상했고, 흥분한 그는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고 협박조로 무섭게 을러댔다.
“다음에 정식으로 영장을 들고 올 테니까, 너, 딱 기다려!”
그는 분식점의 문을 부서져라 강하게 열어젖히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손주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하여간 국민을 섬겨야 할 경찰이 오히려 시민에게 막말이나 하고 말이야. 큰일이야, 큰일.”
경일이 너무 태평스럽게 말하자 오히려 손주아가 혼란스러워졌다.
며칠 뒤, 경찰서에서 정식 출석 요청이 날아왔다.
‘이렇게 빠르게 일 처리를 한 거 보니 그 형사가 열이 제대로 받긴 했나 보네. 아무튼 공무원이라는 것들이 시민을 너무 우습게 안단 말이지. 헌터들한텐 입도 뻥끗 못 하는 주제에.’
구청 식품 위생과 공무원이 뒷돈을 받고 자신을 괴롭힌 사건이 두 번이나 있어서 공무원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출석 요청에는 응해야 했기에, 경일은 시간 맞춰 경찰서로 찾아갔다.
형사과로 들어서자 분식점에 찾아온 박영준 형사가 다짜고짜 경일을 취조실로 끌고 들어갔다.
취조실 안에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허상현 형사가 경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왜 이러는 겁니까? 무고한 시민을 흉악한 범죄자를 다루듯이 이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겁니까?”
“뭐? 이 새끼가… 지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반항이야! 너, 내가 가만히 안 둔다고 했지!”
강하게 소리친 박영준 형사는 경일의 어깨를 강하게 눌러 취조실의 의자에 앉혔다.
그는 기분이 좋은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경일을 압박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취조실에 막상 들어오니 공간이 주는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뭐,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이라면 쫄긴 하겠다.’
하지만 경일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압박감을 떨쳐 버렸다.
“웃어? 이 새끼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웃는 거야? 죽고 싶어!”
여유로운 모습의 경일을 보자 박영준 형사가 기를 꺾기 위해 강하게 윽박질렀다.
그는 처음 세보 길드에게 이 일을 부탁받았을 때 가볍게 생각했다.
산동네 분식점 사장 정도야 자신이 한번 노려보기만 해도 고개를 숙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찮게 생각하던 경일에게 오히려 무시당하자 그는 크게 분노했다.
제대로 자존심이 상한 만큼, 경일을 노려보는 눈매가 곱지 않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