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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57화 (157/300)

[157화] 힘내세요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는 어느새 산발이 되어 있었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지, 얼굴은 여전히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모습이었다.

시퍼런 안광을 뿌리며 부글거리는 속을 어쩌지 못하고는 한참을 서서 씩씩거렸다.

아무도 없는 창고에 먼지 때문에 목이 따가운지 한 번씩 꺽꺽대며 마른기침을 토해 내는 그의 모습이 왠지 애처로워 보였다.

* * *

던전으로 들어선 경일을 선명한 햇빛이 맞이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햇빛을 즐기며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깨끗한 공기를 듬뿍 들이마셨다.

“역시 던전의 신선한 공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폐에 쌓인 지구의 묵은 때가 쓸려 가는 기분이라니까.”

거점으로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오늘 던전에서 해야 할 일은 농작물의 수확이었다.

어느덧 경작지는 외국의 어느 부농의 땅처럼 넓게 펼쳐져 있었다.

농기계 없이는 수확이 불가능할 만큼 넓어 보였다.

하지만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선 경일, 그 자체가 농기구였다.

특별히 제작한 거대한 낫이 벼의 밑동을 쉴 새 없이 자르고 지나갔다.

한 번의 낫질에 5미터 안에 있는 모두 벼가 베어졌다.

사람이 직접 수확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 넓던 논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다.

경일은 수확의 다음 단계는 모두 무시했다.

원래라며 수확한 벼를 모아 햇빛에 건조하고 도정을 해야 온전한 쌀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일까지 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스탄다비아는 그 일을 대신해 줄 많은 인력이 준비되어 있었다.

경일은 거대한 갈퀴로 베어 낸 벼를 한군데 모아 모두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갈퀴로 벼를 모으면서 논바닥에 떨어지는 이삭의 양이 적지 않았지만 무시해 버렸다.

수확하는 농작물의 손실률이 높아졌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을 쓰다가는 일이 언제 끝날지 몰랐다.

밀, 벼, 옥수수, 보리 등 낫으로 벨 수 있는 건 모두 베어 버렸다.

처음에는 공부한 대로 꼼꼼히 농사를 지었지만, 이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최대한 많은 땅에 농사를 짓고 빠르게 수확하는 방법을 연구하다 보니 지금의 방법에 도달했다.

배추, 파, 양배추 등도 뽑지 않고 밑동을 그냥 베어 버렸다.

이런 식으로 수확한 작물은 상품 가치가 하나도 없을 만큼 엉망이었지만, 스탄다비아에서는 최고의 상품으로 둔갑할 터였다.

던전 농산물은 맛도 맛이지만, 던전이 선사하는 이로운 효능이 각각의 농작물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니 스탄다비아 주민에겐 최고의 양식이 될 것이었다.

자신의 적은 노력이 상대에게 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짜릿한 기쁨을 느끼게 했다.

마치 자신이 신이 된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이런 충만함을 매일 맛볼 수 있으면 신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넓은 농작지에는 미처 인벤토리에 담지 못한 농작물의 잔해가 널려 있었지만, 이것들은 다음에 심을 농작물의 영양분으로 쓰일 것이었다.

엄청난 양의 농작물을 수확했지만, 아직 할 일은 태산이었다.

그중 가장 까다로운 작업이 남았다.

바로 고구마와 같은 뿌리채소의 수확이었다.

뿌리채소는 조금 전처럼 간단하게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일은 직접 제작한 거대한 쟁기를 연결한 줄을 어깨에 멨다.

소가 할 일을 그가 직접 대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젯거리가 하나 있었다.

쟁기가 땅속에 잘 박혀 있게 눌러 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경일은 직접 땅을 파헤치는 쟁기의 보습을 아주 무겁게 제작했다.

무거워진 쟁기를 끄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경일은 쟁기의 보습을 땅에 깊숙이 박고는 그대로 쟁기를 끌었다.

“끄으응!”

땅에 깊숙이 박힌 쟁기에 힘을 주고 끌었다.

강렬한 저항이 느껴졌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이 힘차게 땅을 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땅속의 채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쉬지 않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쟁기질했지만, 남은 밭은 끝이 없을 정도였다.

“이거, 인건비도 안 나오겠는데? 앞으로 뿌리채소들은 빼 버리고 농사를 지을까?”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이내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스탄다비아 주민들은 경일이 보내는 농작물 중에서도 특히 고구마를 좋아했다.

달콤한 맛에 풍부한 영양소까지.

하나만 먹어도 한나절 든든하게 보낼 수 있는 건 고구마를 따라올 게 없었다.

특히 간식거리가 거의 없는 스탄다비아에서 고구마는 아이들의 좋은 간식거리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뜨거운 군고구마를 후후, 불며 시커먼 재를 입가에 묻혀 가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생각났다.

아이들의 최애 간식인 고구마를 안 심을 수는 없었다.

경일은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쟁기질을 시작했다.

쟁기가 지나간 곳에 실한 고구마가 보였다.

커다란 칼귀로 모아 인벤토리에 모두 넣었다.

경일은 수확량을 늘릴 방법을 늘 고민했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경작지를 더 늘였다.

그러다 보니 농사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농사일은 힘들었지만, 수확량이 늘어나는 만큼 그의 마음도 행복으로 가득 찼다.

던전 농작물은 단지 식량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던전 농작물로 만든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병치레를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매일 건강하게 뛰어놀았고, 피부에서는 광이 났다.

스탄다비아의 영지민도 경일이 공급하는 농산물을 먹고서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

병에 잘 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케나베스로 큰 홍역을 앓고 있었다.

가우스 교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랄한 포교에 많은 영지민들이 중독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경일은 무척이나 속이 상하고 안타까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신의 마음도 이런데, 영지민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자포리자는 얼마나 괴로울까.

‘힘내세요. 결국은 모두 이겨 낼 겁니다.’

경일은 자포리자에게 진심을 담은 응원을 보냈다.

농사일을 어느 정도 끝내고, 그가 향한 곳은 개울이었다.

개울에 놓은 통발에 잡힌 물고기를 연못으로 옮기고, 가장 중요한 일인 던전 고유 식물을 돌봤다.

던전 고유 식물은 각각의 생육 환경이 틀려 신경을 쓸 게 한둘이 아니었다.

습도, 온도, 토질, 일조량까지 최대한 채집했던 곳과 비슷하게 만들어 주어야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각각의 던전 고유 식물이 자라던 곳의 흙을 날랐다.

종류도 많다 보니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어떤 환경에서 가장 잘 자라는지 여러 실험도 진행 중이었다.

한참 일을 하다 보면 끼니를 놓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던전엔 과일이라든지 물고기 농작물까지 먹을 게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도 너무 바빠 늘 배가 고팠다.

어떤 건 그의 기대보다 훨씬 더 잘 자라 주어 기뻤고, 어떤 건 기울였던 정성에 비해 잘 자라지 못한 모습에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늘도 땅의 소중함을 느끼며 경일은 열심히 일했다.

다행스러운 건, 실력 좋은 연금술사가 그의 곁에 있다는 점이었다.

비닐하우스에서 생산한 던전 고유 식물은 손윤찬의 손을 거쳐 최고급 포션으로 변모해 스탄다비아로 보내졌다.

* * *

스탄다비아에는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생긴 상인의 거리가 있었다.

작은 도시의 시내와 같은 곳으로 상인들을 위한 여러 편의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샤벨 타이거의 등장으로 고블린의 씨가 말라 버려 비누의 생산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자, 상인의 거리는 활기를 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필품을 실은 여러 마차가 들어오고 비누를 실은 마차가 부지런히 오갔지만, 지금은 움직이는 마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상인의 거리는 스탄다비아의 현재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인의 거리를 점령한 건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바로 가우스 교의 사제들이었다.

돈이 돌지 않자 상인들의 발걸음이 끊긴 술집을 사제들이 대신 채웠다.

“하하하하하!”

스탄다비아의 어려운 상황과 반대로, 술집 안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사제들은 각자 옆에 예쁜 여자를 한 명씩 끼고 앉아, 최고급 술에 고기 안주를 즐기고 있었다.

“자자, 사제님들 많이 드십시오. 오늘은 사제님들의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만든 자리이니 마음껏 마시고 즐기십시오. 다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열심히 해 주신 덕에 모든 것이 가우스님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가우스 교는 이 스탄다비아에 훌륭하게 정착했고, 이제는 발전만이 남은 상태입니다. 교단에서도 여러분의 열의와 노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일이 끝나고 교단으로 복귀하면, 모두 큰 상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루터 봉역 사제가 칭찬과 함께 일일이 사제들의 눈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긴장을 풀지 말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주세요.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마지막에 작은 실수로 무너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뭐,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 혹시라도 저의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봉역 사제님. 저희도 목이 날아갈 뻔한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영지민들에게 가우스 교리를 포교하고 있습니다. 벌써 많은 영지민들이 가우스님을 믿고 따르지 않습니까? 헌금도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요.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영주보다 우리의 권력의 더 커질 것입니다.”

베니티 사제가 루터 봉역 사제에게 연신 굽신거렸다.

“잘하고 있는 것 알고 있어요.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교단에서 지금까지 지원한 돈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죠? 우리의 교리가 퍼져 나가는 속도가 만족스러워도 가우스님은 아직 배가 많이 고프실 겁니다. 우리가 자선단체도 아니고, 노력에 비해 성과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가우스님은 입으로만 믿는다고 떠드는 신도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진실한 행동이 수반되어야지 진정한 교인이지 않겠습니까? 아직 우리의 노력이 부족하니, 더 철저히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영지민들에게 우리의 교리를 전파하세요.”

“알겠습니다.”

사제들은 루터 봉건 사제의 말에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내가 노파심에 쓸데없는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을 위한 자리이니 마음껏 마시고 즐겨 주세요. 옆에 이쁜 아가씨들한테도 한잔씩 따라 주고. 오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환락의 밤을 보내 봅시다.”

루터 봉건 사제의 말에 사제들은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술자리는 농염해졌다.

술에 취해 갈수록 옆에 앉은 여자들의 옷이 하나둘 벗겨졌다.

루터 봉건 사제는 참지 못하고 사제들이 보든 말든 상관없이 여자를 덮쳤다.

평상시 온갖 무게를 잡던 그가 가장 먼저 더러운 본성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가우스 교에 들어온 지 가장 오래된 만큼, 그는 도덕이란 개념이 가장 희박했다.

오로지 자신의 부와 쾌락을 위해 행동할 뿐이었다.

루터 봉건 사제의 거침없는 행동에 사제들도 동화되기 시작했다.

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들은 루터 봉건 사제와 똑같은 짓을 시작했다.

이들의 질펀한 술자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한 마리 개가 된 이들은 다음 날이면 종교의 탈을 쓴 독실한 사제 흉내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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