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대치
사제들과 교인들에게 늘 큰소리를 치던 자신 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은 비에 젖어 꼬리를 말은 개와 같은 초라한 한 명의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구해 준 건 집사였다.
“영주님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하는 건 큰 실례입니다. 어서 가시지요.”
집사가 말을 끝내고 몸을 돌려 복도를 걷자 루터 봉역 사제는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내가 네놈의 무례함을 영주에게 확실히 따져 물을 것이다. 일개 기사 따위가 가우스 교를 우습게 알고 함부로 행동하다니. 베르아스 왕국의 어떤 기사도 이따위 행동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변방의 기사 따위가 감히 우리를 핍박하다니, 너에게 큰 벌을 내릴 것이니, 단단히 각오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집사의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가던 루터 봉건 사제는 얼른 표정을 관리하며 칼튼을 향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 숨지는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칼튼의 입에 커다란 비웃음이 걸렸다.
똑똑똑!
집사가 노크를 하자 방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시지요.”
루터 봉건 사제는 집사의 안내에 따라 영주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의 눈에 들어온 집무실은 상상한 것보다 더 형편없었다.
변방의 작은 영지라 다른 귀족들보다 못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건 다 쓰러져 가는 귀족의 집무실보다 못해 보였다.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썰렁한 방에 오래되어 손때가 반질반질하게 묻어 있는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방의 중앙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낡은 의자에 앉았다가는 엉덩이가 썩을 거 같았다.
명색이 외부의 손님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인데, 이곳의 초라한 모습을 보니 성의 다른 곳을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방 한쪽 구석엔 관리가 잘된 갑옷과 롱소드가 보였으나, 사제인 그는 별 관심이 없었다.
실력 있는 기사가 진열된 갑옷과 롱소드를 봤다면, 집무실이 허름한 것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미스릴로 만들어 진 갑옷과 롱소드는 웬만한 영지를 살 수 있는 값어치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 값어치를 알아봤다면 루터 봉건 사제의 목표는 갑옷과 롱소드가 되었을 것이었다.
조금 전 칼튼에게 기가 죽었던 루터 봉건 사제는 자포리자의 형편없는 집무실을 보고 다시 기가 살아났다.
그런 그의 눈에 엄청난 덩치에 선이 굵은 얼굴의 남자가 보였다.
‘이놈들은 뭘 먹었길래 이렇게 다들 덩치가 좋은 거야? 조금 전에 기사 놈이 제일 큰 줄 알았더니, 이놈은 더하네.’
“헙헙!”
루터 봉건 사제는 자포리자의 큰 덩치에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헛기침을 한번 내뱉었다.
자리도 권하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만보는 자포리자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보통의 경우에는 손님인 자신에게 자리를 권하고 차를 내오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자포리자는 예의를 차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민망해진 루터 봉건 사제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가우스 교의 봉건 사제 루터입니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자포리자를 노려보던 그는 거만한 투로 말했다.
성질대로라면 아까의 푸대접에 인사를 생략하고 곧바로 따지고 싶었지만, 상대가 귀족인 이상 어느 정도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용건이 뭔가?”
자포리자가 날선 목소리로 그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루터 봉건 사제는 그의 목소리에 실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다.
자포리자의 반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울컥 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아무리 평민이라고 해도 한 지역을 담당하는 봉건 사제였다.
지금까지 만난 귀족들은 그런 그의 권위를 존중해서 모두 존대말을 해 주었다.
그런데 기껏해야 자작밖에 되지 않는 촌구석의 영주가 자신에게 말을 놓자 화가 났다.
엄밀히 말하면 귀족이 평민에게 말을 놓는 것이 틀린 예법이 아니나, 서로 존대해 주는 것이 하나의 관행처럼 굳어져 있었다.
루터 봉건 사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으나, 그는 이것으로 따지지는 못했다.
다만, 이 감정을 다른 것에 실어 확실히 따질 생각이었다.
“영주님이 가우스 교의 종교 활동을 방해한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종교와 귀족 사회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잘 알고 계실 영주님이 종교 활동을 방해한다는 것은 우리와 척을 지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절대 간과할 생각이 없습니다. 가우스 교뿐만 아니라 베르아스 왕국의 모든 종교에 이 사실을 알려 공론화하겠습니다. 그럼 이곳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겠지요.”
자포리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루터 봉역 사제의 말은 베르아스의 모든 종교가 뭉쳐 스탄다비아를 멸망시키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말을 영주인 자포리자에 직접 말하다니.
평소 냉철한 그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네놈이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자포리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루터 봉건 사제를 쏘아보았다.
“협박이라니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이렇게 작은 영지 정도는 우리 가우스 교에 소속된 병력으로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루터 봉건 사제는 자포리자의 기세에 맞서며 할 말을 모두 뱉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기는 했으나, 자신의 뒤에는 종교라는 막강한 힘이 있다.
자포리자가 자신을 아무리 무섭게 노려볼지언정 실질적으로 아무런 해도 못 끼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하나 묻자. 내가 종교 활동을 방해했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만약 아무런 증거도 없이 나를 모함했다면, 나 역시 지엄한 국법에 따라 네놈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루터 봉건 사제는 오늘은 단지 경고만 하러 왔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뻣뻣한 저놈의 목을 한 번 꺽어 놔야 앞으로 스탄다비아에서의 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지금 오히려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거, 경고로 끝내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요. 교단에 연락해서 이 일을 공론화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주님의 경솔한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좋다. 나도 국법에 따라 이 일을 왕국에 보고하도록 하지. 최고 귀족 회의의 안건으로 올릴 것이니, 누구의 말이 맞는지 한 번 두고 보자꾸나. 결과가 나오면 네놈의 목을 내가 직접 부러뜨려 주지.”
자포리자가 자신의 협박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자, 루터 봉건 사제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종교에 대척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너무 당당한 그의 태도에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 아닌지 찜찜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영주님께서 우리가 선사한 케나베스를 끊으라고 영지민들에게 말하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설마 아니라고 말하지 않으시겠죠? 우리 측에서는 이미 수많은 증인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이래도 큰소리를 치겠습니까?”
루터 봉역 사제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애초에 이런 작은 영지의 영주가 자신들에게 맞선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조금 전 기사의 건방진 태도까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밟아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다르게 자포리자의 태도가 너무 태연자약했다.
그런 그의 태도를 볼수록 루터 봉역 사제는 기분이 나빠졌다.
스탄다비아에 들어오면서 신경조차 쓰지 않던 존재가 자신의 신경을 건들자 갈수록 짜증이 커졌다.
귀 옆에 귀찮은 모기가 돌아다니는데 잡히지 않아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내가 하나 묻지. 영지민을 중독시키고 여러 병을 일으키는 케나베스가 분명 가우스 교의 공식된 활동인가?”
자포리자의 묵직한 말에 루터 봉역 사제가 화를 내며 말했다.
“한낱 인간이 감히 신의 가르침을 평가…….”
그런데 막상 말하려다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신도를 포섭하기 위해 쓰는 케나베스에 대해 좋니, 나쁘니 하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저 선교 활동을 편하게 하는 하나의 도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자포리자가 던져 준 화두가 절대 작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자신들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구원하기 위해 가우스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자신들이 권하는 케나베스는 그들의 논리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문득, 여기서 입을 잘못 놀리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거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종교마다 각각의 교리와 특색이 있으나, 선교 때 케나베스를 사용하는 곳은 많았다.
그만큼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우스 교를 포함해 어떤 종교도 케나베스에 대한 비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머물렀으나, 입은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의 얼굴색이 순간순간 변했다.
지금부터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
그러면서도 케나베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가자니 잘못하다가는 가우스 교에 큰 문제가 생길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포리자의 말을 듣고 보니 케나베스는 양날의 검이었다.
분명 선교하는 것에는 도움이 되나, 그에 반해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 종교도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싶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 때문에 이 문제가 공론화되는 순간, 자신의 목숨은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될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씩씩거리며 자포리자의 얼굴만 노려봤다.
그러고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 싫다는 듯이 끝까지 버텨 보려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결국 분을 삼키며 자포리자의 집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자.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거 같으냐? 이놈의 촌구석, 내가 아주 뼈까지 갈아 마셔 주마. 네놈이 나에게 와서 빌 때까지, 아니, 네놈이 영주의 자리에서 쫓겨날 때까지 난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루터 봉건 사제는 이를 빠드득 갈며 신전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부터 사제들에게 불호령이 내려졌다.
“이제부터는 개인마다 포교 실적을 점검하겠다. 지금까지처럼 설렁설렁 포교를 하는 사제는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최소한 두 배의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 사제들에게는 벌을 내리겠다. 벌을 받고도 실적이 나아지지 않는 사제는 과감히 나의 직권으로 사제직에서 쫓아낼 것이니 모두 각오하도록.”
아침부터 모든 사제들을 불러 모은 루터 봉건 사제가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밝혔다.
갑작스럽게 늘어간 할당량에 사제들이 곤란해 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루터 봉건 사제의 흉흉한 분위기를 읽은 사제들은 자신이 본보기가 되지 않게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녔다.
그 결과, 케나베스는 더욱 빠르게 스탄다비아를 잠식해 갔다.
자포리자가 일일이 영지민을 찾아다니며 케나베스의 해악을 알렸으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루터 봉건 사제의 요청으로 수도의 교단에서 새롭게 지원 나온 사제까지 백 명이 넘는 사제들이 눈에 불을 켜고 스탄다비아를 뛰어다니자, 스탄다비아는 더욱 빠르게 병들어 갔다.
거리에서 중독자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은 마치 좀비처럼 멍한 눈빛으로 이상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거나,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