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절망
개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고, 어떤 여인은 옷이 반쯤 벗겨져 가슴이 드러나 있어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이건, 이지를 가진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버려진 동물보다 더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케나베스를 멀리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사제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워낙 힘든 삶을 살아왔던 그들이었기에, 케나베스의 유혹을 떨쳐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케나베스에 찌든 사람들은 일할 수가 없었다.
그저 케나베스를 얻기 위해 매일 가우스 신전에 갈 뿐.
새롭게 개간한 농지는 버려지고 경제는 크게 위축이 되었다.
케나베스의 부작용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지구의 던전병과 같은 증상의 병이 퍼져 나간 것이다.
참담한 현실은 자포리자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눌렀다.
누구보다 강인했던 그도 점점 지쳐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으며 오늘도 영지민을 찾아 나섰다.
일일이 병에 걸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경일이 보내 준 던전 고유 식물로 치료해 주었다.
그들이 굶지 않게 식량까지 나누어 주었다.
경일도 스탄다비아의 사정을 훤히 아는 만큼, 평상시보다 더 많은 식량을 보냈다.
하지만 이 식량의 대부분은 영지민들의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사제들은 가우스 교의 교리를 내세우고 케나베스를 이용해 자포리자가 나누어 준 식량을 악랄하게 수탈해 갔다.
수탈한 식량 대부분은 수도의 교단으로 흘러갔다.
교단의 높은 분들은 스탄다비아에서 오는 식량을 먹고는 모두 반해 버렸다.
지금의 시대에서는 맛볼 수 없는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맛에 감동한 것이다.
정제된 쌀과 깊은 단맛의 고구마, 포슬포슬한 감자 등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맛이었다.
그들은 열광하며 더 많은 식량을 원했다.
그 결과, 스탄다비아는 가우스 교의 특별 관리 구역으로 지정됐다.
대주교는 루터 봉건 사제의 직급을 올리고 더 많은 사제들을 파견했다.
스탄다비아가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갔다.
오늘도 스탄다비아로 들어오는 마차는 없었다.
경일이 보내 준 식량을 가득 실은 마차만이 부지런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루터 봉건 사제는 더욱 집요하고 악랄해졌다.
직급이 오르고 특별 관리 구역으로 선정된 만큼, 그는 더 많은 식량을 뺏어 올 것을 명령했다.
그에 사제들은 영지민들을 더욱 닦달했다.
어떤 사제들은 아예 영지민들의 집을 뒤져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빼앗아 갔다.
안 그대로 먹을 것이 부족한 판국에 모든 것을 가져가니 영지민들은 더욱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종교의 탈을 쓴 깡패이자 사채업자였다.
그들의 후안무치한 행동은 곧 자포리자에게 전해졌다.
자포리자는 크게 노했다.
그는 자신이 나누어 준 식량이 가우스 교의 배만 부리는 것을 알고는 과감하게 그 양을 줄여 버렸다.
사제들이 아무리 지독하게 굴어도 식량 공급 자체가 사라졌으니 그들도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그 결과, 루터 봉건 사제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뭐라고? 쌀과 채소가 없다니? 지금 교단에서는 더 많은 양을 보내라고 난린데, 그게 무슨 말이야?”
화가 난 루터 봉건 사제의 목소리가 신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게 알아보니 자포리자 영주가 식량의 공급을 확 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거둬들이는 양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니스 사제가 머리를 조아리곤 곤란해하며 말했다.
“이런, 하여간 그놈의 영주가 문제야. 그런데 그놈은 어디서 이런 고급 식재료를 가지고 오는 걸까? 그놈만 가우스 교로 귀화시키면 내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인데… 우리를 보면 이를 가는 놈이니 그럴 일은 없겠지. 그나저나 큰일인데.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지?”
“저기 이 방법은 어떻습니까?”
은밀한 목소리로 베니스 사제가 자신이 세운 계획을 이야기했다.
“하하하하하! 아주 좋아. 사제 중에서는 자네가 제일 났구먼, 그래. 이 일만 잘 해결되면 내 잊지 않고 자네의 공을 교단에 보고하지.”
“감사합니다.”
루터 봉건 사제는 자신의 고민이 해결된 듯 통쾌하게 웃었다.
자포리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늘어 갔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살이 빠진 게 한눈에 보기에도 티가 날 정도였다.
“영주님, 이럴 때일수록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 만약 영주님이 쓰러지시면 스탄다비아도 쓰러지고 말 겁니다.”
카스만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만큼 자포리자의 모습은 형편없었다.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 충성스러운 그의 기사들의 걱정도 커졌다.
경일을 만난 이후로 스탄다비아에는 희망만이 존재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도 못 한 거대한 암초를 만나 버렸다.
더군다나 암초는 하나가 아니었다.
잘나가던 스탄다비아가 한순간에 꼬꾸라질 위기에 처했다.
샤벨 타이거의 등장으로 고블린을 포함한 모든 몬스터가 사라졌다.
몬스터가 유입되던 길목에 샤벨 타이거가 버티고 있으니, 그보다 약한 몬스터의 발길이 끊어졌다.
이전 같았으면 영지로 몰려드는 몬스터를 대신 막아 주는 샤벨 타이거의 등장을 반겼을 줄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영지에 덤벼드는 몬스터의 존재는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스탄다비아 경제의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비누의 생산이 멈춘 건 무엇보다 뼈아팠다.
더군다나 강철로 만든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실전 상대로 몬스터만 한 게 없었다.
뒤로는 프라인이 호시탐탐 비누 제조법과 마나 연공법, 그리고 강철을 노리고 있었다.
동맹인 아드리온도 원조를 거절한 뒤로 그들도 적이 되었다.
안 그래도 암담한 상황에 영지에 들어온 종교가 스탄다비아를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리 경일의 원조가 있어도 이건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의지력을 가진 자포리자라도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한숨이 깊어지는 만큼 스탄다비아의 앞날은 더욱 어두워졌다.
“영주님. 힘을 내십시오. 지금까지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였습니까? 그런 어려움을 모두 헤치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원래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이번 어려움만 이겨 내면 앞으로 겪을 어려움 따위는 웃으며 넘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절대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카스만 경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아닙니다, 영주님. 이 늙은이가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겨우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어 송구스럽습니다.”
카스만의 목소리는 더없이 침울했다.
이번 사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다.
자포리자가 얼굴이 어두워지자 기사들의 얼굴도 펴질 날이 없었다.
기사들은 자포리자의 명이 떨어진다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의 일부는 샤벨 타이거와 맞서 싸우자는 이도 있었고, 다른 일부는 가우스 교의 사제를 도륙하자는 이도 있었다.
자포리자의 명이 없어 참고 있지만, 그들의 가슴은 분노로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내부에서 먼저 무너져 내릴지도 몰랐다.
* * *
김형성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었다.
경일을 잡아 오라는 부하들을 기다리며 홀로 창고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새벽의 추위 정도야 헌터인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가 없었지만, 자신의 명령을 어긴 부하들에게 무엇보다 화가 났다.
그는 곧바로 길드로 달려갔다.
“야, 분식점 사장을 잡아 오라고 했던 새끼들 지금 어디 있어?”
김형성은 불같이 화를 냈다.
“저기… 아직 길드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속해 있는 3팀장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김형성이 워낙 화가 나 있어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그는 긴장했다.
“3팀장, 요즘 얘들을 어떻게 관리하는 거야? 감히 부길드장인 내 명령을 씹어? 죽고 싶어? 나 참,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레벨이 높은 놈도 아니고, 이런 핏덩이 새끼들이 벌써부터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엉? 3팀장, 입이 있으면 말 좀 해 봐. 오늘 제대로 푸닥거리 한번 해볼까? 옛날 생각나게 해 줘?”
“아닙니다.”
3팀장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김형성이 팀장 시절, 그 팀의 일원이었다.
김형성이 부길드장으로 승진하면서 팀장으로 올라선 것이다.
김형성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팀을 이끌었고, 사디스트 기질이 있는 만큼 팀원들을 끝도 없이 괴롭혔다.
3팀장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생각만으로도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그런 인연 때문에 이번 일을 시킬 헌터도 3팀에서 뽑아서 보낸 것이었다.
“아무리 쉬운 일을 시켰다고 해도 일부터 해결하고 딴 짓을 해야 할 거 아냐. 개 쌍놈의 새끼들이 나를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어? 이건 나를 우습게 본 것도 본 거지만, 길드를 개 좆으로 본 거야. 우리 세보 길드가 언제부터 그런 핏덩이들에게도 우습게 보일 정도로 만만해졌어? 기강이 아주 개판이야, 엉? 3팀장, 너 내가 팀장 대접해 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지. 내가 많이 우스워 보여? 평소에 네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 핏덩이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거야?”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부길드장님을 우습게 봅니까? 특히 우리 3팀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놈들이 아직 길드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을 못 차린 모양입니다. 제가 이놈들 오늘 안으로 찾아서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그리고 부길드장님이 시킨 일은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봐주십시오.”
3팀장은 곧바로 꼬리를 내리며 김형성의 비위를 맞췄다.
괜히 개겨 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김형성은 길드 내에서 길드장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더러운 성질만 아니었으면 오래전에 부길드장에 오르고도 남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길드장이 그의 성질을 누그러뜨리려 어지간히 노력했고, 그 노력이 빛을 발해 요즘은 겉으로나마 체면을 지키려고 했다.
3팀장은 눈앞의 폭탄이 터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의 노력이 통했는지 김형성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 분식점 사장 새끼랑 얘들이랑 같이 묶어서 부길드장님이 애용하시는 창고로 보내겠습니다. 얘들은 부길드장님 마음대로 처리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그 정도 놈들은 밖에도 널렸으니 오래간만에 스트레스 한 번 푸십시오.”
3팀장의 눈치 빠른 대처에 김형성은 작게 고개를 끄떡였다.
“피곤하실 텐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하시죠. 제가 금방 사 오겠습니다.”
3팀장이 입안의 혀처럼 행동하고 그를 달랬다.
오랜 기간 그에게 시달린 만큼 달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3팀장은 곧장 일에 들어갔다.
오늘도 실수하면 어떤 후환이 있을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팀장 체면에 개처럼 맞기 싫어서라도 오늘 일을 깔끔하게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는 곧바로 팀원들에게 비상을 걸었다.
비상을 걸었으니 그놈들도 알아서 올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팀원들이 모두 모였지만, 일을 시킨 그 세 명은 끝끝내 오지 않았다.
“이것들이 미쳤나? 감히 비상을 걸었는데도 오지를 않았다고? 부길드장님 얘기를 듣고 설마설마했더니, 이것들이 간덩이가 쳐 부었구나. 이놈들 추천한 새끼 누구야?”
3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소리에 맞춰 헌터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