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65화 (165/300)

[165화] 인신 공양 (2)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앞으로는 절대 가우스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살려 주세요!”

애처로운 목소리로 비는 남자를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불이 더 크게 일렁이자, 몸이 굳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의 몸이 떨리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창백해진 남자는 호흡곤란이 왔는지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런 남자를 사제들은 가차 없이 끌고 불 앞으로 갔다.

“오늘의 제물은 배교의 죄를 지은 놈이다. 하지만 이 남자만이 배교의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요즘 가우스 신께 바치는 공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신앙심이 약해졌다는 증거이다. 다음 예배에는 가우스 신께 바치는 공물이 가장 적은 사람을 제물로 삼겠다.”

루터 봉건 사제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 말했다.

광기로 달아오른 분위기를 날카로운 칼로 반으로 잘라 버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바짝 얼어붙었다.

기가 죽은 사람들의 표정을 본 루터 봉건 사제는 크게 만족했다.

그러고는 오늘의 제물이 될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 불에는 가우스 신께서 현신해 계신다. 네놈이 아무런 죄가 없다면 무사할 것이니,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거라. 하지만 죄가 있다면 넌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 갈 것이다. 이놈을 가우스 신께 인도하라!”

“네, 봉건 사제님.”

남자의 팔짱을 낀 두 사제가 인정사정없이 남자를 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불에 들어간 남자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저 작고 마른 체구에선 절대 나올 수 없는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진탕시켰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소리만 들어도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루터 봉건 사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불에 타 죽어 가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 의식을 진행하는 사람답게 그는 누구보다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사제들은 분명히 봤다.

그의 눈이 파랗게 빛이 나고 웃음을 참지 못한 입가가 실룩거리는 모습을.

그 모습이 너무 섬짓 해, 사제들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절대로 끝나지 않을 거 같은 예배가 끝이 났다.

사제들은 모두 철수했지만, 사람들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한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장작불이 꺼진 가우스 신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한 명, 한 명 가우스 신전을 빠져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넋이 나간 듯 모두 멍해 보였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듯, 최대한 오늘의 일을 생각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럴수록 남자가 불에 타 죽어 가는 모습이 더욱 생생히 떠올라 사람들의 얼굴은 종이처럼 구겨졌다.

몇몇 사람들은 귀를 막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아침을 맞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걱정이 밀려들었다.

다음 예배 때 제물이 되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더 많은 공물을 바쳐야 했다.

사제들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마을을 돌아다니며 포교를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문을 퍼뜨렸다.

가우스 신이 가장 좋아하는 공물은 자포리자가 영지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농작물이라는 것을 신도들에게 몰래 말하고 다녔다.

이 모든 것이 베니티 사제의 아이디어였다.

최근 자포리자가 식량의 배급을 줄여 버리자, 루터 봉건 사제는 안달이 났다.

교단에서 경일이 보내는 식량을 보내라고 계속해서 재촉을 해 왔다.

하지만 자포리자와의 사이가 벌어질 만큼 벌어진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 와중에 베니티 사제가 인신 공양을 이용해 신도들에게 겁을 주고, 겁을 먹은 신도들이 자포리자에게 달려가 식량을 요구하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루터 봉건 사제에게 제시한 것이다.

그럼 자포리자도 어쩔 수 없이 식량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터.

이들의 의도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인신 공양의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자포리자가 거주하는 내성으로 달려갔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다른 사람보다 혹시나 늦게 도착할까 봐 마음이 급해진 사람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금 하는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내성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자포리자가 힘들어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집사와 하인들은 모두 조용히 제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런 조용한 분위기를 뚫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한참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자포리자가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집사를 불러 물었다.

“저, 그게…….”

자포리자의 질문이 곤란하다는 듯 집사는 말끝을 흐렸다.

“괜찮네. 어서 이야기해 보게.”

집사는 자포리자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게, 일부 영지민들이 성 입구에서 식량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도대체 몇 명이나 찾아왔길래 이곳까지 들릴 정도인가?”

“그게… 적어도 오백 명은 넘어 보입니다.”

“오백 명?”

오백 명이라는 숫자에 자포리자의 눈이 커졌다.

오백 명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봉건 사회에서 평민이 소요를 일으킨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행위였다.

평민들은 이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영지민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오백 명이나 한꺼번에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평소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자포리자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아무리 자포리자가 영지민을 아낀다고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강한 분노가 자포리자의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분노는 들불처럼 일어나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이 일은 쉽게 용납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경일이 보내 주는 역사를 공부해 머리가 깨었더라도, 자포리자는 엄밀히 말해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식량을 나누어 주는 건 모두 자신의 호의였다.

그걸 권리인 양 당당하게 요구하는 자들을 용납할 정도의 호인은 아니었다.

자포리자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그의 애검인 롱소드를 들었다.

결연한 그의 모습에 집사는 움츠러들었다.

자포리자가 영지민들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알리스와 영지전을 나갈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가슴으로 품은 영지민들에게 느낀 배신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꽈앙!

그가 집무실의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히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성문으로 걸어갔다.

이미 결심이 선 듯 거의 발걸음에서 조금의 주저함도 찾을 수 없었다.

“영…주…님, 영…주…님. 제…발…….”

그의 걸음을 막은 것은 카스만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잘 나오지 않는 말을 쥐어짜듯이 말하는 카스만의 모습에 자포리자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자신의 가문에 일평생을 바친 노신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카스만 경, 호흡부터 하세요. 그러다 숨이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힘들더라도 천천히 깊이 숨을 쉬세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카스만 원로의 등을 자포리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헉, 헉, 헉, 헉.”

카스만은 호흡뿐만 아니라 서 있는 것도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자포리자는 그를 번쩍 들어 집무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혔다.

“천천히 호흡하십시오. 카스만 경의 말을 듣기 전까지 어디 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몸부터 돌보십시오.”

자포리자는 화난 표정을 풀고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카스만을 안심시켰다.

원래의 진중한 모습으로 돌아간 그의 모습을 보자, 카스만의 호흡이 한결 가라앉는 듯했다.

자포리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 카스만의 손에 쥐여 주며 따뜻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안심한 듯 물을 몇 모음 마시고 카스만이 입을 열었다.

“영주님이 화가 나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저도 저들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다 못해 치가 떨릴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백 명이나 되는 저 많은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꼭 누군가가 뒤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마음에 성문에서 소란을 부리고 있는 이들을 보고 왔는데, 그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심하게 말라 있었습니다. 영지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저렇게 심하게 마른 사람들은 제가 알기론 모두 가우스 교가 뿌린 케나베스에 중독된 자들밖에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언가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

카스만 원로의 말에 자포리자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욱한 마음에 너무 성급하게 앞뒤 재지 않고 뛰어나간 듯했다.

“영주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나실 겁니다. 지금까지 저들은 모두 영주님의 은혜로 살아가지 않았습니까? 베르아스 왕국 어디에도 이런 영주님은 없습니다. 영지민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영지는 세상천지에 이곳밖에 없습니다. 당장 저들의 구성을 봐도 기존의 스탄다비아의 영지민들이 대부분입니다. 알리스에서 온 이주민들은 악랄한 귀족을 겪어 봤기 때문에 이런 행동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그리고 위험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자포리자는 카스만 원로의 말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저들이 아무리 케나베스에 중독되어 사리 분간을 못 한다고 해도 이건 분명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 줬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지금 당장 영주님이 그들의 목을 베어도 누구 한 명 욕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가우스 교의 수작에 넘어가서 저들을 베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영주님, 저들을 처리하는 것보다 더 급한 건, 이 사태를 일으킨 가우스 교의 사제들에게 강력한 벌을 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포리자가 가우스 교의 악행에 참다못해 달려 나갈 때마다 막아서던 이가 바로 카스만이었다.

그들의 목을 단칼에 베는 것이 당장에는 속이 시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따라올 엄청난 후폭풍에 스탄다비아가 쓸려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카스만이 가우스 교에 벌을 내릴 것을 말하고 있었다.

자포리자는 카스만이 얼마나 피 끓는 심정을 누르며 화를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가는 자신을 매번 막아섰는지, 그 마음이 절절히 전해져 왔다.

자신보다 더 분한 사람이 아마 카스만이었을리라.

냉정을 되찾은 자포리자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차가운 눈빛과는 반대로 그의 가슴속에선 강렬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자포리자의 명을 받은 첩보장 블라도 기사가 이 일의 진상을 밝히려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이 일의 진상을 알아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가우스 교의 사제들이 비밀스럽게 움직인 것도 아니고, 약간의 탐문으로도 이 모든 일의 내막을 알 수 있었다.

겨우 몇 시간 만에 모든 사실을 알아낸 블라도는 곧바로 자포리자의 집무실로 향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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