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중독에 빠진 스탄다비아
“충!”
집무실로 들어온 블라도 기사가 자포리자를 향해 절도 있게 경례했다.
“배후는 역시 가우스 교인가?”
자포리자가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실행한 것은 가우스 교였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영주님이 나누어 주는 농작물이었습니다. 농작물은 수도에 위치한 가우스 교의 교단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맛을 본 사제들이 더 많은 농작물을 원했습니다. 대신관은 스탄다비아를 특별 관리 구역으로 지정하고, 가우스 교의 영향력을 더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사제들을 파견했습니다. 이번에 영주님이 농작물의 공급을 줄이는 바람에 교단에서의 독촉이 심했다고 합니다. 이에 루터 봉역 사제가 인신 공양을 실행해 신도들에게 겁을 주고, 농작물을 가장 적게 구해 오는 신도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에 겁을 먹은 신도들이 밀려들어 이런 사달이 벌어진 거였습니다.”
“인신 공양?”
“네. 저번 예배에서 영주님이 병을 낫게 해 준 도웰을 타오르는 불 속에 산 채로 넣어 죽였다고 합니다.”
꽝!
자포리자가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단단해 보이던 책상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주저앉았다.
“이런 미친놈들이! 감히 나의 영지민을 죽여? 그것도 불에 태워서!”
자포리자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의 온몸에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그의 거친 살기에 밀려 블라도 기사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을 정도였다.
‘정말 대단하다. 영주님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하시구나!’
자신도 스탄다비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인데, 그런 자신을 기세만으로 물러서게 만드는 자포리자에게 순수하게 감탄이 들 정도였다.
자포리자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자포리자가 성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포리자는 이곳에 모인 영주민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언짢아하는 자포리자의 모습을 보자 식량을 달라고 조르던 영지민들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모두 그의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급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달려왔지만, 막상 화가 난 자포리자의 모습을 보자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지 깨달은 것이다.
그 누구도 자포리자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로 눈치만 봤다.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깨달은 몇몇은 사색이 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후회해 본들 일은 이미 벌어졌다.
자포리자는 이곳에 모인 이들을 보자, 겨우 가라앉힌 화가 울컥하고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뼈밖에 남지 않은 영지민의 모습을 보자, 그의 입에서 절로 한탄이 새어 나왔다.
‘내가 그렇게나 케나베스를 피우지 말라고 했건만. 이들은 완전히 중독이 된 듯 보이는구나. 케나베스가 자신을 얼마나 헤쳤는지 저들은 자각하고 있을까? 아마 케나베스를 끊는다고 예전과 같은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하겠지. 정말 안타깝구나…….’
자포리자는 화를 꾹 누르고 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식량을 나누어 주는지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크게 벌을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식량을 받자 크게 기뻐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포리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만 할 뿐이었다.
오히려 마치 자신들이 강적과 싸워 승리한 것처럼 흐뭇하고 흡족해했다.
가우스 교에 식량을 받쳐 인신 공양을 피하고, 케나베스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식량을 받은 이들이 즐거워하며 돌아가는 모습을 자포리자는 끝까지 바라봤다.
안타깝게 그들을 바라보든 그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곧바로 가우스 교로 찾아간 그들은 받은 식량을 전부 가우스 신에게 바쳤다.
“잘했습니다. 가우스 신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큰 축복이 내려질 겁니다.”
루터 봉건 사제가 크게 기뻐하며 그들을 칭찬했다.
영지민들은 칭찬을 받자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며 큰일을 한 것처럼 서로를 안아 주며 격려했다.
그 모습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루터 봉건 사제가 눈짓하자, 베니티 사제가 사람들에게 케나베스를 챙겨 주었다.
평소보다 많은 양에 사람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자포리자가 식량을 나눠 줬다는 소문에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했던 신도들까지 몰려들었다.
첫날과 다르게 그들은 마치 자신의 것을 맡겨 놓은 양 당당하게 식량을 요구했다.
자포리자를 보고서도 그들은 존중을 내비치지 않았다.
“영주님, 가우스 신의 은총을 받기에는 이걸로는 부족합니다. 조금만 더 주십시오.”
누군가가 가우스 교를 입에 올리며 더 많은 식량을 당당히 요구했다.
칼튼이 참지 못하고 검을 뽑으려 했으나, 무표정한 자포리자의 표정을 보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반쯤 뽑았던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검 손잡이를 구겨지라 쥐는 그의 손에서 핏줄이 솟아올랐다.
자포리자는 그저 묵묵히 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히잇!”
케나베스에 취한 영지민은 식량을 받아 가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루터 봉건 사제는 기쁨에 취해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자포리자가 백기를 든 모습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농작물을 교단에 보내자, 교단에서도 그를 치하하는 공문이 내려왔다.
“축하드립니다, 루터 봉건 사제님.”
베니티 사제가 재빨리 축하를 보냈다.
“이제 수석 사제님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그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이제 봉건 사제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니, 그건 내 차지겠지. 이번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게 나인데, 설마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베니티 봉건 사제라… 생각만 해도 짜릿하구나!’
이번 일에 아이디어를 낸 게 그였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진할 거라 생각했다.
“하하하하!”
루터 수석 사제는 천하를 가진 듯 기분 좋게 웃었다.
수석 사제는 여러 지역을 감독하는 직무를 맡은 사제로, 한 지역을 담당하는 봉건 사제보다 높은 지위였다.
아직 승진이 힘들 것이라 봤는데, 경일이 보내는 식량에 대한 만족도가 워낙 높아 이번에 수석 사제로 확정이 된 것이었다.
가우스 교의 고위 사제가 되었으니, 자신의 앞날은 훤히 열린 것과 같았다.
스탄다비아를 마지막으로 이제 직접 포교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편안히 관리 감독을 하며 밑의 사제들이 알아서 자신을 모실 것이었다.
“그놈이 눈엣가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복덩이였어. 자존심이 꽤 강한 놈으로 봤는데, 이번에 속이 꽤 쓰리겠군. 하여간 개보다 못한 놈들을 위해 그런 귀중한 농작물을 베풀다니. 아주 병신 같은 놈이야. 나라면 쌀 한 톨도 아까울 건데 말이야.”
“뭐, 그 덕에 쉽게 식량을 얻을 수 있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놈이 그 식량을 어디서 구하는지만 알아내면 수석 사제를 넘어 대사제까지 가능하시겠습니다.”
그는 평생의 꿈인 대사제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스탄다비아에 처음 올 때는 좌천이라 생각할 만큼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올린 공적이 있는데, 여기보다 훨씬 상황이 좋은 영지로 보내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최악의 영지로 보내져 실망을 많이 했다.
거기다가 초반에는 전혀 선교가 되지 않아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케나베스를 동원하고도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모든 시련을 이겨 냈다.
더군다나 이런 거지 같은 곳에, 이런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포교에 성공해도 본전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특별 관리 지역에 지정되고, 드디어 그 어렵다는 수석 사제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30명의 봉건 사제 중 단 한 명에게 주어지는 자리에 오르자, 그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스탄다비아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곳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하하하하! 내가 바로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다!”
그는 신전의 꼭대기에 올라가 스탄다비아를 내려다보며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열기를 기분 좋게 식혀 주었다.
하늘의 별은 자신을 축복하는 듯 오늘따라 더 선명하게 반짝였고,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마음에 들지 않던 영주까지 출세의 발판이 되어 발밑으로 끌어내린 게 그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스탄다비아의 먼지 한 톨까지도 사랑스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이번 예배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께 바칠 제물은 구해 놨는가?”
“네. 이번에는 식량을 가져오지 못한 다섯 명을 뽑아 놨습니다. 그래야지 신도들이 더 열심히 식량을 구해 오지 않겠습니까?”
인신 공양의 효과는 상상 이상으로 아주 컸다.
저번 인신 공양으로 겁을 먹은 것도 있지만, 사람들이 진정 무서워하는 것은 사제의 결정에 따라 자신이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사제들을 더 깍듯이 대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그들의 머리 위로 귀족과 같은 급의, 아니, 자신을 활활 타오르는 불에 아무렇지 않게 던져 버릴 수 있는, 너무나 두려운 새로운 계급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 생겨났고, 사람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져 갔다.
종교는 나라의 법으로도 건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사람들의 눈에 절망이 깃들어 갔다.
경일에게 받은 철로 만든 무기를 들고 몬스터를 해치우며 희망으로 빛나던 눈은 이미 죽어 버리고 없었다.
“하하하!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해. 자네는 나를 믿고 따라오면 앞으로 좋을 일만 생길 걸세.”
“저야 수석 사제님의 충실한 종 아닙니까? 이 한 몸 다 받쳐 수석 사제님을 모시겠습니다.”
유난히 수석 사제라는 말을 강요하며 말하는 베니티 사제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 말은 언제 들어도 좋았고,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좋은 게 루터 수석 사제에겐 마법과 같은 말이었다.
베니티 사제는 깊이 고개를 숙여 절을 했고, 루터 수석 사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번 달 전체 예배가 시작되었다.
가장 큰 예배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우스 신전의 앞마당을 신도들이 가득 채웠다.
그들은 비쩍 골은 몸에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간 게 모두 기분만은 좋아 보였다.
이번에 농작물을 많이 받친 덕에 케나베스의 배급량이 늘어 그들은 평소보다 더 많은 케나베스를 피웠다.
이미 뼛속까지 중독된 것이 갱생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당 중간에 설치된 제단 위의 거대한 화덕에 불이 붙었다.
교단에서 내려온 돈으로 이번에 새롭게 만든 거대한 제단을 사람들은 올려다보았다.
빨간 불꽃이 악마의 혀처럼 넘실거렸다.
화끈한 열기가 신도들의 얼굴에 닿자,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일부 사람들은 뜨거운 열기에도 물러서지 않고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가우스 신을 찬양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루터 수석 사제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루터 수석 사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예배를 시작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