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반갑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헤아려 보려는 듯 급히 눈을 깜빡거렸다.
손바닥에 땀이 맺힌 듯 연신 입고 있는 바지에 손을 문질렀다.
집사가 자포리자의 이러한 모습을 봤으면 매우 놀랐을 것이다.
평소에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던 그를 이렇게 긴장하게 만들다니, 분명 큰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포리자가 성큼성큼 책상 앞으로 나와서는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스탄다비아에서 그 누구도 그의 무릎을 꿇게 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누군가를 향해 군신의 예를 올리고 있었다.
한없이 어둡기만 하던 자포리자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가 무릎을 꿇고 앉은 곳, 바로 앞의 공간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동그란 원을 만들어 냈다.
만들어진 원은 밝은 파란빛을 뿜어냈다.
게이트였다.
집무실에 게이트가 생겨났다.
자포리자는 꿇어앉은 채로 허리를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게이트에서 무언가가 나왔다.
자포리자는 게이트를 나오는 무언가를 향해 한 손을 들어 심장 위에 가져다 댔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그의 입가에 억제되지 않은 웃음이 번져 나갔다.
“영주님, 반갑습니다.”
놀랍게도 자포리자의 앞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경일이 서 있었다.
경일은 자신이 스탄다비아에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일이 벌어진 건 며칠 전이었다.
세보 길드가 아직 자신을 노리기 직전, 여느 날과 같이 던전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가 요즘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일은 던전 고유 식물의 재배였다.
“하~ 이거 쉽지 않네. 왜 이리 안 자라지? 원래 자라던 곳에서 흙도 가져와 깔고, 비료도 듬뿍 주고, 일조량도 조절해 줬잖아.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반쯤 시들어 있는 던전 고유 식물을 보고 경일은 실망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힐링 포션의 주요 재료인 집안초와 던전 병에 빠져서는 안 되는 비후초와 케나베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잘 자라지 않았다.
당장 필요한 것들은 식물 찾기 스킬로 던전을 돌아다니며 캐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이런 방식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번 스탄다비아 사태에 던전 병 치료에 필요한 여러 던전 고유 식물이 필요했다.
일부 재배에 성공한 식물은 곧바로 보낼 수 있었으나, 재배에 실패한 작물은 일일이 던전을 돌아다니며 채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던전 고유 식물을 찾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동안 환자가 고통받아야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보니 비후초 재배에 실패한 게 가장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모든 던전 병의 고통을 줄여 줄 수 있는 비후초만 제때 공급됐다면, 많은 이들이 그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터였다.
케나베스가 퍼지고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바쁜 사람은 바로 경일이었다.
던전 고유 식물을 찾으러 다니느라 던전에서 다른 일은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한 상태였다.
웃자란 농작물로 논과 밭은 거의 정글 수준이었다.
아마 수확량도 크게 영향을 받아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 손윤찬 형님에게도 포션 재료를 보내야 하는데… 스탄다비아 일만 해도 너무 바쁘다 보니 신경을 못 썼구나. 한참 연구 성과를 보는 도중에 던전 고유 식물 공급이 끊겨 많이 답답하셨을 텐데도 전혀 그런 티를 내비치지도 않고. 이번에 재배에 성공만 했다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건데…….”
포션에 필요한 던전 고유 식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에, 재배에 실패한 것에 대해 아쉬움도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나 포션의 재료인 케나베스 재배에 실패한 게 타격이 컸다.
케나베스는 자신뿐만 아니라 스탄다비아에도 가장 필요한 식물이었다.
언제 어디서 또 많은 양의 던전 고유 식물이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경일도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자신의 행동반경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처음의 작은 분식점을 할 때는 그가 맺은 인연이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원하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와의 인연이 계속 생겨나고, 특히 스탄다비아와 동조가 이루어지며 그가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늘어 버렸다.
그나마 광부들이 미스릴을 캐 보내 주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번에 스탄다비아에 식량을 공급하는 것도 힘들어질 뻔했다.
“케나베스라고 했지? 이건 지구의 헌터 마약보다 훨씬 더 지독하구나. 만약 저런 것이 지구에 풀리기라도 한다면 큰일 나겠어. 스탄다비아는 그나마 인구가 작아서 다행이지, 우리나라에 전국적으로 풀린다고 생각하면… 휴~ 이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설마 다른 던전에 케나베스가 있는 건 아니겠지?”
경일은 끔찍한 상상에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나마 케나베스의 효능이 알려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약 누군가가 알기라도 한다면 분명 저걸 이용해 큰돈을 벌려고 하겠지. 지구에는 가우스 교보다 더 지독한 인간들이 널렸으니까.”
스탄다비아에 가우스 교가 사라져서 한숨 돌렸으나, 던전에는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동안 미뤄 두었던 일을 시작할 때였다.
웃자란 농작물을 모두 수확하고, 새롭게 논과 밭에 작물을 심고, 한동안 신경을 쓰지 못해 잡초로 엉망이 된 집 주위를 정비했다.
한동안 바쁘게 지내고 나서야 겨우 가우스 교가 나타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경일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스탄다비아가 처한 상황에 돌이 얹힌 것처럼 늘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여러 가지를 지원한다고 해도 결국 힘의 논리에 모든 것이 함몰되어 갔다.
문명이 발전한 지구도 나라 간 힘의 차이에 의해 많은 것이 결정되었다.
스탄다비아가 궁극적인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힘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돕는다고 해도 이건 쉽게 해결될 게 아니었다.
그 순간이었다.
경일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탄다비아와 완전한 동조가 이루어졌습니다. 자포리자의 충심이 깊어져 그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내용이었다.
스탄다비아로의 이동이라니.
경일의 얼굴과 목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앞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지금까지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던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동이 가능하다니… 당연히 넘어가 봐야겠지. 영주님도 보고 싶고. 아마 내가 스탄다비아에 나타나면 무척 놀라시겠지? 스탄다비아가 요즘 많이 힘든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야지.”
지금까지는 인벤토리를 통한 일방적인 메시지만을 전달할 수 있었다.
자포리자가 경일에게 자기 의사를 전달할 방법은 없었다.
인벤토리는 경일의 스킬이었고, 자포리자는 인벤토리에서 경일이 허락한 물품만을 꺼내는 것만 가능했다.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스탄다비아로 넘어갈 마음을 먹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공간이 일렁이더니 게이트가 생겨났다.
이 게이트가 어디로 통하는 게이트인지는 들어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게이트에 들어갔다.
게이트를 통과하는 익숙한 느낌과 함께 처음으로 스탄다비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포리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인이시여.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자포리자는 환한 미소로 경일을 환영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경일 역시 가슴 가득히 온기가 퍼져 나갔다.
다시 만난 자포리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건 마치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던 가족을 만난 기분이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설마,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 무척 기쁩니다. 참, 만나면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습니다. 스탄다비아를 위하는 마음은 정말이지 큰 감동이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이랑 스탄다비아는 모든 것이 다르지만, 한 가지 통하는 것이 있었죠. 진심입니다. 영주님이 영지민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경일은 먼저 자포리자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자포리자의 마음은 이미 메시지에서 읽어 알고 있으니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선인이시여. 미천한 저에게 말을 낮추어 주십시오. 저는 선인의 충직한 종일뿐입니다. 스탄다비아의 모든 사람 또한 선인의 종입니다. 선인이 없었으면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 그러니 종으로서 선인을 모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자포리자가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하하하하, 영주님, 아닙니다. 저랑 영주님이 어떤 이유로 이어졌는지는 신만이 아시겠지만, 저는 영주민과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 간에 누가 높고 낮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이 이곳에 비해 문명이 많이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영주님을 아래 사람으로 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도 영주님이 노력해 준 덕에 많이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몇 번의 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요.”
경일은 자포리자를 따뜻한 눈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영주님은 제 삶을 온전히 살 수 있게 도와준 은인이십니다. 그러니 이런 과분한 예는 저로선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저에게 머리를 숙일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당연히 스탄다비아의 영주로서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선인의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주님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이거, 이러다 대화가 끝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는 것을 알고 있던 거 같은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경일은 자포리자를 놀라게 해 줄 마음이었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포리자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이 놀라고 말았다.
“그게 말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머릿속에서 선인님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걸 증명하듯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신기한 일이군요.”
경일은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서 자신과 자포리자가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우스 교를 처단하신 거 정말 멋있었습니다. 몸속의 병을 방치하다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질 수도 있었는데, 아주 현명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일단 몸이 건강해야 싸워 보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니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선인님 덕에 많은 이들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어려운 와중에도 영지민들이 굶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자포리자는 자신의 결정을 경일이 칭찬해 주자 힘이 났다.
경일은 그에게 있어 신이었다.
그런 신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증명해 준 것이다.
베르아스 왕국의 모든 종교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일이라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는데, 경일의 한마디에 불안한 마음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영주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영주님과 대련을 한 번 해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경일은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늘 궁금했다.
던전 체인지가 된 던전을 홀로 폐쇄한 적이 있지만, 그 뒤로도 스탄다비아가 발전하면서 그의 실력도 꾸준히 늘었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 진정한 실력자와 싸워 본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실전이었고, 자포리자가 어느 정도 자신의 갈망을 해소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자였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실력이 생각한 대로라면 스탄다비아의 숨통을 틔워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