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71화 (171/300)

[171화] 사냥의 시작

검에 실린 힘과 빠르기가 분명 이전과 달랐다.

싸우면서 경일의 실력이 성장한 것이다.

이 공격을 상쇄시킬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미묘하게 신체의 밸런스가 깨진 상황.

지금보다 더 빠르게 정교한 검술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번 공격은 자신이 가진 검술의 한계를 넘어갔다.

자포리자는 어쩔 수 없이 일단 피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검이 자포리자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대응이 늦었어도 머리통이 통째로 날아갔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다음 수를 생각하지 않고 급하게 피하는 바람에 자세가 무너졌다.

그런 상태로는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힘이 세고, 빠른 상대의 검을 무조건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포리자는 이대로 가다가는 100% 확률로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세를 바로잡을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상대는 절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피잇!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점점 더 가까이에서 들렸다.

자포리자는 최선을 다해 피해 보지만, 피할 때마다 경일의 검이 점점 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피하는 능력이 떨어진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단순했던 공격 패턴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설퍼 보이지만, 분명 자신의 기술을 흉내 내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시구나.’

분명 자신이 궁지에 몰렸지만, 마음속에선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이런 대단한 사람이 자신의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 샤벨 타이거니, 프라인이니, 종교니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싸움은 자포리자의 패배로 끝이 났다.

졌지만 마음은 너무나도 시원했다.

이런 싸움을 원했다.

공격받을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곤두서는.

나의 모든 힘과 기술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그리고 너무나도 갈망했던 강자와의 싸움.

“역시 대단하십니다.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경일이 자포리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선인이야말로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 짧은 시간에 발전을 이루시다니요. 아마 다음번 대련에서는 저를 쉽게 이길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영주님과 함께 힘을 합치면 샤벨 타이거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경일의 목적은 바로 샤벨 타이거였다.

자포리자와 함께 힘을 합쳐 놈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가우스 교가 물러나게 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계속되면 스탄다비아엔 희망이 없었다.

이 상황은 경일에게도 위기였다.

샤벨 타이거가 나타나고 가우스 교가 활동하면서 경일의 레벨은 거의 정체되어 있었다.

이미 자신은 스탄다비아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스탄다비아가 무너진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몰랐다.

하지만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스탄다비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상, 헌터의 능력은 분명 사라질 것이다.

아니, 던전도 사라질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자신과 이런 풍족한 던전과 이어진 건, 분명 혼자서 이 모든 것을 누리라는 뜻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러려면 일단 사방이 꽉 막힌 스탄다비아의 숨통부터 틔워 줘야 했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이 막고 있는 뒤를 뚫을 수가 없다면, 남은 선택지는 정면의 샤벨 타이거뿐이었다.

“안 됩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만으로도 갚을 길이 없는데, 선인을 절대 위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말이라면 목숨도 내어 줄 거 같은 자포리자가 분명하게 반대의 의견을 냈다.

“영주님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주님도 아시다시피, 이대로라면 스탄다비아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만약 스탄다비아와 선인 중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전 일말의 미련 없이 선인을 택할 겁니다. 우리 스탄다비아의 모든 이들은 선인께 목숨의 빚을 졌습니다. 스탄다비아가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선인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자포리자의 두 주먹이 단단하게 쥐어졌다.

그는 어떤 말을 들어도 자신의 결정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경일은 자신을 위하는 말에 가슴에 울컥하고 치미는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꼈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스탄다비아를 돕기 위해 했던 모든 일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행복했다.

“저를 위해 주시는 마음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스탄다비아가 무너지면 제 인생도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저는 스탄다비아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올 수 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영주님도 아시다시피 스탄다비아의 발전이 저를 이렇게 강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샤벨 타이거를 사냥하는 것은 온전히 저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영주님도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스탄다비아가 무너지는 것을 보길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부딪쳐서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포리자는 경일을 위험한 일에 끌어들인다는 것이 고통스러운지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선인을 해하는 것과 같다는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경일의 말대로 같이 싸우는 길뿐이었다.

그 뒤로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됐다.

경일은 자포리자와의 단 한 번의 대련으로도 눈에 보이게 실력이 늘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샤벨 타이거를 사냥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매일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이어 갔다.

경일이 사뭇 무모해 보이는 샤벨 타이거 사냥에 도전한 건,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서였다.

스탄다비아가 궁지에 몰려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어도, 나름 비장의 수를 준비해두었다.

첫 번째로 그가 믿는 건 강자와의 싸움에서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인벤토리 스킬이었다.

기존 헌터들의 인벤토리 스킬과 궤를 달리하는, 거의 순간적으로 무기를 불러올 수 있는 건 싸움에서 대단한 힘을 발휘했다.

언제든지 무기를 교체할 수 있는 의외성은 상대에게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경일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상대를 몰아붙일 수 있었다.

자포리자의 싸움에서도 인벤토리 스킬을 사용했다면 승부는 금방 났을 것이다.

상대의 무기가 자신의 무기와 부딪치는 순간, 무기가 사라지면 상대의 자세는 순식간에 무너질 터.

그 순간 인벤토리에서 다시 무기를 꺼내 공격하기만 해도 순식간에 승부를 쟁취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포션이었다.

손윤찬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면서 지금 만들어 내는 포션은 스탄다비아의 기존 포션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효능이 뛰어났다.

경일은 포션으로 체력과 마나를 보존하면서 싸움을 장기적으로 끌고 가서 샤벨 타이거의 힘을 뺀 뒤 사냥할 계획이었다.

세 번째는 역시 미스릴이었다.

자포리자의 기사단은 이미 갑옷부터 무기까지 모두 미스릴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무기는 내버려 두고 새롭게 미스릴로 만든 장창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기사단이 아무리 실력이 발전했어도 샤벨 타이거와의 근거리 싸움은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경일이 생각한 방법은 인류의 조상들이 맘모스를 사냥했을 때처럼 거의 5미터에 육박하는 장창을 이용해 샤벨 타이거를 포위해 공격할 생각이었다.

자신과 자포리자가 샤벨 타이거의 정면에서 싸우는 동안, 기사들은 미스릴 장창으로 끊임없이 샤벨 타이거를 괴롭힐 것이었다.

경일은 스탄다비아에서 훈련 이외의 시간은 모두 포션에 필요한 던전 고유 식물을 준비하는데 썼다.

드디어 샤벨 타이거를 사냥하는 날 아침이 밝았다.

경일이 게이트를 통해 스탄다비아로 넘어왔다.

늘 그랬듯이 자포리자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충!”

자포리자가 경일을 향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했다.

경일이 당황하면서 그의 경례를 받자, 자포리자가 밖으로 나갔다.

그가 집무실을 나가자, 경일은 스탄다비아의 대장장이가 만든 투구와 갑옷을 입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포리자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선인이시여, 준비가 끝났습니다.”

자포리자의 안내에 따라 경일은 밖으로 나갔다.

연무장에 도착하니 스탄다비아의 기사들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도열해 있었다.

경일이 자포리자의 안내에 따라 기사들의 앞에 섰다.

“선인에 대하여 경례!”

기사장 칼튼이 기사들을 향해 소리치자.

“충!”

기사들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경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경례를 올렸다.

스탄다비아에 선인의 전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경일의 도움으로 스탄다비아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포리자는 선인에 대한 존경심을 자신의 가신들에게 늘 표현했고, 어느새 자포리자뿐만 아니라 가신들까지 경일을 마음속 깊이 믿고 의지했다.

특히 기사들은 경일과 같이 훈련하며 그의 강함에 더욱 매료됐다.

‘허 참.’

경일은 민망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으나, 저들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는 어설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절도 있게 그들의 인사를 받자, 기사들이 선망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봤다.

이들의 분위기를 보니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거 같은데, 머리가 멍해졌다.

현대인이 그가 이런 분위기가 익숙지 않은 건 당연했다.

언젠가 봤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기억해 낸 경일이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처럼 멋지고 든든한 기사와 함께 싸울 수 있어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스탄다비아가 발전해 온 건, 모두 여러분의 덕입니다. 지금까지 스탄다비아를 위해서 노력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노력해 주시길 바랍니다.”

경일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기사들의 눈에 긍지가 솟아났다.

자포리자가 칼튼 기사장에게 출발할 것을 명령했다.

기사들이 모두 말에 올라탔다.

경일도 말에 올랐다.

아직 말을 타는 것이 익숙지 않았지만, 며칠 집중한 덕에 그럭저럭 타고 움직일 정도는 됐다.

말을 타고 샤벨 타이거와 싸울 것이 아니었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

“출발!”

자포리자의 우렁찬 외침만 함께 기사단이 달려 나갔다.

경일은 아직 말을 타는 것이 그리 편하지 않았다.

말과 자신의 몸이 따로 논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곧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경일은 본능적으로 다리를 말의 몸체에 붙이고 말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말도 편안해졌는지 처음과 달리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 달리는 속도만큼 스탄다비의 공기가 경일의 얼굴에 부딪혀 왔다.

여유의 찾은 경일의 눈에 스탄다비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스킬을 통해 눈으로만 보던 스탄다비아를 오감을 통해 느끼는 감정은 또 달랐다.

지금까지는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피부에 부딪혀 오는 신선한 공기와 냄새, 저 멀리 농사를 짓는 영주민의 모습이 보이자, 완벽한 현실임이 자각됐다.

이번 샤벨 타이거 사냥에 실패하면 지금의 평화로움도 끝이 날 것이었다.

경일은 책임감에 어깨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스탄다비아는 던전과 달리 확실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던전이 비현실적인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면, 스탄다비아는 늘 보아 왔던 시골의 느낌 같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한참의 달리자 저 멀리 눈에 익은 성벽이 보였다.

경일이 스탄다비아와 동조가 이루어지고 최초로 본 곳이었다.

몰려드는 고블린과 거의 맨몸으로 싸우던 소년이 생각났다.

칼보다는 책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소년은 결국 고블린에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의 안타까움이 생각났다.

그 순간, 경일의 눈에서 광채가 솟아났다.

그런 아픔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샤벨 타이거를 죽여야 했다.

성벽을 지나자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최소 몇백 년은 족히 됐을 만한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 있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풀들이 땅을 뒤덮고 있었다.

길도 없는 곳을 뚫고 그들은 달려 나갔다.

어느 순간, 섬뜩한 느낌이 경일의 감각을 자극했다.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그런 느낌.

어딘가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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