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74화 (174/300)

[174화] 목소리

“그래, 한번 제대로 붙어 보자고!”

경일이 샤벨 타이거의 화난 눈을 노려보며 크게 소리 질렀다.

놈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연신 경일을 노렸다.

힘의 차이가 너무 커서 방패가 아닌 무구로는 샤벨 타이거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방패 정면으로 공격을 막는 순간, 몸이 날아갈 수도 있어 지금은 몸을 움직여 일일이 공격을 흘려 내거나 피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몸이 뒤로 날아가 약간의 틈이라도 준다면, 샤벨 타이거는 그 즉시 기사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끝이 갈퀴같이 휘어져 있는 발톱은 웬만한 검과 길이가 비슷했다.

한마디로 네 개의 검이 한꺼번에 경일의 몸을 노리는 것과도 같았다.

공격 공간이 넓어 경일은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녀석의 공격을 피해냈다.

가끔씩 발톱으로 공격하는 척하며 어금니로 물어뜯으려 하거나, 몸을 세워 두 발을 교차하며 공격할 때는 등줄기에서 찌릿한 소름이 돋았다.

더군다나 무조건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샤벨 타이거가 자신에게 계속 집중하게 하려면, 공격도 한 번씩 성공시켜야 했다.

경일을 위험을 각오하고 샤벨 타이거의 공격을 피하며 녀석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폭탄이 떨어지고 지뢰가 묻힌 길을 맨몸으로 달려가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자포리자가 경일이 위험한 순간마다 절묘한 공격을 성공시켜 샤벨 타이거의 힘을 뺐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이런 방식의 싸움은 불가능했을 리라.

단단하게 보이는 앞발이 채찍처럼 휘어져 들어왔다.

겨우 몸을 피해 내지만, 샤벨 타이거와의 거리가 워낙 가까워 완벽하게 피하진 못했다.

앞발이 일으키는 풍압에 몸이 휘청거렸다.

“윽!”

그 모습을 본 샤벨 타이거가 재빨리 다음 공격을 이어 가려 했으나, 자포리자의 공격이 조금 더 빨랐다.

그의 롱소드가 녀석의 겨드랑이의 약한 살에 꽂혔다.

“크어엉!”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공격을 기점으로 샤벨 타이거는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기사들의 공격과 함께 늘어가는 상처, 그리고 계속되는 출혈에는 아무리 강한 샤벨 타이거라도 버틸 방법이 없었다.

생기가 넘치던 녀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지 오래였다.

경일도 방어에만 집중하지 않고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 순간이었다.

‘응? 이 느낌은 설마?’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경일의 본능이 미친 듯이 경고를 울렸다.

‘위험하다!’

경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이 인벤토리에서 가장 무겁고, 가장 큰 방패를 꺼내 그 뒤에 몸을 숨겼다.

꽈앙!

방패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경일의 무릎이 꺾이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몸의 내부가 진탕된 듯 식도를 타고 올라온 피에서 진한 피 맛이 느껴졌다.

“피해!”

누군가의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경일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방패를 버리고 그 즉시 몸을 날렸다.

타악!

샤벨 타이거의 어금니가 부딪치는 소리가 조금 전에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들려왔다.

“광폭화…….”

자포리자의 입에서 신음과 같은 소리가 뱉어졌다.

일부 몬스터가 죽기 직전 분노를 참지 못할 때 나타난다고 알려진광폭화는 마지막 남은 생명을 희생해 오로지 적을 죽이겠다는 일념이 만들어 낸 현상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광폭화가 발생된 몬스터는 기존보다 1.5배 강해진다는 거였다.

“피해!”

샤벨 타이거가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경일이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 명령을 듣자마자 곧바로 몸을 뺐다.

하지만 샤벨 타이거의 목표는 기사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었다.

샤벨 타이거는 뒤로 물러나는 경일을 향해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날았다.

근육질의 뒷다리에 모든 힘을 주고 땅을 박차자, 놈의 거대한 몸이 공중으로 총알처럼 튕겨 나갔다.

얼마나 빠른지 샤벨 타이거의 귀가 공기의 저항으로 인해 뒤로 젖혀질 정도였다.

단단한 땅이 샤벨 타이거의 발에 눌려 움푹 패여 있었다.

경일은 순간 눈앞이 어두워진 느낌이 들었다.

분명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샤벨 타이거와의 거리를 벌렸으나, 놈의 속도는 그런 경일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볍게 앞질렀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진한 피비린내였다.

그리고 샤벨 타이거의 한껏 벌어진 입이 보였다.

붉은빛이 감도는 긴 혀에서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늦었어.’

본능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을 인식하자 모든 것이 느려졌다.

느린 배속으로 돌아가는 영상처럼, 아니, 그보다 더 느린 하나하나의 컷으로 지금의 상황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분명 생각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돌아가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도 버겁게 느껴졌다.

샤벨 타이거 뒤에서 경악으로 물든 자포리자가 보였다.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너무나 절실하고 진솔해서 가는 길이 외롭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이 크게 벌어진 거로 봐서는 아마 피하라고 소리치는 듯했지만, 단편적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마를 타고 눈으로 들어간 땀에 의해 눈을 깜빡여 보지만, 그 행동도 샤벨 타이거보다 느렸다.

‘혹시나 피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모든 힘을 짜내 움직여 보지만, 몸에 수백 개의 추가 달린 듯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노력을 멈추고, 샤벨 타이거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절대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샤벨 타이거의 입은 경일의 머리쯤은 가볍게 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놈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듯 눈이 활처럼 휘어져 웃고 있었다.

‘이런, 제길!’

가슴속에서 용광로보다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분했다.

경일은 상체가 샤벨 타이거의 입속에 빨려 들어가는 상상이 들었다.

아니, 그건 상상이 아니었다.

그건 미래였다.

찰나의 뒤에 벌어질 미래였다.

경일의 머릿속에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의 영혼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지금까지의 추억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르 건,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부터 희미해져 지금은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않던 부모님의 얼굴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모님과의 행복했던 추억이 단편적으로 생각났다.

뇌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어 자력으로는 절대 꺼내 볼 수 없던 행복한 기억이 죽음의 순간에 떠오르는 건 신이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니… 죽음도 그리 손해는 아니네.’

그리고 이어지는 기억은 역시 던전이었다.

던전을 처음 발견한 날에 공포에 떨었던 모습부터 모든 활동이 떠올랐다.

던전이 주었던 무한한 사랑.

그리고 자포리자라는 최고의 스승이자, 친구를 만났다.

‘뭐, 이 정도면 내 인생도 썩 나쁘지는 않네. 상상했던 모든 걸 이루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맛보기는 먹어 봤잖아. 나 같이 운 없는 놈에게 그 정도면 어마어마한 축복이지.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스탄다비아의 사람들과 동네 아이들이지만, 이제 어쩔 수 없는 문제니까. 그들의 앞날에 축복을 빌어 줄 수밖에.’

경일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걸렸다.

가슴속엔 던전에 대한 감사와 존중을 끝으로, 짧은 시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했다.

이제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단지 지금 바라는 건, 되도록 고통 없이 한번에 죽고 싶다는 작은 소망뿐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에 이어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샤벨 타이거의 뜨거운 입김이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씨발, 괜찮아. 난 괜찮다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어!’

경일은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당당해지고 싶었다.

비록 싸움에서는 졌지만, 마음마저 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는 없다.

그건 바로 생의 미련 때문이었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살걸. 아니, 내 삶이 이렇게 짧을 줄 알았다면 더 저질러 버릴걸. 이 순간에 하고 싶은 게 이렇게 많이 생각나면 어쩌라는 거야.’

마음속에서 후회가 밀려들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그의 눈물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이 상황에 대한 분노였다.

눈앞이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다.

강한 피비린내와 고기 썩는 냄새가 자신을 완벽하게 둘러싼 느낌이었다.

샤벨 타이거의 입속에 자신이 머리가 완전히 들어간 걸 알아차렸다.

이제 정말 죽음만이 남았다.

그 순간이었다.

[정신 차려.]

머릿속에서 뇌가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고함이 들렸다.

이건 분명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신 차리라고. 이대로 죽을 거야? 죽기 싫으면 지금 뭐든지 해. 시간이 없어. 내가 막아 줄 수 있는 건 찰나일 뿐이야.]

마치 천둥이 머릿속에서 터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누구라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을 정도의 엄청난 고함이었다.

목소리의 박력에 경일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당장 뭐라고 해야 할 거 같았다.

경일은 그 순간,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스킬을 펼쳤다.

그건 바로 인벤토리 스킬이었다.

인벤토리에서 소환한 창을 잡는 동시에 앞으로 내밀었다.

순식간에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모든 마나가 창에 깃들었다.

오러가 창끝까지 깃들었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마나에 창끝에 맺힌 마나가 버티지 못하고 창을 벗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오러가 창이라는 매개체를 벗어나, 오러만의 형태를 생성해 낸 것이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였다.

푸욱!

먼저 창끝에 맺힌 오러가 길을 뚫었고, 그 뒤를 따라 창이 밀고 들어왔다.

부드러운 살을 지나 곧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오러는 거침없이 뼈를 뚫고 창이 나아갈 길을 만들었다.

창이 샤벨 타이거의 입천장 가장 깊은 곳을 뚫고 들어간 순간, 경일은 외부의 힘에 몸이 밀려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몸을 누군가가 덮고 있었다.

자포리자였다.

그는 경일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샤벨 타이거가 달려드는 것을 보고 경일을 밀어 내고, 자신이 대신 죽을 각오로 뛰어든 것이다.

자포리자는 이어질 샤벨 타이거의 공격에 경일을 보호하고자, 그를 덮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경일과 자포리자의 위기에 기사들이 미친 듯이 샤벨 타이거에게 달려들었다.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조직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놈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기 위해 공격을 가했다.

심지어 상처를 입어 전열에서 이탈한 기사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샤벨 타이거에게 달려들었다.

“크엉엉엉엉엉엉엉!”

샤벨 타이거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숲을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놀란 수많은 새들이 날아올랐다.

기사들은 샤벨 타이거의 피어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주군을 위해, 주군이 모시는 선인을 위해 이 한 몸 내던지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겐 무한한 영광이었다.

기사들의 공격이 샤벨 타이거의 몸을 파고들었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스피어가.

누군가의 묵직한 투 핸드 소드가.

누군가의 날렵한 바스타드 소드가.

누군가의 묵직한 도끼로.

뒤를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몸속에 깃든 모든 마나를 각자의 무기에 밀어 넣었다.

이미 광폭화로 남은 생명력까지 태운 샤벨 타이거의 가죽은 이전과 같이 단단하지 않았다.

오러가 피어오른 무기가 샤벨 타이거의 단단한 가죽을 뚫고 들어갔다.

“캬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샤벨 타이거의 입에서 목이 쉰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건 조금 전의 소리와 분명 느낌이 달랐다.

이건 애원이었다.

죽기 직전 상대에게 동정을 바라는.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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