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고양이
기사 중 누군가의 공격이 놈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자신의 공격이 통한다는 것을 안 기사들은 더욱 힘을 냈다.
누군가는 체중을 실어 더 깊이 찔러 넣었고, 누군가는 찌른 채 옆으로 그었다.
기사들은 머릿속에는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이라도 더 많은 공격을 성공시킬 생각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샤벨 타이거의 날렵한 몸놀림을 봐서는 기회가 많이 없을 걸 잘 알고 있었다.
샤벨 타이거의 네 개의 날카로운 발톱에 몸이 네 동강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의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어금니의 몸이 관통되어 죽는 그 순간까지 공격할 것임을 다짐했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스물이 넘는 무기가 샤벨 타이거의 몸을 거침없이 유린했다.
하지만 샤벨 타이거는 기사들의 예상과 달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경일이 마지막에 온몸의 힘을 다한 공격이 샤벨 타이거의 머리뼈를 뚫고 아주 작게나마 뇌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뇌에 아주 작은 상처를 입었을 뿐이지만, 마치 벼락에 감전된 듯 샤벨 타이거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찮은 벌레와 같은 것들이 자신의 몸을 마음껏 짓밟는데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기사들의 맹공은 매서웠다.
그들은 상처가 난 곳을 집요하게 찔렀다.
기사들의 무기는 샤벨 타이거의 가죽을 뚫고 들어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 시작했다.
단단했던 땅이 샤벨 타이거가 흘린 피로 물러져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크어엉엉~”
이제 샤벨 타이거는 소리를 지를 힘도 없는지 불쌍한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눈에서 그 지독했던 광기는 사라지고 애처로움이 보였다.
자신의 운명을 짐작했는지 눈동자에 언뜻언뜻 죽음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자포리자가 몸을 일으켰다.
“선인이시여, 괜찮으십니까?”
그는 자신이 다친 몸보다 먼저 경일을 걱정했다.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갔던 터라 경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긴 했어도 별다른 외상은 입지 않았다.
경일은 자포리자가 다친 몸을 이끌고 자신을 구해 준 것에 크게 감동했다.
마지막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몸을 끝까지 덮고 있던 모습에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경일은 일어나기 위해 자포리자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샤벨 타이거와 싸움으로 지친 마음 까지 따뜻하게 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빠르게 결판을 내야겠네요.”
침착함을 되찾은 후, 의연하게 일어섰다.
조금 전 죽음까지 경험한 터라 무서울 만도 했지만,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하려 했던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들의 진실한 마음에 힘을 얻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것은 자신이었다.
혹시나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샤벨 타이거를 빠르게 죽여야 했다.
경일은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냈다.
날카롭게 벼려진 창끝을 앞세우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샤벨 타이거의 커다란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생각을 지웠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창이 입에 박혀 벌이진 샤벨 타이거의 입에 긴 창을 쑤셔 넣었다.
오러를 머금은 창이 입천장을 뚫고 들어가 샤벨 타이거 뇌의 한가운데를 뚫었다.
쿠웅!
기사들의 공격에도 끝까지 서 있던 샤벨 타이거의 거대한 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생명력으로 생기 넘치던 눈이 점점 탁해져 오더니, 그대로 굳어져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독했던 싸움이 끝이 났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이겼다.”
“우리는 해냈다!”
“만세, 만세!”
“샤벨 타이거를 잡았다!”
“우리가 이 숲의 진정한 주인이다!”
기사들이 내지른 기쁨의 함성이 숲을 울렸다.
‘정말 강했어. 기술뿐만 아니라 마음가짐, 정보 모든 것이 허술했어. 사실 이건 내가 진 싸움이나 마찬가지야. 영주님과 그의 용맹한 기사들이 아니었으면 이기지 못했을 거야. 이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기회를 만들어 준 덕에 겨우 싸움을 이끌어 갈 수 있었어. 광폭화라니… 설마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우리의 승리야.’
어느 정도 감정이 가라앉자, 그와 함께 슬픔이 밀려들었다.
이번 샤벨 타이거와의 싸움에서 죽은 기사는 총 여섯 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과 자포리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희생이 따르는 건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익숙한 듯 일부 기사들은 다친 동료를 치료하고, 자포리자와 남은 기사들은 죽은 기사들을 수습했다.
챙겨 온 깨끗한 하얀 천으로 죽은 기사의 몸을 감쌌다.
자포리자의 얼굴엔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한 명 한 명 잊지 않겠다는 듯이 죽은 기사의 얼굴을 그의 가슴에 새기는 듯했다.
그 엄숙한 모습에 경일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다음 생은 싸움이 없는 평화로운 곳에서 태어나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경일은 가슴속 깊이 그들의 안식을 빌었다.
사상자의 수습이 끝이 나자 자포리자와 기사들은 익숙한 듯 곧바로 움직였다.
이들은 샤벨 타이거의 가죽을 발라내고 피를 모았다.
그리고 긴 어금니를 뽑고 고기를 발라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의 거대한 머리가 길가의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이 지역의 패자인 샤벨 타이거가 사라졌으니 새로운 몬스터가 자리를 채울 것이다.
스탄다비아를 포위하고 있는 벽 중에 하나를 제거했으니 어느 정도 숨통을 틔울 수 있게 되었다.
경일은 자포리자게 다가가 가지고 있던 모든 포션을 건넸다.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일은 자포리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선인님이 아니었으면 이미 죽었을 목숨입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저희를 위해 이렇게 어려운 싸움을 해 주시고. 선인님의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자포리자는 오히려 경일에게 감사해했다.
그에게서 깊은 충절이 느껴졌다.
힘든 싸움이었으나, 마음만은 그 무엇보다 뿌듯했다.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들이 보내 주는 진실한 마음에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주는 것과 다른 또 다른 행복이었다.
이들과 같이 샤벨 타이거와 싸운 건, 정말 잘한 선택 같았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성에 가셔서 몸을 회복하시고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급한 일이 있어서 지금은 가 봐야겠습니다. 이제 왕래가 자유로우니 가끔 들리겠습니다. 그때 얼굴 보고 이야기하시죠.”
“알겠습니다, 선인님. 몸조심하십시오.”
“네, 그럼 영주님도 건강하세요.”
경일은 큰 나무 뒤로 걸어갔다.
기사들 모르게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다.
머릿속에 돌아가겠다 생각하자 게이트가 열렸다.
경일이 이렇게 빠르게 돌아가는 건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들려왔던 목소리 때문이다.
‘나를 살려 준 목소리의 정체는 뭘까? 분명 그 목소리는 어떤 힘이 있었어. 내 창이 아무리 빨라도 샤벨 타이거의 이빨이 내 몸에 박히는 게 훨씬 빨랐어. 목소리에 깃든 힘이 시간을 느리게 했거나, 아니면 내 행동을 훨씬 빠르게 만든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아.’
경일은 던전의 집으로 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깜짝 놀라 그대로 굳었다.
집 안에 지금까지 던전에서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던전에도 동물이 존재했다는 건가? 동물에 대한 메시지는 본 적이 없는데.”
동물의 정체는 고양이었다.
작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경일이 아끼는 이불 위에 턱 하니 누워 있었다.
[느려 터져 가지고. 빨리빨리 안 오고 뭐 해. 기다리다가 배고파 죽는 줄 알았잖아. 일단 맛있는 거부터 해 봐.]
“헉! 고양이가 말을 해!”
경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시 엉뚱한 곳으로 간 게 아닌지 확인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지은 집이 맞았다.
[뭐 해? 얼른 먹을 걸 가져오라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안 들려?]
너무 놀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건 귀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경일의 뇌에 직접 전달되는 소리였다.
처음 느껴 보는 이질적인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으로 문을 등지고 섰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고양이는 또 뭐고?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들리는 이 목소리는 또 뭐냐고?’
[하~ 이런 겁쟁이를 봤나. 샤벨 타이거랑 싸울 때는 나름 볼 만하더니, 알고 보니 완전 똥 멍청이에다 바보잖아. 어떻게 저런 모자란 놈이랑 연결이 되어서.]
고양이는 눈이 충혈된 게 무척 예민해 보였다.
“저기…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경일이 물었다.
[일단 네놈 때문에 말할 힘도 없으니까, 먹을 거나 빨리 가지고 와. 힘이 있어야 말도 할 수 있을 거잖아.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
고양이의 말에는 묘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경일은 갓 자대 배치된 신병처럼 재빠르게 뒷마당에 만든 연못으로 갔다.
고양이가 좋아할 만한 걸 생각하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생선이었다.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헌터의 순발력으로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접시에 물고기를 담아 고양이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저기, 일단 이거라도 드세요.”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고양이의 위엄에 경일이 공손하게 말했다.
[이런 무례한 놈. 손질도 하지 않은 물고기를 지금 나보고 먹으라는 거냐? 익혀서 가져와. 명색이 분식점을 한다는 놈이 기본적인 조리는 해야 할 거 아냐?]
귀여운 고양이의 얼굴에 노여움이 서렸다.
이쁜 아이가 화를 내는 듯한 모습에 귀여워서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실룩거렸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정신을 못 차렸지만, 지금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었다.
고양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였다.
땡그란 눈에 광채가 흐르는 눈은 신묘했다.
흰색과 회색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털이 온몸을 덮고 있었고, 심술궂은 표정을 한 통통한 얼굴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꼭 장화 신은 고양이의 주인공 같은 모습이랄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경일은 고양이의 짜증에 분식점 손님 대하듯 말하곤 물고기를 들고 나갔다.
배를 따고 내장을 손질해 작대기에 끼워 간접 열에 정성껏 익혔다.
프라이팬에 튀기듯이 굽는 것도 맛있지만, 던전 물고기는 자체에 기름기가 많아 직화로 굽는 게 가장 맛있다.
물고기는 금방 익었고, 접시에 물고기를 예쁘게 담아 고양이에게 가져갔다.
고양이는 잘 먹었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코를 박고 연신 그르렁거리고 먹는 게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접시 위에 있던 물고기가 사라졌다.
[모자라잖아. 좀 더 가져와. 이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니 더 많이 가져오라고.]
고양이의 명령조 같은 말투에 살짝 기분이 나빴으나,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러나 싶어 별말 없이 다시 연못으로 갔다.
고양이가 작아 작은 물고기로 잡았는데, 먹는 거로 봐서는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이번에는 고양이 몸통만 한 커다란 물고기를 한 마리 잡았다.
물고기를 끼운 꼬지를 불 옆 땅에 꽂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물고기가 맛있게 익어 갔다.
냄새가 고양이에게까지 갔는지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