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수호신
‘그래, 이 큰 지구에 던전과 연결된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이건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데… 휴, 앞으로 어떡해야 하는 거지?’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든 책임을 나누어 보려고 했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그의 걱정과 함께 던전의 밤이 찾아왔다.
여느 때와 같이 던전의 하늘에서는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깊은 밤, 달은 더없이 밝았고, 별들은 비슷한 듯 다른 각각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늘 감탄하고 바라보던 경치였는데, 지금은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앞날처럼 그냥 모든 것이 깜깜했다.
어둠 속에 묻혀 가는 던전처럼 경일의 얼굴도 급속도로 어두워져 갔다.
생각이 많은지, 그렇게 던전의 밤을 지새웠다.
경일의 걱정과 달리 던전의 시간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흘러 새벽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석상처럼 굳은 채 처음 자세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날이 밝아 오자 개울의 물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이 났다.
개울 안에 작은 섬처럼 쌓인 돌에 부딪힌 물결이 작은 파도를 일으켰다.
찰랑거리는 물결을 따라 어떤 물고기는 헤엄치고, 어떤 물고기는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석상처럼 굳어 있던 경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있어 봐야 달라질 것도 없잖아. 지금까지 잘해 왔다고 했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겠지.”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라 앞에 나서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수호신에게 들은 말을 전해도 사람들이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 가장 급한 것은 역시 스탄다비아를 지원하는 일이라 판단했다.
수호신의 말대로라면 자포리자는 그 세계의 몬스터와 맞서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그와 그의 기사단에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인체에 마나를 공급하는 커미네스의 재배였다.
경일은 곧장 커미네스가 자라고 있는 비닐하우스로 향했다.
힘들게 옮겨 심은 커미네스는 잘 자라지 못하고 시들시들 말라 가고 있었다.
“하, 골치 아프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다 써 본 거 같은데… 도대체 이유가 뭘까?”
밭에서 죽어 가는 커미네스를 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첫걸음부터 절벽에 막힌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야? 뭐가 잘 안 돼?]
어느새 다가온 수호신이 경일에게 물었다.
잠을 푹 잔 듯 어제보다 얼굴이 훨씬 나아 보였다.
“네, 수호신님. 커미네스 재배에 관해 연구 중이었습니다. 이 식물이 앞으로 큰 역할을 할 거 같은데, 채집만으로는 부족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 잘하고 있네. 여기서는 이걸 커미네스라고 부르는 모양이군. 아, 그리고 수호신이라고 부르지 말고 네로라고 불러. 그게 내 이름이야.]
“네로?”
너무 고양이다운 이름이라 살짝 웃음이 나왔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 알겠습니다, 네로님.”
경일은 수호신의 이름이 입에 잘 붙지 않아 살짝 더듬거렸다.
[음~ 보자.]
네로는 커미네스가 자라고 있는 비닐하우스 안을 꼼꼼히 살폈다.
[이거 뭔가가 빠진 거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 분명 기억이 날 거 같은데… 어휴, 답답해.]
아마 미숙한 상태로 깨어나서 일어나는 부작용인 듯했다.
다시 한번 경일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기억났어. 커미네스는 배롱나무가 근처에 있어야 잘 자라. 여기에 배롱나무만 같이 심으면 아주 잘 자랄 거야. 그래도 나름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이긴 하네.]
네로의 칭찬에 지금까지 한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기뻤다.
“저기, 네로님? 어제 미성숙한 상태라고 하셨는데,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가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뭐, 별거 없어. 잘 먹고, 잘 쉬면 점점 능력이 돌아올 거야.]
경일은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인 양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도 없고. 조금 불편하긴 한데,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거야. 그러니 오늘은 김치찌개로 아침을 먹어 보자구.]
“네?”
네로의 뜬금없는 말에 경일이 되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내가 잘 먹고, 잘 자야 능력을 회복한다고 했잖아. 지구라는 곳은 참 신기한 세상이더군. 맛있는 것도 많고. 그러니 이제부터 하나씩 다 먹어 볼 생각이야. 저번에 머물렀던 세상은 음식이 엉망이었어. 그리고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어. 안 그래?]
“아~ 네, 그렇겠네요.”
경일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기분이 좀 그런?
[그러니 얼른 만들어 와.]
“알겠습니다.”
경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아궁이에 불부터 붙였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재료를 꺼내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기름을 두른 냄비에 돼지고기와 김치 적당량을 넣고 볶았다.
늘 하던 김치찌개인데, 경일에게서 기합이 느껴졌다.
네로에 대한 연민도 있었고, 잘 먹어야 능력이 돌아온다는 말에 평소보다 더 정성껏 맛있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고, 신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공경도 담겨 있었다.
찌개 하나만으로 부족할거 같아 반찬으로 얼큰한 김치찌개와 잘 어울리는 대왕 계란말이도 함께 만들었다.
[와, 이거 정말 맛있네. 내가 이걸 정말 먹고 싶었거든. 어떻게 이렇게 복잡한 맛이 나면서도 전부 다 잘 어우러지지? 아~ 이 감칠맛은 또 뭐라 말이야.]
네로는 감격한 듯 김치찌개 한 숟갈에 천국을 맛보고 있었다.
‘그건 조미료의 힘입니다.’
경일은 굳이 MSG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지구는 정말 대단해. 봐봐, 일찍 깨서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더 빨리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너도 내가 빨리 깨어난 걸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지금처럼 열심히만 하면 돼.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열심히 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와도 최소한 후회는 없을 거잖아. 그럼 된 거야.]
엄청난 이야기를 던져 주고 그가 내린 결론은 허무하리만큼 간단했다.
한편으론 네로의 이야기가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꼬인 실타래는 서둘러 풀려 하다가는 오히려 더 꼬이기 십상이었다.
엉킨 부분을 잘라 내고 새로 실을 뽑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지만, 자신에겐 엉킨 부분을 잘라 낼 방법이 없었다.
그럼 남은 건, 꾸준히 인내를 가지고 하나씩 풀어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참, 저녁엔 된장찌개를 먹자. 조개 듬뿍 넣어서.]
“네?”
심각한 이야기 끝에 저녁 메뉴를 이야기하는 네로의 경망스러움에 경일이 눈이 소의 눈망울처럼 동그래졌다.
[흡흡.]
헛기침을 한 네로는 경일의 눈길을 피했다.
그렇게 먹을 걸 밝히는 던전 수호신 네로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동네 분식 입구 한쪽엔 고양이 집이 생겼다.
식당 안에 두는 것은 무리가 있어 매대의 바깥쪽에 조그마하게 고양이 집을 지었다.
네로는 눈 떠 보니 스타가 된 거처럼 하루만에 동네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근엄해 보이는 표정에 모두 넘어가 버린 것이다.
동네 아이들의 간식을 책임지는 동네 분식이 이제는 놀이터의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아저씨, 고양이 이름이 뭐예요?”
“네로란다.”
“네로! 와, 이름도 멋있다. 한 번 만져 봐도 돼요?”
경일은 아이들의 이 질문이 가장 곤란했다.
네로는 경일의 입장에서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인지라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여진 것이다.
“야옹!”
네로는 질문한 아이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우와, 우리 네로 너무 귀엽다. 생긴 것도 내가 알던 고양이랑 좀 달라. 털도 너무 부드럽고.”
아이는 네로는 안아 들고 볼에 대고 비볐다.
네로도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과의 접촉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하긴, 저렇게 귀여운 아이들을 싫어할 이는 범우주적으로 봐도 있을 수 없지. 킥~’
네로를 만난 뒤, 생각이 지구에 그치지 않고 우주적으로 하는 자신의 모습이 웃겨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이 간 후, 경일은 네로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온 김에 이것 좀 치워라.]
네로가 말한 것은 고양이 사료였다.
이 세계에 온 것에 매우 만족하고 있지만, 딱 하나 곤란한 게 고양이 사료였다.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네로를 보고 귀엽다고 가져다주는 게 전부 사료였다.
며칠 겪어 보지 않았지만, 그는 대식가이자 미식가였다.
그런 그에게 맛없는 고양이 사료는 고역이었다.
특히 아이들은 직접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해서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할 경우에는 오만 인상을 쓰고는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네로의 모습이 귀엽다며 더욱 좋아했다.
[이런 풍족한 세상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맛대가리 없는 걸 먹어야 한다니.]
네로의 귀여운 얼굴에 깊은 고뇌가 어렸다.
그 순간이었다.
“네로야~ 언니가 츄르 사 왔다. 맛있게 먹자.”
손주아의 등장에 절대 놀라지 않을 거 같은 네로의 두 눈이 커졌다.
[헉! 쟤 좀 말려 봐. 제발!]
네로의 당황한 목소리가 경일의 뇌를 진동했다.
경일은 설마 던전의 수호신인 그에게 천적이 존재할지 몰랐다.
네로에겐 손주아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 만난 최악의 빌런이었다.
그가 분식점에 오고 나서 가장 기뻐한 게 바로 그녀였다.
“어머, 사장님, 제가 고양이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서는. 와아~ 이 아이는 지금까지 본 고양이 중에 제일 귀여워요. 어떻게 근엄하면서도 이렇게 이쁘게 생길 수가 있죠.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는 처음이에요”
손주아의 호들갑에 오히려 네로는 인상을 썼다.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휙 하고 돌려 버렸다.
“이거 봐요. 지금 인상 쓰는 것도 너무 귀엽다. 저 도도한 모습. 완벽해! 네로는 고양이 계의 최고 미남이야. 너무 좋아, 꺅꺅꺅!”
손주아의 눈동자가 오히려 하트로 변했다.
네로를 향해 끊임없는 하트가 발사됐다.
네로는 손주아의 눈이 뒤집힌 모습에 등에 털이 삐죽 섰다.
그는 즉시 그녀의 눈을 피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손주아는 도망가려는 네로를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잽싸게 안고 얼굴에 비볐다.
그럴 때마다 네로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온갖 인상을 썼다.
순수한 어린아이는 좋아하지만, 어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손주아처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도 오히려 좋다고 달려드는 사람을 가장 싫었다.
[으아아아아악! 제발, 저 인간 좀 치워 줘!]
네로의 비명이 경일의 뇌를 울렸다.
“저기, 주아 씨? 네로가 싫어하는 거 같은데?”
“어머, 사장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로가 나를 싫어하다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욧! 지금껏 나를 싫어하는 남자는 있었어도 나를 싫어하는 고양이는 본 적이 없어욧!”
손주아는 절대 아니라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팔까지 크게 흔들면 흥분했다.
“어… 그래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그녀의 기백에 놀란 경일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네로가 화가 난 듯 쏘아보는 강렬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도로 분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저도 어쩔 수가 없다고요.’
경일의 등은 네로를 향해 저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