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아니지.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형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지금 싸우는 모습만 봐도 넌 그냥 앞으로 달려 나가 몸빵이나 하는 신세잖아. 형이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달려드는 게, 네 역할이잖아.”
“이런 개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죽고 싶어?”
박현수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다혈질인 박현수를 도발하는 것은 너무 간단했다.
“현수야, 멈춰!”
박현준이 급하게 말려 보지만, 박현수는 이미 경일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경일은 간단히 그 주먹을 피하며 박현수의 목덜미를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뭐, 뭐야? 이거 놔!”
목뒤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박현수가 급하게 몸을 빼려 했지만, 경일의 힘을 감당하진 못했다.
오히려 경일이 힘을 주는 방향으로 몸이 딸려 갔다.
목뒤에서 누르는 힘에 얼굴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순간, 경일의 무릎이 바닥에서 올라왔다.
“안 돼!”
박현수의 동공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릎이 똑똑히 비칠 때, 비명은 그의 형에게서 터져 나왔다.
동생의 감정을 느낀 그가 먼저 반응한 것이다.
퍼억!
쩌억!
타격음과 함께 뼈가 갈라지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박현수는 이 소리가 자신의 얼굴에서 난 것임을 인지하는 순간, 그의 의식은 어마어마한 고통으로 잠식당했다.
코가 부러지며 피가 튀었다.
“젠장!”
박현준이 급하게 동생을 향해 뛰어오지만, 경일의 무릎이 더 빨랐다.
두 번째 타격이 박현수가 조금 전 맞았던 곳에 정확히 꽂혔다.
“어헉!”
박현수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처음 니킥을 맞았을 때 느껴지는 고통이 최악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고통에 비하면 전혀 아니었다.
처음 고통보다 몇십 배는 더 아팠다.
누가 강제로 코를 잡아 뜯어낸 듯했다.
순간, 몸에서 모든 힘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마치 무중력 공간에 던져진 듯 상하좌우가 느껴지지 않았다.
허공을 밟고 있는 듯한 부유감과 함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경일은 달려오는 박현준을 향해 박현수를 냅다 던져 버렸다.
이에 박현준은 급하게 자세를 바꿔 동생을 안아 들었다.
동생은 이미 의식이 없어 보였다.
눈이 희번덕 뒤집혀 눈동자의 반이 사라져 있었다.
순식간에 망가져 피범벅이 된 동생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온몸에서 살기가 들끓었고, 이내 몸 주위에 가느다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런 개씨발놈이!”
그는 분한 듯 거친 욕을 내뱉었다.
동생이 다친 모습을 본 박현준은 눈으로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경일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생각과 감정을 스킬로 공유하는 만큼, 동생의 고통이 자신에게도 직접적으로 다가왔고, 자신이 당한 것처럼 억울하고 화가 난 모습이었다.
박현준은 동생을 소중히 한쪽 바닥에 내려놓고, 길가에 놓아 두었던 큼직한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가방에서 나온 건, 자신의 키만 한 칼이었다.
자연스럽게 휘어진 칼은 시릴 만큼 날카로워 보였다.
“야, 좋은 말 할 때 무기 넣어라. 아니면 너 오늘 제대로 피똥 싼다.”
“최소 팔과 다리 하나씩은 끊어 간다. 목숨 줄도 끊고 싶은데, 길드장님이 너랑 볼일이 있다고 해서 지금은 살려 주는 거다. 부길드장님도 지금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때쯤 되면 지금 안 죽은 게 도리어 억울해질 거야.”
박현준이 기다란 칼을 수직으로 세웠다.
길이가 있다 보니 느껴지는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너, 안 되겠다. 내가 오늘 제대로 버릇을 고쳐 주마.”
경일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장난기가 사라진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상대를 위축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듯한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박현준은 더욱 큰소리를 쳤다.
“뭐라는 거야? 무기도 없는 놈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맨손으로는 네 놈이 강할지 몰라도, 칼을 든 내가 얼마나 강한지 제대로 보여 주마!”
“하여간 이 새끼들은 말을 하면 왜 못 알아듣는 거지?”
경일은 시린 듯한 목소리처럼 차가운 눈초리로 박현준을 노려봤다.
“으으윽!”
그와 함께 니킥 두 방에 기절했던 박현수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으아아아악! 이 개새끼야! 죽여 버릴 테다! 죽일 거라고!”
박현수가 입에서 피거품을 물고 경일을 향해 악다구니를 썼다.
아직 정신이 전부 돌아오지 않았는지, 벽을 잡고 일어서는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는 호흡이 힘든지 입을 벌린 채 연신 색색거렸다.
“씨발!”
이 상태론 싸움이 힘들 거라고 판단한 박현수는 삐뚤어진 코를 손으로 잡고 억지로 돌렸다.
“아아아아악!”
코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박현수는 이런 끔찍한 고통을 준 경일에게 반드시 몇 배의 고통을 돌려줄 거라 다짐했다.
그의 눈이 분노로 활활 불타올랐다.
코가 순식간에 부어올라 마치 코주부 안경을 낀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무표정하게 서 있던 경일이 미소를 지었다.
“너 지금 웃은 거야? 웃은 거냐고? 내가 네놈 입을 찢어 버리고 말테다!”
경일의 비웃음에 박현수는 너무 분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납작한 코가 주먹만 해져서 이제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확실히 구분이 되네. 원체 못생긴 얼굴이라 그런지, 그 꼴도 그리 나쁘지 않네. 사람들이 너희를 구분하기 좋게 앞으로 그렇게 다니면 되겠다.”
“이, 이런 개새끼가!”
박현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커다란 가방에서 무기를 꺼냈다.
그의 형과 똑같은 칼이었다.
창과도 비슷한 두 자루의 칼이 우뚝 서서 경일을 노렸다.
“씨발, 다리 하나는 내 꺼야. 형은 팔 하나만 짤라. 대신 처음엔 팔목, 다음은 팔꿈치 이런 식으로 여러 번 가르면 되잖아.”
경일의 니킥에 코뼈가 내려앉은 후유증으로 코맹맹이 소리로 온갖 잔인한 이야기를 뱉어 냈다.
“이것들은 최소 10년 이상은 사회에서 격리시켜야겠네. 평범한 사람들이랑 같이 살아가기엔 너흰 너무 위험해.”
“뭐라는 거야?”
박현준의 고함과 함께 뛰쳐나가자 박현수도 같이 보조를 맞추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두 개의 칼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위에서 아래로 반원을 그리며 내리꽂혔다.
스킬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박현수는 경일의 도발에 넘어가 몇 배의 값을 치른 터라, 분한 마음을 누르며 이번에는 형의 지시를 착실히 따랐다.
채앵!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날카로운 칼이 허공에서 멈췄다.
“저 새끼 뭐야?”
“씨발!”
두 형제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같이 터져 나왔다.
경일의 손에 어느새 창이 쥐어져 있었다.
창대를 양손으로 쥐고 가로로 들어 올려 자신을 노리고 오는 칼을 막은 것이다.
“조심해!”
박현준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박현수의 비명.
“아아아아악!”
어느새 반대편 창끝이 박현수의 다친 코를 정확히 찍었다.
와그작!
무언가 부서지는 섬찟한 소리와 함께 퉁퉁 부어오른 코가 얼굴 안으로 움푹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박현수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입에서 피거품을 뿜으며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이는 모습으로 눈이 뒤집힌 채, 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을 떨어 댔다.
박현준은 동생의 모습을 보고는 뻣뻣하게 굳었다.
조금 전의 살기등등한 모습과 너무 대조적인 모습에 경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떻게 저런 놈이 있을 수 있지? 마, 말이 안 되잖아.”
박현준은 처음 경일을 잡아 오라는 길드장의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우 산동네 분식점 사장을 납치하는 일에 자신들과 같은 고급 인력을 보내다니.
이건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수상한 구석이 많다고 신신당부해서 어쩔 수 없이 무기까지 챙겨 들고, 투덜거리는 동생을 달래 가며 이곳에 왔다.
경일을 처음 봤을 때 헌터라는 것에 놀랐다.
아무렇게나 빗어 넘긴 머리에 유행이 한참 지난 옷을 입은, 어디에서나 보이는 허접한 아저씨 같은 사람이 헌터라니.
조금 웃기기까지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개개인도 강했지만, 둘이 함께 있으면 어떤 헌터도 두렵지 않았다.
실제 자신들보다 훨씬 높은 레벨의 헌터도 모두 이겨 왔다.
더군다나 상대는 겨우 찢어지게 가난한 곳에 사는 헌터일 뿐이었다.
그런 헌터가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는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20대 후반 레벨인 자신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모습에 솔직히 소름이 돋았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특히 동생이 니킥에 코뼈가 내려앉았을 때는 분노와 함께 겁이 덜컥 났다.
만약 무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면, 동생을 데리고 곧장 도망쳤을 것이다.
헌터와의 싸움에선 이기지 못할 거 같으면 무조건 피하는 게 현명했다.
진다는 건 최소한 중상이고,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다.
분명 이길 거라 생각한 싸움이었는데…….
지금 동생은 거의 반쯤 죽은 듯이 보였다.
창의 반대쪽이 동생의 코에 꽂혔을 때는 자신도 눈앞이 깜깜해졌다.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다니… 아무리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무기를 꺼낼 수 있는 거지?”
“뭐,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마다 그 크기가 다른데, 나같이 빠르게 물건을 빼내는 게 가능한 헌터도 있지 않겠어?”
경일은 자신이 행한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박현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건 그가 아는 상식과 너무 달랐다.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뺄 때는 허공에서 서서히 물건이 뽑혀 나오지,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틈에 경일에 손에는 창이 사라지고, 금속으로 된 두툼한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제기랄!”
몽둥이와 감각이 공유된 것처럼 몽둥이에 실린 경일의 의지가 확실히 느껴졌다.
박현준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는 동생의 얼굴을 한 번 바라봤다.
기절했는데도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아직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미 이기는 건 포기했다.
그저 제발 동생보다는 덜 아프게 해 달라고 빌며, 마지막 힘을 모아 칼을 휘둘렀다.
채엥!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칼의 진동이 그대로 손에 전달됐다.
이건 칼이 지르는 비명이었다.
두툼한 몽둥이는 여지없이 박현준의 긴 칼을 박살 냈다.
“어쩐지 이 일을 맞고 싶지 않더라니, 제기랄!”
반만 남은 칼날을 보고 박현준은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이날 이들은 광산으로 보내지기 전까지 수없이 맞으며 잘못을 빌었다.
이틀 뒤, 김형성은 마음이 급한지 뛰다시피 길드장실로 향했다.
그는 노크도 생략하고 길드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이 새끼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다짜고짜 사무실로 밀고 들어오는 김형성의 모습에 불쾌해진 문근철의 언성이 높아졌다.
“길드장님! 쌍둥이가 사라졌습니다.”
김형성은 문근철의 질문을 무시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쌍둥이도 사라졌다고?”
김형성의 보고를 받은 문근철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 연락이 안 된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쌍둥이가 연락이 안 된다니… 그 분식점 사장 놈은 어떻게 됐어?”
“아무 일 없이 분식점에서 장사 중이랍니다.”
“뭐야? 쌍둥이가 내 명령을 거부했다는 거야? 아니야, 절대 그럴 놈들이 아냐. 얘들이 갈 만한 곳은 모두 확인해 봤어?”
“네. 집이랑 갈 만한 곳은 모두 수소문해 봤지만, 전혀 흔적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사라진 놈들한테서 연락이 온 거는 없어?”
“네, 아직 없습니다.”
“이거,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문근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