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걸리기만 해 봐라
“던전의 주인이 원하는 곳에 언제든지 게이트를 열 수 있어. 실제로 스탄다비아를 갈 때도 아무 곳에서나 게이트를 열어 봤잖아.”
“아…….”
경일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구나. 조금만 유연하게 생각했어도 알 수 있었는데.”
“쯧쯧, 똑똑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멍청한 부분도 많군.”
“하하하하, 그러게요.”
경일은 민망하게 웃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작게나마 그의 삶이 편해졌다.
굳이 옥탑방까지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도 벌었다.
하지만 이건 경일에겐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악몽일 수도 있었다.
그 누군가가 바로 김형성이었다.
그는 결국 거센 비를 맞으며 새벽까지 경일을 기다렸다.
“으아아아아아!”
벌써 세 번째 거리에서 밤을 샜다.
저번에는 지붕이라도 있는 창고였지만, 오늘은 퍼붓는 비를 쫄딱 맞으며 밤을 샌 거라 그의 마음속에 터질 듯한 분노가 자리 잡았다.
비 맞은 개 꼴로 집에 돌아온 그는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길드로 출근해야 했다.
길드장이 목이 빠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허허허…….”
김형성의 보고를 받은 문근철이 허탈하게 웃었다.
오늘은 일이 해결될 줄 알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분식점 사장이 오지 않았다고 하니 이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새벽까지 다섯 시까지 기다렸다고?”
“네…….”
김형성은 자신이 노력한 걸 어필하려 기다리다 돌아간 시간까지 이야기했다.
“어제 비 많이 오지 않았어? 우산은 가지고 갔고?”
“그게…….”
“하하하하! 천하의 김형성이 비 맞은 개처럼 밤새 비를 쫄딱 맞고 기다렸다라.”
조금 전과 다르게 문근철은 화통하게 웃었다.
김형성이 비를 맞고 쫄딱 맞고 서 있었을 모습을 생각하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약이 올랐을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오늘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거지?”
“네.”
“알았어. 나가 봐.”
김형성은 길드장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사우나에서 한숨 자며 시간을 보낸 그는 경일을 잡기 위해 또다시 그의 집 앞으로 향했다.
이날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떠나간 여인을 기다리듯 간절히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이날도 경일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다음 날도 기약 없이 경일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새벽이 오자 그는 참지 못하고 건물의 입구 문을 부수고, 경일의 옥탑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옥탑방의 멀쩡한 문을 뜯어내고 집 안으로 들어간 김형성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때려 부쉈다.
“으아아아악! 씨발 새끼, 걸리기만 하면 넌 내가 포를 떠 버린다! 아주 얇게, 얇게 천천히, 천천히 포를 떠 주지. 넌 내가 절대 죽이지 않을 거야. 힐링 포션에 절여서라도 끝까지 고통을 주마!”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저주를 내뱉었다.
꽝꽝꽝꽝!
낡은 싱크대며 게이트가 있던 장롱, 몇 개 있지도 않은 그릇까지 김형성은 모두 가루로 만들었다.
다음 날.
“하, 무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거 일이 안 되려고 하니, 별일이 다 생기네. 애들이 사라지질 않나, 분식점 사장은 마치 우리가 잡으러 오는 걸 아는 거처럼 집으로 오지도 않고. 뻔히 눈앞에 있는데 잡지를 못하다니. 이러니 더 안달이 나잖아. 그렇지 않니?”
문근철은 답답한지 소매를 돌돌 말아서 걷어 올리곤 신경질적으로 윗 단추를 열어 놓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온통 날이 서 있었다.
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눈빛에 짜증이 가득했다.
“네…….”
김형성은 길드장의 불편한 심기를 읽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가 아무리 개차반이라고 해도 화가 난 문근철에게 성질을 내보일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자신이 미친 늑대 새끼면, 화가 난 길드장은 미친 호랑이였다.
“이글 길드에서도 냄새를 맡았다는 소리가 있던데, 사실이야?”
한 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길드들부터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네,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씨발, 이러다 죽 쒀서 개 줄 판이네. 오늘부터 우리 애들 전부 분식점 근처에 풀었다가 그 새끼가 일 마치고 나오면 바로 잡아 와.”
“알겠습니다.”
김형성은 평소와 다르게 90도로 인사를 하고 길드장실을 나왔다.
조용했던 산동네가 시끄러워졌다.
“어머, 저 사람들은 뭐야?”
“오늘은 다른 곳에서 밥 먹자.”
세보 길드가 동원한 인원이 분식점을 둘러쌌다.
험악한 사람들이 동네 곳곳에 보이자, 주민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야, 야, 야, 어린놈의 새끼가 어딜 돌아다녀. 집에 가서 공부해.”
분식점으로 가던 아이들을 보고 세보 길드 헌터가 위협했다.
“아저씨가 뭔데요?”
이에 아이 중 제법 강단이 있는 수한이 따졌다.
“하, 어린놈의 새끼가. 거지 같은 동네에 사는 것들이 그런지 싸가지까지 없어.”
헌터가 탄식 비슷하게 내뱉더니, 얼굴을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트렸다.
“얼른 안 꺼져? 혼날래?”
“으아아아아앙!”
화난 얼굴로 아이들을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지르자, 깜짝 놀란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네로의 표정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여기저기서 세보 길드 헌터들이 동네 주민들을 희롱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동네 분식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세보 길드의 헌터들을 보곤 오던 손님들도 발길을 돌렸다.
“이런 개새끼들이.”
오래간만에 경일의 마음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지금까지 화가 나는 일이 많았지만, 오늘처럼 진정으로 화가 난 날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동네 아이들까지 위협하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경일을 노리던 길드보다 규모가 큰 중형 길드인 만큼, 그들이 가진 힘 또한 더 막강했다.
세보 길드는 이 정도 소란 정도는 충분히 뒷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당장 달려 나가 세보 길드 헌터들을 응징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경일은 분식점의 직원들부터 먼저 퇴근시켰다.
자신 때문에 위험질 수도 있었다.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차가 순찰을 시작하자, 세보 길드 헌터들의 횡포가 조금은 줄어들었다.
시간이 흘러 동네 분식이 마치는 시간이 다가오자, 세보 길드 헌터들이 길목마다 버티고 섰다.
경일이 동네 분식을 나와 어떤 길을 가든 간에 세보 길드 헌터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정각 여덟 시가 되자, 경일이 분식점의 문을 열고 나왔다.
‘음…….’
경일은 분식점 입구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세보 길드 헌터들이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확, 그냥 이대로 가서 모두 때려눕혀 버려?’
그때였다.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경일의 앞에 섰다.
“사장님, 타세요!”
이길호였다.
먼저 퇴근시킨 이길호가 차를 몰고 나타난 것이다.
“어, 형님. 여긴 웬일이세요?”
“사장님, 일단 타세요.”
이길호의 재촉에 경일이 얼른 네로를 챙겨 차에 타자, 이길호는 빠르게 차를 출발시켰다.
“저거 뭐야?”
순식간에 차를 타고 사라진 경일을 보고 김형성이 말 그대로 ‘벙’ 쪘다.
“이런 썅!”
생각도 못 한 이길호의 등장에 그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처럼 멀어져 가는 차를 보고 있어야만 했다.
도로 위엔 차 타이어가 남긴 검은 스키드마크가 이들을 비웃고 있었다.
“형님, 이 차는 뭐예요?”
경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렌트했습니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왜 퇴근하시고 다시 오셔서…….”
“사장님이 곤란하신 거 같아서요. 동네에 질 안 좋은 사람들이 깔린 게, 사장님을 노린 게 아닌가 해서 혹시 몰라 준비했습니다.”
이길호는 경일의 특별한 능력을 알고 있었다.
사실 경일의 능력을 이길호가 눈치채지 못하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그 뒤로 지금까지 분식점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그런 그가 지금 벌어진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길호는 아내와 퇴근 후, 자신만 빠져나와 차를 빌렸다.
그러고는 경일의 퇴근 시간에 맞춰 나타난 것이었다.
“어쨌든 형님 덕에 살았네요. 안 그래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할까 계속 고민 중이었거든요.”
경일도 이길호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솔직하게 말했다.
이길호는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그들이 노리는 게 사장님이 맞았군요. 앞으로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한동안 분식점은 닫고 생각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제가 약해서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심부름이라도 시켜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면을 바라보며 운전하는 그의 얼굴에 비장함이 엿보였다.
“마음만으로도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사장님의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싸울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해 주십시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한두 명은 상대할 자신 있습니다. 그동안 던전을 열심히 다닌 덕에 레벨이 많이 올랐습니다. 사장님 덕에 마나 스탯은 모르긴 몰라도, 동 레벨 헌터 중에 제가 가장 높을 겁니다. 그리고 최소한 사장님보다 먼저 죽을 거란 건, 약속할 수 있습니다.”
“아니, 누님이랑 수한이를 두고 무슨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그럽니까? 가족들이 들으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누님 앞에서나, 수한이 앞에서 절대 이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사장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미 아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한이도 크면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길호의 진솔한 마음이 그대로 경일에게 전해져 왔다.
그 마음이 무척이나 고마웠지만, 수한이를 보고 이 가족을 돕기 시작했는데, 아이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 주제로 이야기하다가는 안 될 거 같아서 경일은 말을 돌렸다.
“분식점은 한동안 닫을 생각입니다. 형님도 이번 기회에 가족들이랑 여행이나 한 번 다녀오세요. 누님이 회복하고 난 뒤에도 식당 일을 한다고 가족끼리 있을 시간이 많이 없었잖아요.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해 주셨는데, 제가 주는 보너스라 생각하고 다녀오세요. 그리고 저는 싸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절대 그런 말 하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이길호는 경일에 말에 순순히 대답하는 모양새였지만, 그가 여행을 가진 않을 거라는 건 둘 다 알았다.
돌아가지 않으려는 이길호를 어렵게 달래 집으로 보냈다.
그 시각, 동네 분식의 비품들이 박살 나고 있었다.
경일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에 바짝 약이 오른 김형성이 화를 참지 못하고 분식점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러고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작살내기 시작했다.
“부길드장님, 보는 눈도 많은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1팀장이 빠르게 말려 보지만, 눈이 돌아간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길드장밖에 없었다.
결국 한참 분식점을 부수던 그는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멀쩡한 남의 가게를 침입해서 물건을 파손한 혐의로 유치장에서 하루를 살고 다음 날 겨우 풀려났다.
세보 길드는 이 지역에서 나름 인지도가 있는 길드였다.
부길드장이나 되는 사람이 일반인이 운영하는 분식점을 부순 일이 지역신문에 보도가 되면서 제대로 망신살이 뻗치게 됐다.
길드장에게 제대로 깨진 그는 이 모든 원망을 경일에게 돌렸다.
그의 마음속에 경일에 대한 깊은 원망이 응축되어 갔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