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통행세 (1)
며칠 후, 두 영주는 다시 만났다.
둘은 모두 심하게 아팠는지 눈은 휑하고 볼살이 홀쭉해져 있었다.
이제 그들이 반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에 날이 서 있던 이전과는 달리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매우 부드러워져 있었다.
같은 아픔을 겪은 터라 동병상련을 느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어 있었다.
“백작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나름 회복했네. 자네는?”
“저도 많이 회복했습니다.”
이들이 오늘 만난 이유는 금광에서 죽은 인부들의 보상 문제 때문이었다.
다른 영지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인 만큼, 죽음에 대한 보상을 해야 했다.
“하, 머리 아프군, 그래.”
“저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깬 금을 다 털어도 보상금으로 모자라네. 나머지는 반반씩 내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둘은 가슴이 아팠다.
희망에 한껏 부풀어 있다가 순식간에 절망으로 떨어지는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없는 형편에 보상금까지 줘야 했으니.
“이거, 돈 나올 곳은 없는데, 계속 돈 나갈 일만 생기는군요.”
“나도 그래. 요즘처럼 힘든 적이 없었던 거 같아. 올해도 흉년이고, 영지민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점점 줄어가는데, 쓸 곳은 더 많아지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상 세금을 올리면 폭동이 일어날 판입니다. 이런 와중에 허무하게 금광이 날아가다니…….”
“금광 이야기는 하지 마세나. 생각만 해도 속이 쓰리니.”
“그러죠.”
“자, 한잔 받지.”
패드래건이 게렉스에게 술을 권했다.
술맛이 그들의 기분만큼이나 썼다.
그렇게 둘 사이엔 깊은 침묵만 흘렀다.
침묵을 깬 건 패드래건의 탄식이었다.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바보 같은 짓이었다니.”
광산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자조 섞인 말로 자신을 질책했다.
20년간 광산을 두고 벌인 암투로 이들이 잃은 건 병사만이 아니었다.
두 영지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간에 치열하게 암투를 벌려 왔다.
여기에 들어간 누적된 비용과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모든 게 쓸모없는 광산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허탈해질 수밖에.
“어디, 돈 나올 만한 구멍이 없을까?”
패드래건이 한탄하듯 말했다.
“백작님, 이건 어떻습니까?”
패드래건의 말에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게렉스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패드래건이 기대에 차 물었다.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났는가?”
“네.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게렉스가 목이 타는지 술잔을 비우고 말을 이었다.
“요즘 영지에 상인들의 마차가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니 요즘 상인들의 마차가 많이 보이긴 한 거 같긴 한데, 그게 돈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최근에 스탄다비아로 들어가는 상인들의 마차가 늘어났더군요. 상인들이 스탄다비아로 가기 위해서 우리 영지 중 한 곳은 꼭 지나가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게 돈이랑 무슨 상관인가?”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기대고 있던 패드랜건이 몸을 세우고 게렉스의 말에 집중했다.
“상인들의 마차에 통행세를 붙이는 겁니다.”
“통행세?”
“네.”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패드래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껏 어떤 귀족도 상인에게 통행세를 받은 예는 없었다.
만약 자신들이 통행세를 받는다면, 왕국의 모든 상인이 들고일어날 수도 있었다.
“통행세라… 그게 가능할까? 내 생각에는 불가능한 일 같은데.”
패드래건은 일으켜 세웠던 몸을 다시 의자에 파묻었다.
그의 얼굴엔 짙은 실망감이 걸려 있었다.
“백작님,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게렉스는 패드래건의 떨떠름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걸 이야기했다.
“백작님은 우리가 통행세를 받으면 상인들이 들고일어날 걸 걱정하실 겁니다.”
“…….”
“우리가 통행세를 받으면, 일단 그들은 중앙 정계에 이 일을 공론화시켜 우리에게 큰 징계를 내리도록 유도할 겁니다.”
패드래건이 무슨 당연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한심한 눈초리로 게렉스를 바라봤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앙 정계의 귀족들은 백작님이 더 잘 아시다시피 엉덩이가 무거운 만큼 절대 맨입으로는 상인들의 부탁을 들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고위 귀족들이니, 로비하는 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갈 게 뻔하지 않겠습니까? 상인들이 귀족의 비유를 맞추며 돈까지 바칠 바에는 우리에게 몇 푼 뜯기고 넘어갈 확률이 크다고 봅니다.”
“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패드래건의 어두웠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게렉스의 계획이 터무니없게 들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상인들이 끝까지 중앙 귀족의 비위를 맞춰 뇌물까지 주고 일을 성사시킨다 해도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는 일이 한두 달 안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백작님도 아시다시피, 중앙 정계는 극도로 혼란한 상태 아닙니까? 파벌끼리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암투를 벌리고 있는 형국인데, 이 일로 안건을 올리고, 회의를 열고, 토론하고, 결정하고 하다 보면 짧은 시간에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통행세를 걷어 지금의 위기를 넘기는 겁니다.”
게렉스가 잠시 말을 끊어 패드래건의 시선을 유도한 뒤, 강렬한 시선을 교환했다.
“우리가 지금 고민할 처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무너질 바에는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위기를 해결하고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자고요. 그리고 왕권이 약해질 만큼 약해졌으니, 국왕이 무거운 징계를 내릴 확률도 그다지 높지 않을 거라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만약 무거운 징계가 내려온다고 해도 우리가 적당히 시간을 끌면 흐지부지될 공산이 큽니다. 상인들도 계속해서 로비하는 것도 부담일 겁니다. 결정적으로, 국왕이 우리 같은 변방의 귀족들에게 계속해서 신경을 쓸 만큼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고요.”
패드래건은 게렉스의 말에 점점 설득되어 갔다.
이건 자신이 생각해도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계획으로 들렸다.
“듣고 보니 그렇군. 아주 좋은 생각이야. 아직 젊어서 그런지, 머리 회전이 아주 빨라. 자네 말을 들으니 통행세를 걷어도 우리가 손해를 볼 게 하나도 없을 거 같군. 나도 이번 위기만 넘기면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으니까, 그때는 내가 상인들에게 압력을 넣을 수도 있을 것이고. 상인들도 이걸 모르지 않으니, 아마 몇 푼 뜯긴 거로 넘어갈 확률이 높겠군.”
“그렇지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스탄다비아에 압력을 줄 수 있으니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상인들은 분명 통행세를 낸 만큼 비누의 가격에 반영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어떻게든 손해를 메꾸려고 하겠죠.”
“그렇군. 스탄다비아까지 괴롭힐 수 있단 말이지… 아주 신묘한 수군 그래. 스탄다비아가 약해지면 아주 좋지. 광산이 사라진 이상, 이제 남은 건 스탄다비아뿐이군, 그래.”
“하하하, 그렇지요. 스탄다비아에 대한 부분은 날 잡아서 깊게 한 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시죠. 이번에 광산에 대해 합의한 것처럼 충분히 합의점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우리가 서로 피 흘리고 싸울 필요가 없지. 광산으로 본 손해만 해도 충분하네. 스탄다비아에에 관한 건, 다음에 만나서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통행세 이야기를 마무리 짓도록 하지.”
“네, 백작님. 이야기가 이렇게 잘 통할 줄 알았으면 진즉에 대화를 할 걸 그랬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자! 내 술 한잔 받게나.”
“감사합니다.”
이들은 처음에 죽을상을 하고 만났지만, 지금은 새로운 희망을 찾아 밝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이 밝아진 만큼 스탄다비아에는 어둠이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 급보입니다.”
첩보장 블라도 기사가 급하게 자포리자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블라도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자포리자는 다급한 그의 얼굴을 보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에서 스탄다비아에 들어오는 상인들의 마차에 통행세를 걷고 있다고 합니다.”
자포리자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런…….”
처음 광산이 잘 돌아간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는 마음을 놓았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관심이 광산으로 쏠리는 건, 스탄다비아의 입장에선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광산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다.
혹시나 광산으로 쏠린 관심이 다시 스탄다비아로 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하루 마음이 편치 않더니, 결국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그것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누구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지금의 스탄다비아에겐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이건 한 방에 숨이 넘어갈 수도 있을 만큼 위력적인 수였으며 제대로 급소를 찔린 셈이었다.
자포리자는 즉각 성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들였다.
모두 소식을 들었는지 집무실에 들어오는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다들 소식은 들었지?”
“네.”
가신들이 짧게 대답했다.
“일단 자세한 상황을 듣고 시작하지.”
자포리자의 말에 블라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의 일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드리온은 영주 일족의 분에 넘치는 사치만으로도 영지의 재정이 휘청일 정도였는데, 계속된 흉년까지 겹치자 영지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이를 극복하고자 사업에 투자했는데, 투자한 사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파산할 정도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블라도가 회의에 참석한 이들을 둘러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빌린 돈의 이자도 갚기 힘든 상황이라, 결국 영지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겼고, 이제는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영지의 분위기가 흉흉하다고 합니다.”
블라도는 아드리온의 현황에 이어 프라인에 관한 설명을 이어 갔다.
“프라인도 사정이 안 좋긴 매한가지입니다. 아드리온 만큼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사치가 심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프라인이 어려워 진 건, 패드래건 백작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일대의 꿈인 중앙 정계 진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지금까지 엄청난 자금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된 흉년으로 인해 지금까지 노력한 중앙 정계 진출이 중지될 위기에 처한 상태입니다.”
“……”
블라도의 보고가 이어질수록 자포리자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중앙 정계 진출의 성과를 거두기 직전이라는 소문이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패드래건 영주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두 영주는 서로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20년간 소유권을 놓고 싸우던 것을 멈추고 공동으로 광산 개발에 들어갔습니다. 초반의 분위기는 아주 괜찮았다고 합니다. 광산에서 매장된 금은 그들의 기대를 넘을 만큼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광산이 무너져 내려 여러 광부가 매몰되어 죽었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연약 지반이라 더 이상 개발할 수 없다고 결정이 났다고 합니다.”
“음…….”
자포리자가 뱉은 낮은 침음이 지금의 스탄다비아의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듯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져 갔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