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90화 (190/300)

[190화] 통행세 (2)

“광산이 무너지면서 죽은 광부들에게 줄 보상금 때문에 영지의 사정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지금까지 생산했던 금으로도 보상금이 부족했고, 그런 그들이 돈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생각한 게 스탄다비아로 들어오는 상인의 마차에 통행세를 물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통행세는 얼마인가?”

자포리자가 침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차 한 대에 실린 물건의 3분의 1만큼의 양을 통행세로 압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자식들!”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기사장 칼튼이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칼튼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지금부터는 이번 일이 우리에게 끼칠 영향에 관해서 의논하는 것으로 하지.”

자포리자가 회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했다.

“상인들이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상인들이 알아서 해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블라도가 먼저 자신의 의견을 냈다.

“지금 왕국에서 가장 힘 있는 집단 중의 하나가 상인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행정관 사미르도 블라도를 의견에 동조했다.

“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긴 합니다. 만약 일이 그렇게만 풀리면 저희 입장에선 가장 좋긴 하지만, 최악의 경우도 대비해야 합니다. 먼저 생각나는 건, 왕국에서 언제 제재가 내려올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빨리 내려오면 좋겠지만, 그 시기가 늦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카스만이 의견을 냈다.

“카스만 경의 의견대로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와 그에 대한 대비책도 함께 이야기해 보는 걸로 하지.”

자포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 진행을 이어 갔다.

“음, 저는 상인들의 행동이 걱정됩니다. 일단 상인들이 통행세에 반발한다고 해도 당장에 손해 보는 부분을 어떻게 할지 걱정입니다. 이들이 이 손해를 순순히 자신들이 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 손해를 우리에게 모두 전가할 수도 있을 테고, 아니면 일부만 전가할 수도 있을 걸로 보입니다.”

“사미르, 좋은 의견이군. 다른 의견은?”

“저는 통행세보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이 손을 잡은 것이 더 걱정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영지전을 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인 건,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저도 상인에 대한 문제보다 칼튼의 의견에 대한 해결책이 가장 먼저라 생각합니다.”

칼튼의 의견에 카스만도 동의했다.

자포리자 역시 크게 고개를 끄떡여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였다.

“칼튼의 의견이 우리에게 가장 당면한 문제인 거 같군. 상인들의 문제는 닥치면 해결하는 걸로 하고, 이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 보지.”

자포리자의 말이 끝났지만, 조금 전과 달리 쉽게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다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것이 깊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사미르는 좋은 생각이 잘 나지 않는지 머리를 쥐어뜯었고, 카스만은 팔짱을 끼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이 문제는 자포리자도 평소 계속 생각하던 문제였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이 언젠가는 영지전을 걸어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 둘이 손을 잡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한 곳과의 영지전도 이길 방법이 없는데, 두 영지와의 영지전이라니.

그 결과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평소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대비했던 자포리자도 이번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내지 못했다.

사실 아예 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 있었다.

몬스터에게 점령당한 선조의 땅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그곳의 천혜의 요새라 어떤 적과도 맞서 싸울 수 있지만, 이 방법은 현실성이 없었다.

그 곳을 점령한 몬스터를 쫓아내는 일부터 5만 명이나 되는 영주민들이 자리 잡기까지 들어갈 물자의 양은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경일이 도와준다고 해도 이 많은 인원이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할 때까지 먹여 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아무도 답을 내지 못하고 회의는 끝이 났다.

스탄다비아로 들어오는 상인들의 모든 마차는 프라인과 아드리온을 거쳐야 했다.

두 영지를 거치지 않고 들어오려면 마차를 이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길도 없는 험준한 산을 마차로 넘을 수는 없었으니까.

통행세를 피해 보부상처럼 사람이 직접 짐을 들고 갈 수도 있지만, 강도와 몬스터라는 또 다른 장애물이 있었다.

상인들의 동요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이건 자다가 강도를 당한 것과 같았다.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베르아스 왕국 어디서도 상인에게 통행세를 걷어 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뭐라? 죽고 싶으냐?”

프라인에 들어온 상인이 통행세를 거부하자, 중갑을 입고 검을 든 기사가 상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압박했다.

“나중에 이 일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는 않겠지요. 상인들을 적으로 돌리고도 앞으로 무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상인이 기죽지 않고 제법 대차게 반항했다.

그와 함께 기사의 검집에서 천천히 검이 뽑혀 나왔다.

그 모습에 상인의 단호했던 얼굴이 차츰 공포로 물들어 갔다.

“다시 한번 씨불여 봐라. 그래, 네놈 말대로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영원히 모를 거야. 내가 지금 네놈의 목을 몸과 분리시킬 거거든.”

기사가 상인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사악하게 웃었다.

칼날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에 상인은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상인의 의지가 꺾이는 건 한순간이었다.

기사의 말대로 미래가 어떻게 되든 당장 자신이 죽어 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통행세를 받, 받, 받치겠습니다.”

상인은 새파랗게 질려 잘 열리지 않는 입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기사가 검을 거두며 말했다.

“네놈의 통행세는 물건의 2분의 1만 받도록 하지.”

“아니, 조금 전까지 3분의 1이라고…….”

한순간에 늘어난 통행세에 상인이 놀라 말끝을 흐렸다.

“넌 괘씸죄가 추가되겠든. 내 검을 검집에서 뽑히게 했으면, 그 정도면 싼 거 같은데. 다시 한번 내 검이 뽑히면 이번에는 아마 네 목을 통행세로 받쳐야 할 거야.”

기사의 차가운 목소리에 상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짐의 반을 통행세로 받쳤다.

가벼워진 마차를 끌고 스탄다비아로 향하는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이 일은 프라인 뿐만 아니라 아드리온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인들은 졸지에 물건의 3분의 1을 강탈당한 채 스탄다비아로 가야 했다.

이 일로 상인의 거리가 시끄러워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너도 당했어?”

“너도?”

“미친 거 아냐? 일개 변방의 귀족이 상인들을 건들이다니.”

상인들은 화를 참지 못했다.

각 상단의 간부들이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이렇게 당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똘똘 뭉쳐 대응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변방의 귀족 따위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상인들은 이 일이 얼마나 분한지 모임을 시작하자마자 프라인과 아드리온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자자, 모두 화가 난 건 알고 있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합시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십시오.”

이곳의 모인 상단 중에 가장 규모가 큰 로셀린 상단의 지점장이 회의를 진행했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을 성토하던 사람들이 막상 의견을 내라고 하자,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먼저 나서기가 곤란한 것이다.

이런 문제에 괜히 먼저 나서서 좋을 게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뒤를 따라가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음, 서로 눈치 보지 마시고 의견을 내주세요. 다들 생각이 많을 건데, 이대로라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점장이 부드럽게 음성으로 상인들을 독촉했다.

“이건 여기에 모인 상단들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프라인과 아드리온이 한 짓이 묵인된다면, 왕국의 또 다른 귀족이 이런 후안무치한 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왕국의 모든 상단이 힘을 모아 대응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당장 이 문제를 공론화해서 고발합시다. 우리가 똘똘 뭉치면 중앙 정계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보기로 프라인과 아드리온에게 무거운 벌이 떨어져야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지 않겠습니까?”

세이렌 상단의 지점장이 먼저 의견을 냈다.

이번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세이렌 상단이었다.

한동안 생산이 없던 비누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투자했는데, 하필 말도 안 되는 통행세가 생겨 큰 손해를 입었다.

세이렌 상단은 워낙 피해가 컸던 터라 지점장은 이곳에 모인 사람 중 가장 안색이 어두웠다.

모두 그의 의견에 모두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세이렌 상단의 의견에 다들 동의하시는 것 같으니, 이 의견을 중심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로셀린 상단의 지점장이 말했다.

“잠깐만요.”

로렌 상단의 지점장이 손을 들었다.

“먼저 제 의견을 말하기 전에 로렌 상단도 세이렌 상단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고 동참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그는 무언가 다른 의견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왕실에 고발하는 것에 대한 의논은 여기서 하는 것보다 각 상단의 상단주님들이 모여서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처한 가장 시급한 문제를 의논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로렌 상단 지점장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이런 큰 문제는 변방을 맡고 있는 지점장들의 권한을 뛰어넘는 이야기였다.

“어떤 것을 말하는 겁니까?”

로셀린 상단의 지점장이 물었다.

“당장에 우리가 입은 손해를 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로렌 상단 지점장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선명한 시선이 모였다.

“지금 몇 분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아 알려 드리자면, 통행세는 스탄다비아로 올 때만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산 비누를 가지고 돌아갈 때도 분명 통행세라는 명목으로 뜯어 갈 것입니다. 그들도 이 일로 인해 나중에 큰 벌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또다시 통행세를 뜯어갈 게 뻔합니다.”

이미 예상하였던 몇몇 지점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지점장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들의 반응으로 보아 설마 또다시 통행세를 뜯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말은 프라인과 아드리온은 자신들의 영지를 지날 때마다 그 무거운 통행세를 무조건 매기겠다는 이야기였다.

스탄다비아로 들어오면서 무려 3분의 1이나 되는 물건을 강탈당했는데, 돌아가는 길에도 통행세를 걷어가겠다니.

닳고 닳은 상인들도 생각지 못할 만큼, 이번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조치는 독했다.

“솔직히 그렇게 되면 장사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장사를 할수록 큰 손해를 입는데, 누가 장사를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저뿐만 아니라 여기 모이신 모든 분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건 모두 비누가 유일하게 스탄다비아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비누를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귀족이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비누의 생산이 끊어진 바람에 귀족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비누를 사기 위해 선주문과 함께 값까지 지급한 상태였다.

상인들도 미리 돈을 받아 융통할 수 있으니,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비누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생산되고 있는 비누를 팔지 않는 것은 그들의 신용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터.

더군다나 왕국에서 가장 힘 있는 귀족들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통행세를 내더라도 장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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