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91화 (191/300)

[191화] 선조의 땅

“정말 악독한 놈들이네. 무지막지한 통행세를 매기기에 완전히 미친 줄 알았더니, 그 모든 게 계산된 행동이었다니…….”

누군가의 입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이 일이 일어난 건, 우리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프라인과 아드리온은 스탄다비아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건 그들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엉뚱하게 우리가 중간에 끼어 큰 손해를 본 겁니다. 그래서 제 의견은, 프라인과 아드리온에 입은 손해를 스탄다비아에서 받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우리가 팔려고 스탄다비아에 가져온 물품의 손해와 스탄다비아에서 산 비누의 손해에 대해 나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로셀린 상단의 지점장이 사람들을 대신해 물었다.

“네. 첫 번째, 우리가 가지고 온 물품은 통행세만큼 가격을 높게 책정해서 파는 겁니다. 두 번째, 비누의 손해는 자포리자 영주에게 통행세를 보존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기존 비누의 가격보다 통행세만큼 싸게 책정하든지, 기존의 가격이라면 통행세만큼 비누를 더 받아 내는 게 합당하고 생각합니다.”

“옳소, 옳소.”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 상단은 이 의견에 100%로 동의합니다.”

“하이런 상단도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짝짝짝짝!

사람들이 로렌 상단의 지점장이 의견에 동의하며 박수를 쳤다.

“좋습니다. 그럼 프라인과 아드리온에 대한 처벌 문제는 각 상단의 상단주에게 넘기는 것으로 하고, 우리는 로렌 상단 지점장의 의견을 채택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상인들은 서로의 이득이 걸린 만큼, 이 문제만큼은 똘똘 뭉쳐 대응하기로 했다.

이들이 선택한 건 스탄다비아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을 이곳에 모인 상인들의 힘으로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지만, 스탄다비아는 달랐다.

변방의 작은 자작의 영지 정도는 이들의 힘으로도 충분히 압박할 수 있었다.

이들은 스탄다비아에서 여러 영양분을 운반하는 혈액과 같았다.

당장 이들이 상행을 중단하면 모든 장기가 죽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스탄다비아의 물가가 한순간에 하늘로 치솟았다.

그와 함께 스탄다비아와 거래하는 모든 상인이 비누의 통행세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사미르, 상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가능한가?”

자포리자가 행정관을 불러 물었다.

“가능하긴 합니다. 비누의 이윤이 60퍼센트가 넘으니,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보장해 줘도 약간의 이익이 남긴 합니다. 하지만 가장 문제는 지금 치솟고 있는 물가입니다. 영지민들의 삶이 급속도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물가를 잡으려면 상인들의 물건을 선구매하여 영지민들에 기존의 가격을 팔든지, 아니면 가구마다 보조금을 나누어 줘야 할 거 같습니다. 문제는 비누를 팔고 남은 수익금뿐만 아니라 영지의 재정도 함께 투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속이 쓰렸다.

이 모든 돈이 프라인과 아드리온으로 흘러들어갈 걸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깊은 분노가 일었다.

피로가 급속도로 밀려들어 마치 태산에 짓눌린 거 같았다.

“만약 비누 판매를 멈추면 어떻게 될 거 같은가?”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면 자포리자는 사미르에게 물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선인님을 만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선인님이 전수한 농사 기술과 수로를 연결해 농지가 늘어나 수확량은 증가하고 있으나, 알리사 영지민들의 이주로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식량뿐만 아니라 생필품 같은 경우에는 상인에게 거의 의존하다시피 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습니다. 안정되기까지의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은 아무래도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상인들의 단합을 무너뜨릴 방법은 없는가?”

“저도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방법이 없습니다. 워낙 이번에 큰 손해를 입은 터라 상인들의 단합이 어느 때보다 견고합니다. 만약 단합을 깨뜨리려면 특정 상단에게 더 많은 이익을 보장해야 합니다. 다른 상단들의 공공의 적이 될 게 뻔한 일인 만큼 그걸 뛰어넘는 이권을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비누의 독점권을 줘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독점권을 준다면, 미래에는 우리 목줄을 조를 수 있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말만 해야 하는 사미르의 표정도 편치 못했다.

“알겠네. 나가 보도록.”

“네, 영주님.”

“하…….”

자포리자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핍박하는 거지… 이 원한은 절대, 절대로 잊지 않겠다.”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꽉 쥔 주먹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자포리자는 프라인과 아드리온 방향으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오랫동안 강렬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

.

.

한 달 뒤, 아드리온에서는 근래에 들어 가장 큰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번에 통행세로 큰돈을 번 두 영주는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잊고, 앞으로의 화합을 위해 두 영지의 귀족들을 모두 초청했다.

“하하하하하!”

“호호호호!”

연회장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이번에 특별히 초청된 악단들이 음악을 연주했고, 처음으로 두 영지의 모든 귀족이 모인 터라 서로 교류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이거 대단한걸? 이건 소문보다 더 좋군. 어, 저건 요즘 왕국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다빈스의 그림이 아닌가?”

패드래건은 연회장의 한쪽에 걸린 그림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패드래건 백작님이라면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알기론 돈이 있어도 못 산다고 들었는데, 대단하군. 자네가 심미안이 뛰어나다고 하더니, 오늘 보니 소문이 오히려 모자란 느낌이야. 연회장을 꾸민 하나하나의 장식까지 모두 신경을 썼군. 이거, 그릇도 보니 수도에서 가장 유행하는 제품이고. 수도에서 유력 인사의 파티에 많이 다녀 봤는데, 오늘 연회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하군.”

“하하하, 감사합니다.”

게렉스 영주는 뿌듯한 듯 환하게 웃었다.

사치로 유명한 게렉스 영주의 연회장다웠다.

영주 일가의 사치로 영지가 어려워질 정도니, 연회장이 얼마나 호화스러운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하하하하하! 한잔 받게나.”

패드래건이 기쁜 얼굴로 게렉스에게 술을 권했다.

술잔을 든 게렉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이들은 통행세를 징수하면서 거둬들인 돈으로 급한 불을 모두 껐다.

이 방법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스탄다비아에게 갈 모든 이익을 자신들에게 돌린 것과 다름없었다.

아니, 이익뿐만 아니라 스탄다비아의 재정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스탄다비아를 정복한 것보다 더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스탄다비아를 정복한다는 것은 스탄다비아가 가지고 있는 문제 또한 떠안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건 가만히 앉아서 이익만 쏙 골라 먹으니, 이보다 더 통쾌할 수가 없었다.

“상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이들에게 유일하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상인들이었다.

“일이 잘 풀리려고 그런 건지 상인들의 반응 또한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이제는 통행세를 내는 것을 받아들이는 눈치입니다. 우리에게 뜯긴 만큼 스탄다비아에서 비싸게 팔아 이익을 보존하니, 처음과 같은 반발은 많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끌끌끌, 스탄다비아만 난리가 났군.”

“비누 또한 자포리자와 단판을 지어 손해를 보전받기로 했답니다. 처음에는 각 상단주들이 모여 힘 있는 귀족에게 줄을 대 우리를 징계하려 했지만, 그 또한 많은 돈이 드니 흐지부지되는 분위기랍니다. 실질적으로 상인들이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들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거지요. 우리가 가장 걱정했던 왕국으로부터의 징계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하하하! 근래에 이렇게 통쾌하게 웃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

“하하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스탄다비아가 그렇게 돈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걷은 통행세를 보니 이건 완전히 예상 밖이야. 지금까지 내가 스탄다비아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완전히 바뀌었다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스탄다비아에서 상업이 활발할지는 몰랐습니다. 비누가 대단한 물건인 줄 알았지만, 이렇게 큰돈이 될지 몰랐습니다. 바로 옆의 영지에 이렇게 큰돈이 굴러가고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나도 그렇다네. 그만큼 스탄다비아에 관한 우리의 인식이 낮았던 거지. 하여간 자포리자 그놈이 대단하긴 하네. 그런 거지 같은 영지에서 비누를 만들어 내다니. 거기다가 마나 연공법에 강철까지. 하여간 그놈이 난놈이긴 해.”

“그 부분은 저도 인정하지만, 대신 그만큼 운이 없기도 하죠. 바로 옆에 두 호랑이가 떡하고 버티고 있으니 말이죠. 그놈이 아무리 난놈이라도 아직은 한 마리 개일 뿐입니다.”

“그렇지. 그건 그렇고, 이제 스탄다비아를 어떻게 할지를 이야기해 보세나. 이대로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나, 상인들에게 계속해서 통행세를 걷기에는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어. 이 점은 자네도 동의하겠지.”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가 스탄다비아를 먹는 수밖에 없겠지.”

“지금부터 영지전 준비에 돌입하죠.”

“그래, 나도 준비하겠네.”

스탄다비아를 삼킬 거대한 토네이도가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연회가 더욱 빛이 날수록 스탄다비아는 더욱 깊은 어둠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경일은 스탄다비아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릴 때부터 아무리 힘들어도 남의 것을 탐하거나, 훔치거나, 뺏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 천지였다.

더군다나 가족처럼 믿었던 사람마저 자신에게 사기를 치는 바람에 죽는 게 더 편할 거 같은 삶을 살아왔다.

자포리자도 마찬가지였다.

정직하게 살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런 그를 뜯어먹기 위해 살쾡이가 호시탐탐 스탄다비아를 노리고 있었다.

자포리자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이 마음속 깊이 공감되었다.

당장 던전의 자원을 팔아 돈을 마련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똥파리들이 몰려들었다.

이번에는 세보 길드가 자신을 누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답답했다.

천고의 보물과 같은 던전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이 부족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거 같아 죄스러웠다.

더군다나 네로의 이야기를 듣고 스탄다비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난 뒤로 더욱 마음이 쓰였다.

스탄다비아가 무너진다는 건, 그 자체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지구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경일의 발전이 끝날 뿐만 아니라, 지구로 오는 몬스터를 막아 줄 세력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사실 자포리자는 이 일에 대한 해결책을 오래전에 내놓은 상태였다.

경일도 해결책에 충분히 공감했고, 실행하지 못하는 그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했다.

자포리자가 생각한 해결책은 이주였다.

보일가가 한참 세력을 떨칠 때의 선조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금의 영지는 몬스터에게 밀려 융성했던 선조의 땅에서 쫓겨나 끝자락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예전 보일가의 영지는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뒤로는 큰 강을 끼고 있어 물자의 유통이 자유로웠고, 영지로 들어오는 주요 거점마다 방벽이 설치되어 몬스터뿐만 아니라 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충분히 일당백의 싸움이 가능한 곳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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