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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92화 (192/300)

[192화] 뜻밖의 연락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망가진 곳도 많겠지만, 워낙 튼튼하게 지어진 터라 보수만 하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토지 또한 매우 비옥했다.

강을 끼고 있는 넓은 평야는 농사를 짓기 최적의 장소였다.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한 풍족한 자연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100년 이상 농사를 짓지 않았으니, 땅은 최고의 지력을 보유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선조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포리자의 오랜 꿈이었다.

하지만 무려 5만의 인원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5만의 이르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물자가 필요했다.

아무리 아껴 먹고 쓰더라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는 턱도 없었다.

“하, 정말 쉬운 게 없구나. 내가 최소한의 돌파구라도 뚫어 줘야 하는데.”

스탄다비아도 걱정이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분식점을 열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경일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던전에서 일하는 도중 짬짬이 분식점 근처에 게이트를 열어 동태를 살폈다.

동네는 엉망이었다.

세보 길드가 동원한 헌터들과 양아치들이 온갖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자신이 사라지면 세보 길드도 전부 철수하거나, 자신을 감시할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철수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아무도 철수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게 힘들었다.

이대로 모른 척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시간을 보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위험해도 세보 길드 지휘부를 쳐야겠어.”

경일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본 번호로 많은 부재중 통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누구지?”

액정에 뜬 번호를 보고 생각하는 동안 전화가 끊겼다.

문자를 확인한 경일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걸렸다.

“이거 잘만 하면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겠는걸?”

그는 산동네를 벗어나자마자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핸드폰에서 고은 미성이 들렸다.

“김경일입니다.”

“네? 혹시?”

“저한테 전화를 많이 하셨더라고요.”

“아, 네. 그동안 연락이 안 돼서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해성 길드의 부길드장 우해수라고 합니다. 던전 고유 식물 거래에 관할 일로 사장님을 제가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랑 장소만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곧장 찾아가겠습니다.”

우해수는 마음이 급해 보였다.

“지금은 어떠세요?”

“네?”

경일의 적극적인 자세에 오히려 우해수가 당황했다.

“지금 힘드시면 다음에 시간을 정해서 보는 걸로 하죠.”

“아니요. 지금도 괜찮습니다.”

우해수는 곧바로 약속을 잡았다.

그녀는 해성 그룹의 후계자였다.

여자라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하나뿐인 오빠를 제치고 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받았을 만큼 능력이 있었다.

우해수는 그룹의 힘을 바탕으로 해성 길드에서 부길드장의 직함을 맡고 있을 정도로 실세 중의 실세였다.

“김 비서, 오늘 스케줄은 모두 취소해 주세요.”

“네, 부길드장님.”

우해수는 오늘 해야 할 일정을 취소했다.

지금은 경일을 만나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경일은 약소 장소에 먼저 가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숍의 문이 열리고 늘씬한 미녀가 들어왔다.

우해수였다.

그녀도 헌터였지만, 실제 모습은 모델처럼 보였다.

뿔테 안정을 끼고, 170은 훌쩍 넘어 보이는 키, 쫙 달라붙는 어두운 색의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굽이 높은 하이힐까지.

자연히 커피숍에 있는 남자들의 시선이 모일 정도의 미녀였다.

그녀는 경일의 얼굴을 알고 있는 듯 망설임이 없이 그가 앉아 있는 곳으로 왔다.

“안녕하세요, 김경일 씨죠?”

“네, 반갑습니다.”

경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자리에 앉으시죠.”

경일에 말에 우해수는 길쭉한 다리를 품위 있게 움직여 자리에 앉았다.

아름다움 미모와 자신 있는 태도는 상대에게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식으로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해성 길드 부길드장 우해수입니다. 해성 길드는 들어 보셨죠?”

“네.”

해성 길드는 해성 그룹을 기반으로 탄생한 길드로, 국내에서 50위권에 들어가는 대형 길드이다.

이 도시에 기반을 둔 길드 중에 가장 큰 길드였다.

“이번에 저희가 포션 사업과 헌터 관련 제품을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좋은 인재들은 많이 확보했지만, 원재료 수습하는 게 쉽지가 않네요. 다들 기존의 거래처가 있는 만큼, 후발 주자인 저희가 끼어들 틈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연락드렸습니다.”

이해인은 대형 길드의 부길드장답지 않은 겸손한 태도였다.

지금껏 만난 헌터들은 대부분 힘에 취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터라 느낌이 또 달랐다.

“저를 어떻게 아시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도시에서는 저희 길드가 가장 큰 만큼, 이 정도 정보는 금방 귀에 들어옵니다. 특히 세보 길드가 총출동하다시피 했는데, 이 정도도 눈치 못 채면 곤란하죠. 사장님의 성함이랑 전화번호는 동네에서 워낙 유명하셔서 구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아,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경일이 고개를 끄떡였다.

세보 길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만큼, 해성 길드가 찾아왔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장님이 가진 물량을 저희에게 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량만 충분하다면, 시장가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해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경일의 예상대로였다.

해성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최소한 막무가내로 나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기껏해야 실무자급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큰 거물이 약속 장소에 나와 약간 의외였을 정도였다.

아마 이 정도로 적극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사정이 급하다는 이야기일 터.

“어느 정도의 수량을 원하시는가요?”

이해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솔직히 경일이 보유한 수량을 확인할 수 없어 반신반의하고 나온 자리인데, 그의 말에 확신이 생겼다.

“저희로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혹시 어느 정도의 수량이 가능하신가요? 소문으로는 던전 고유 식물뿐만 아니라 미스릴까지 가지고 계시다고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네. 미스릴도 가지고 있습니다.”

경일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듯한데, 숨기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세보 길드라는 불청객이 먼저 와서 곤란했지만, 덕분에 이런 대어가 걸렸으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제가 어느 정도 수량을 거래해야 제 주위의 날파리가 정리될까요?”

경일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거래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전도 보장해 달라는 말이었다.

이해인은 곧 경일에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듣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들이 대형 길드라고 해도 중형 길드를 핍박하는 그림은 좋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덩치가 크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하나의 중형 길드와 각을 세울 정도면, 어느 정도 수량이면 충분할지 빠르게 계산했다.

“던전 고유 식물은 몇 종류나 공급할 수 있으신가요? 혹시 던전 금속도 종류별로 다 가지고 계신가요?”

경일에게 질문하는 우해수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렸다.

“음, 모든 걸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 일단은 간단하게 계산합시다. 던전 고유 식물은 커니네스와 던전 금속은 미스릴을 공급하겠습니다.”

“커니네스요?”

우해수가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커니네스는 던전 고유 식물 중에 가장 구하기 힘든 마나 포션의 원재료였다.

“한 달에 커니네스 식물 100㎏, 미스릴 100㎏ 가능한가요?”

“음…….”

커니네스 식물 100㎏라면 마나 포션 1,000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고, 미스릴 100㎏면 한손 검을 만든다고 했을 때 거의 90개 정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

한 달이라는 단서가 붙는 만큼, 저 정도 양이면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해인은 경일의 능력이 궁금해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을 불렀다.

솔직히 반, 아니 삼분의 일이라도 꾸준히 공급해 준다면, 세보 길드 와 척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길드를 없애는 것이 아닌 경일의 근처에서 사라지게만 하는 단순한 일에, 이만한 계약을 할 수 있다면 자신으로서는 엄청난 이익이었다.

경일과 계약이 되는 순간, 명분은 자신에게 있었다.

명분이 있는 이상 세보 길드에 강하게 나가더라도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자신의 소중한 거래처를 건든다는 것은 해성 길드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같았다.

해성 길드의 개입은 세보 길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될 것이다.

힘으로 경일을 핍박한 만큼, 해성 길드라는 거대한 힘에는 세보 길드도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속이 지독하게 쓰릴 건 당연했다.

“좋습니다. 계약서 쓰죠.”

“네? 진짜요?”

자신이 부른 물량 그대로 계약서를 쓰자는 말에 깜짝 놀라 오히려 우해수가 되물을 정도였다.

그냥 던져 본 말에 가까웠는데… 설마 이렇게 계약이 될지는 몰랐다.

이건 인식의 차이였다.

우해수에게 한 달에 커니네스 100㎏, 미스릴 100㎏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물량이지만, 던전을 가지고 있는 경일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물량이었다.

그에게는 이 정도의 물량은 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 퍼 올린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 시간 뒤에 만나서 계약합시다. 물건을 가지고 올 테니. 동네 사람들이 힘들어하니, 날파리는 곧바로 치워 주실 거라 생각하겠습니다.”

“아, 네… 네.”

그녀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이 계약을 할 수 있다면 세보 길드를 몰아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계약은 길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길드뿐만이 아니라 해성 그룹에도 큰 도움이 될 만큼 큰 계약이었다.

“아 참, 제가 알기론 해성 그룹이 식품회사뿐만 아니라 건설사도 가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네.”

이 시대의 대기업들은 보통 건설사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로 망가진 도시 재건 사업이 꾸준히 벌어지고 있으니, 건설사가 많은 건 당연했다.

“그럼 한 시간 뒤에 보는 걸로 합시다.”

얼떨결에 대답하는 우해수를 남겨 두고, 경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니네스와 미스릴은 인벤토리에 있어 여기서 바로 꺼내 줄 수도 있었지만, 인벤토리 스킬이 있는 것을 숨기기 위해 한 시간 뒤에 약속을 잡았다.

우해수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물량에 계약하자는 말도 모자라 지금 바로 물건을 가지고 온다니.

혹시 몰라 볼을 꼬집어 보니 아팠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녀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해 계약서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정확히 한 시간 후 경일은 미스릴 100㎏과 커니네스 100㎏을 가지고 나타났다.

반신반의하던 이해인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절대 놀라지 않을 거 같은 그녀의 놀란 모습은 꽤 재밌었다.

“흠, 흠.”

우해수는 빨개진 얼굴을 진정하려 헛기침하며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려 노력했다.

“여기 계약서입니다. 읽어 보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경일은 우해수가 건넨 계약서를 꼼꼼히 살폈다.

내용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딱 하나 계약 기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해수가 경일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 곧바로 말했다.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은 말씀하시면 됩니다. 최선을 다해 사장님의 의견을 반영해 드리겠습니다.”

“계약 기간이 3년이군요. 이걸 6개월로 수정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대금은 현금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물품으로 받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계약 기간은 알겠는데, 물품으로 받고 싶다니…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면 쌀이나, 생필품, 건축자재 이런 걸로 받고 싶습니다.”

“아~ 네, 가능합니다.”

해성 그룹의 주력 회사가 식품 회사이고, 건설 회사도 가지고 있으니 경일의 조건을 맞추는 건 문제 될 게 전혀 없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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