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93화 (193/300)

[193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 존재

“그런데 계약 기간은 너무 많이 줄이신 거 같은데, 2년은 어떻습니까?”

우해수는 조금이라도 경일과의 계약 기간을 길게 가지고 가고 싶었다.

헌터가 등장한 이후로 한 개인이 이렇게 많은 양의 커미네스와 미스릴을 제공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6개월만 해도 그쪽이 충분히 이득인 거 같은데요. 날파리 하나 동네에서 치워주는 걸로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뭐, 6개월 뒤에 서로 신의가 쌓이면, 다시 계약 기간이 늘어날 수도 있겠죠.”

경일은 그녀의 제안에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아~ 그럼 1년은 어떠신지?”

우해수는 조금이라도 계약 기간을 늘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경일의 의사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해성 그룹의 직계인 우해수는 이처럼 단호히 거절당한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해수는 세보 길드를 치워 주는 일을 놓고 다시 협상해 보려다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계약만으로도 대박이었다.

이 이상 욕심내다가 계약이 깨지기라도 하면,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말대로 세보 길드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동네에서 쫓아내는 걸로는 계약 기간을 늘릴 명분이 약하긴 했다.

그녀는 경일이 확고히 선을 긋는 모습에 살짝 기분이 나빠졌으나,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경일이 원하는 대로 계약서를 고쳤다.

“사인하시면 됩니다.”

우해수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고 고친 계약서를 펜과 같이 내밀었다.

계약서를 본 경일은 곧바로 사인했다.

“앞으로 필요한 걸 말하려면 누구한테 연락하면 됩니까?”

“제 비서인데, 여기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건 제 명함입니다.”

우해수는 비서의 명함과 함께 자신의 명함을 경일에게 내밀었다.

이 사람은 자신이 관리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최대한 계약 사실을 숨긴다고 해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소문이 날 게 뻔했다.

다른 그룹이나, 길드에서 달려들 것이 뻔한데, 자신이 직접 관리를 하는 게 맞았다.

“제 비서에게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사장님이 필요한 건 모두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우해수의 성의 있는 모습에 경일은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의 옆에 두었던 미스릴이 담긴 봉지를 가볍게 들어 우해수 쪽으로 건넸다.

그 모습에 그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100㎏은 일반인이 쉽게 들 정도의 무게가 아니었다.

“확인해 보시죠. 그리고 커미네스는 부피가 커서 트럭 화물칸에 실려 있습니다.”

“저기… 혹시 헌터이십니까?”

“네.”

경일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앞으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이제 자신을 숨기고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력에 어느 정도 확신도 있었고, 원하는 곳에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이상, 최소한 자신의 목숨은 지킬 자신이 있었다.

우해수와 거래를 끝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던전으로 돌아갔다.

귀찮게만 생각했던 날파리가 경일에게 가장 필요한 걸 물어 왔다.

대형 길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 이제 세보 길드 같은 날파리가 꼬일 일은 없을 것이다.

경일은 한 번에 자신의 신분을 산꼭대기로 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웬만한 길드들은 자신에게 명함도 내밀기 힘들게 됐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냐?”

즐거워 보이는 경일을 보고 네로가 물었다.

“네. 걱정거리가 한 방에 해결됐습니다. 이제 스탄다비아도 앞으로 뻗어갈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광산에 광부들이 늘어날 겁니다.”

경일은 세보 길드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언제가 됐든 반드시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 * *

경일이 분식점을 마치고 곧바로 향한 곳은 스탄다비아였다.

이 기쁜 소식을 자포리자에게 얼른 알려 주고 싶었다.

게이트를 통과하니 여느 때처럼 자포리자가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님, 모든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영주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선조의 땅으로 이주하시면 됩니다.”

경일은 이 기쁜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리고 싶어 자포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포리자가 의아해하는 모습에 경일은 두서없이 너무 급하게 얘기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제가 너무 정신없이 말했죠. 이번에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랑 계약을 해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기로 했습니다. 선조의 땅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필요한 모든 물자의 공급이 가능할 거 같습니다.”

경일의 말을 들은 자포리자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평생 바래 왔던 숙원인 선조들의 땅으로 돌아갈 길이 열린 것이다.

“선인이시여, 이 미천한 저와 스탄다비아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경일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경일의 등 뒤로 화려한 아우라가 뻗어져 나왔다.

이건 결코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는 스탄다비아를 비추는 태양과 같았다.

경일이 없었더라면, 스탄다비아는 벌써 무너지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스탄다비아의 사람들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고, 닥쳐온 고난과 시련을 모두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이 순간 가장 기분이 좋은 건, 턱 밑에 검을 겨누고 있는 프라인과 아드리온과 맞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도 기사인 만큼 복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쁘고 통쾌했다.

자포리자에게 진정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이었다.

시간만 주면 프라인과 아드리온을 꺾을 자신이 있었다.

마나 연공법으로 마나를 깨우친 자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자포리자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자포리자는 마나 연공법 하권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더욱 빠르게 성장시켰다.

그리고 역시 성장에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건 마나 포션이었다.

최근 경일에게 무한정에 가까운 마나 포션을 공급받고 있었다.

기존의 마나 포션의 효과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했는데, 지금 공급받는 마나 포션의 효과는 상상을 불허했다.

네로가 알려 준 키아노티의 재배의 성공과 손윤찬의 힘이 합쳐진 마나 포션은 기존의 마나 포션보다 몇 배의 마나를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영주님께 해 드릴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금 전과 다르게 경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네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포리자에게 하려 했다.

자포리자는 네로의 이야기를 알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동안은 그가 처한 상황이 너무 좋지 않은 터라 이야기를 미루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지금이 말하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경일의 표정이 사무 진지해지자, 자포리자도 자세를 바로 하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경일이 네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시작하자,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거 같은 자포리자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해 갔다.

자포리자를 잘 아는 누군가가 봤으면, 그가 이런 표정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을 것이다.

“그럴 수가! 이곳의 몬스터가 이곳뿐만 아니라 선인이 살고 계시는 세계까지 위협하는 것입니까?”

“네. 영주님과 제가 연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세계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몬스터 공장으로 만들려는 세력을 몰아내고, 지구와 연결된 게이트가 있는 던전을 폐쇄하는 겁니다.”

자포리자는 경일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

이 세계의 숨겨진 진실을 듣자 처음에는 무척 놀랐지만,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경일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지금까지 겪어 왔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았다.

어깨가 한층 더 무거워졌지만, 그렇다고 외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뼛속 깊이 기사이자, 투사였다.

몬스터가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의 목숨을 뺏은 건, 전쟁이 아니라 몬스터였다.

몬스터는 인간에게 거대 악이었고, 맞설 수 없는 자연재해와 같은 존재였다.

특히 태어난 순간부터 몬스터와 목숨을 걸고 싸워 왔던 자포리자는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몬스터로 인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겪어 왔는가.

몬스터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였지만, 경일의 말을 듣고 나서 분명 느낌이 달라졌다.

절대 닿을 수 없던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자신의 노력에 따라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변화였다.

늘 당하고도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되뇌기만 했는데, 최소한 싸울 기회를 얻은 것만 해도 그게 어딘가.

경일이 아니었으면 영문도 모른 채 당하기만 하다 끝날 뻔했다.

기사로서 이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런 기회를 준 경일에게 더없이 깊은 감사를 느꼈다.

만약 그가 스탄다비아를 외면했다면, 자신들은 싸울 기회조차 잡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변방의 작은 영주인 자신이 짊어지기엔 너무나 무거운 책임일 수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눈앞에 서 있는 경일을 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 두려움은 사라지고 투지가 끓어올랐다.

지금까지의 모든 어려움은 선인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 그는 굳건히 믿었다.

자신은 그저 선인이 이끄는 대로 최선을 다하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영주님, 적은 우리에 비해 너무도 강대해서 지금은 엄두도 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잘해 오셨으니, 앞으로 이대로만 간다면 우리에게 분명 승산이 있을 겁니다.”

경일은 네로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 당시 네로의 이야기를 듣고 암담함이 밀려들었는데, 막상 자신이 자포리자에게 이야기하니 그 당시 네로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마 네로님이 나에게 희망을 줄 때 이런 기분이었겠지.’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자포리자에게 힘든 역경을 준 것 같은 미안함이 공존했다.

그러면서도 자포리자라는 든든한 아군이 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니, 일단은 지금 처한 일부터 해결해 나가는 게 순서일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자포리자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지금의 이야기가 분명 대단한 충격이었을 텐데, 자포리자가 의연하게 받아들이자 경일도 힘이 났다.

둘은 굳게 서로를 믿고 있는 만큼,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다음 날, 자포리자는 기사와 병사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연병장에 모인 그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모두 좋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프라인이나 아드리온처럼 많은 병력은 아니었지만, 기세로는 왕국의 어떤 병력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이들은 같은 숫자의 적과 싸운다면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자포리자가 단상 위에 올라가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선인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우리는 과거의 융성했던 스탄다비아로 돌아갈 것이다. 선인께서 그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약속하셨다. 우리가 첫 번째로 할 일은 선조의 땅을 되찾는 것이다. 지금부터 선조의 땅에 서식하는 모든 몬스터들을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는 선인께서도 직접 참여를 약속하셨다.”

“와아아아아아!”

경일이 참여한다는 말에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은 샤벨 타이거와 같이 싸운 기사들에게 경일이 얼마나 강한지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이들에게 경일의 참전은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도 같았다.

이 시대의 전투에서는 강자가 갖는 의미가 매우 컸다.

강자의 참여는 승리로 가는 길의 커다란 퍼즐 조각 하나가 맞춰진 것과도 같았다.

그만큼 새로운 강자의 등장은 병사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병사들에겐 또 한 명의 자포리자가 나타난 것과 같았다.

병사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경일에게 이토록 큰 호감을 느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미 이들의 삶에 경일의 손길이 깊숙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경일의 혜택을 입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 갑옷까지 모든 것이 경일의 은혜였고, 이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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