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94화 (194/300)

[194화] 소드마스터

자포리자는 환호하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은 스탄다비아가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돌아설 것을 천명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오늘부터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지켜 주었던 성벽이라는 든든함이 사라졌지만, 병사들은 겁먹지 않았다.

성벽보다 더 든든한 자포리자를, 그리고 경일을 믿었다.

몬스터의 제거는 이주의 첫 단추였다.

스탄다비아의 모든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는 만큼, 가는 길에 서식하는 몬스터는 최대한 제거해야 했다.

스탄다비아의 모든 병력이 일제히 움직였다.

자포리자의 옆엔 경일이 서 있었다.

병사들은 말로만 듣던 선인의 존재를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검은 갑옷과 투구를 쓴 경일은 보기만 해도 대단해 보였다.

스탄다비아의 대장장이가 만든 자신들과 같은 디자인의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에 커다란 동질감을 느꼈다.

경일은 익숙하게 말을 몰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고블린과의 침공을 막아 주었던 성벽을 지나, 몬스터의 숲으로 들어갔다.

스탄다비아가 실시하는 최초의 침공이었다.

수세에서 벗어난 공세로 전환하는 첫 발걸음이었다.

이제는 참지 않을 것이다.

적을 향해 마음껏 화내고, 그들을 징치할 것이다.

몬스터 숲을 가로지르는 이들의 앞길을 가장 먼저 막은 건, 고블린 대부족이었다.

넓은 들판을 새까맣게 채운 고블린으로 인해 바닥이 안 보일 정도였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자포리자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에 따라 병사들이 훈련받은 대로 공격 진형을 갖추었다.

자포리자와 경일이 가장 앞에 서고, 그 뒤를 기사들이, 그리고 병사들이 위치했다.

“캬아아아악!”

고블린 대군에 가장 뒤쪽에 있는 다른 고블린들보다 머리 두 개는 커 보이는 고블린이 자포리자에 맞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고블린 대장이었다.

녀석의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전장을 뒤덮었다.

그와 함께 고블린들이 뛰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둣!

작은 덩치의 고블린이지만, 원체 많은 숫자라 지축이 울릴 정도였다.

“대단하네.”

경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건 또 다른 장관이었다.

고블린들이 뿜어 대는 순수한 살기에 온몸이 쩌릿쩌릿하게 아플 정도였다.

지구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아무리 큰 던전이라도 저 정도 수의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경일이 고블린들의 진격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자포리자의 병사들은 그를 바라봤다.

경일은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병사들의 시선에 담긴 것은 기대감이었다.

자신을 향해 무한한 응원을 보내는 병사들을 봐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경일이 꺼내든 건, 한 자루 창이었다.

찌르기에 특화된 창이 아니라 삼국지의 관우가 썼던 청룡언월도와 같이 커다란 창날이 달린 창이었다.

창 자루와 창날까지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져 찬란한 은색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와 함께 자포리자도 칼집에서 롱소드를 꺼냈다.

이 역시 경일이 준 오리하르콘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선두에서 두 개의 무기가 뿜어내는 은색의 아름다움에 병사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이야얍!”

싸움의 시작을 알린 건, 경일의 기합이었다.

그와 동시에 경일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의 고블린 무리에 뛰어들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는 그의 영웅적인 면모에 병사들은 압도되었다.

3미터에 이르는 순수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통짜 창이 고블린에 향해 휘둘러졌다.

창의 사정거리 안에 있던 고블린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새빨간 피와 함께 고블린의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경일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경일은 후퇴를 모르는 것처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창이 경일의 손안에서 새털처럼 춤을 췄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모든 것이 베어졌다.

경일이 창을 움직여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가 점령한 공간에서는 그 어떤 몬스터라도 목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경일과 정면으로 마주한 고블린은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쳐 보려 하지만, 뒤는 또 다른 고블린에게 막혀 있었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려는 동료들에게 밀려 경일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순간, 세상이 돌았다.

하늘이 멀어지고 땅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보이는 목이 잘린 자신의 몸뚱이.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새하얀 눈밭에 새로운 길을 내듯 고블린으로 뒤덮인 이곳에 피의 길을 냈다.

경일의 투기에 반응하듯 몸속의 마나가 무서운 속도로 혈관을 타고 돌며 그에게 무한한 힘을 공급했다.

실체가 없던 마나가 손안에 잡히듯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몸속을 질주하던 마나가 창을 따라 흘렀고, 넘치는 마나는 결국 창끝을 뚫고 나와 마나만으로 이루어진 형태를 만들어 냈다.

경일이 샤벨 타이거와의 싸움에서 처음 느껴 봤던 경지였다.

실마리를 잡은 뒤 끊임없는 노력으로 결국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고야 만 것이다.

지구인 최초의 소드마스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아!”

오리하르콘을 뚫고 나온 마나에 병사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소드마스터다!”

기사장 칼튼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

병사들이 한목소리로 경일을 연호했다.

자신들의 전쟁에 말로만 듣던 소드마스터가 참가했다는 사실은 병사들에게 희열을 맛보여 주기에 충분했다.

왕국 전체로 봐도 소드마스터란 존재는 귀했다.

이런 귀한 존재가 변방의 작은 영지인 스탄다비아를 위해 싸워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에 자부심이 가득 차올랐다.

경일의 바로 옆에는 자포리자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지지 않고 거침없이 롱소드를 휘둘렀다.

사악!

롱소드에 닿은 고블린의 몸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반듯하게 썰려 나갔다.

이들이 각자의 무기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여지없이 여러 마리의 고블린이 쓰러졌다.

그들의 지나간 길엔 고블린의 잘린 사체만이 존재했다.

이건 학살이었다.

수백 마리의 고블린이 힘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죽어 나가자, 남은 수천 마리의 고블린이 단 두 명에게 겁을 먹었다.

세상 무서운지 모르고 덤벼들던 고블린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

오로지 인간에 대한 살의와 강렬한 공격성을 가진 몬스터가 경일과 자포리자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이런 건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모두 공격하라!”

그 순간, 자포리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와아아아아아!”

병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앞세우고 새의 날개처럼 좌우로 넓게 벌린 진형을 유지한 채 고블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의 대부분은 미스릴이었다.

마나 연공법으로 꾸준히 쌓은 병사들의 마나를 받아들인 미스릴이 그 진가를 발휘했다.

“케에에에에엑!”

“케엑!”

“캬하약악!”

“캬아아아악!”

전장에서는 온통 고블린의 처절한 비명만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의 무기가 고블린의 몸을 철저히 짓밟았다.

대규모의 전투에서는 특유의 광기가 존재했다.

인간이든, 몬스터든 그 광기로부터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다.

뇌에서는 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분비되었다.

승리와 기세에 취해 맹목적으로 된 병사들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고블린에게 뛰어들었고, 고블린 역시 동료의 피를 밟고 끝없이 달려들었다.

상쾌했던 숲의 공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녹색의 향기롭던 공기는 붉은색의 살기에 밀려 사라지고 없었다.

깨끗했던 풀들은 고블린의 피와 내장으로 색칠 되어 있었고, 이들이 내뿜는 악의에 겁을 먹은 숲속의 동물들은 빠르게 달아났다.

“흥분하지 마라.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기사장 칼튼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과열된 전장의 흐름을 정리했다.

대열을 벗어나 고블린과 싸우던 일부 병사들이 그의 외침에 재빨리 대열로 복귀했다.

서걱!

경일의 창이 그림처럼 움직이며 고블린을 베었다.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창은 잠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일부 고블린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경일의 공간으로 뛰어들어 보지만, 어느새 다가온 창이 녀석의 몸을 베고 지나갔다.

처음 겪는 대규모 전투였지만, 던전 체인지가 일어난 던전을 경험했고, 샤벨 타이거의 치열했던 싸움, 그리고 자포리자와의 격렬한 훈련으로 단련된 터라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찐한 피비린내에도, 전장의 광기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고블린을 상대해 나갔다.

문득, 처음 스탄다비아와 연결된 때가 생각났다.

성벽 위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영지민들의 모습이 너무나 애절해 많은 눈물을 흘렸다.

군데군데 날이 나간 고블린의 뭉뚝한 칼에 작은 소년의 살이 뜯겨지듯 베어지는 모습에 덧없이 깊은 절망까지 느끼지 않았는가.

경일은 그때부터 누구보다 먼저 스탄다비아를 위해 싸우고 싶어 했을지도 몰랐다.

“아아아악!”

고블린의 비명 속에 인간의 비명이 간간히 섞여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기사들의 엄중한 목소리 역시 같이 들렸다.

“부상자는 뒤로 물러나라. 우리는 절대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동료가 움직이지 못하면, 협력해서 부상자를 뒤로 옮겨라. 무엇보다 부상자의 처치가 먼저임을 잊지 마라!”

기사들은 누구보다 솔선수범하며 병사들을 챙겼다.

평소 자포리자의 어진 성품이 기사들에게 영향을 끼친 듯 그들은 병사를 제 몸처럼 아꼈다.

“흥분하지 마라. 이성을 잃지 마라. 우리는 광기에 물든 몬스터가 아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스탄다비아의 병사들이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며 싸워라. 과도한 흥분은 오히려 자신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전투 중에도 기사들이 끊임없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자칫 전장의 광기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전장의 흐름을 정리했다.

잘 짜여진 여러 개의 톱날 바퀴가 서로 어울려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기사의 외침은 경일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곳에서 자신이 가장 강하긴 했지만, 몬스터와의 싸움 경험이 가장 적은 것도 자신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전장의 광기에 잡아먹히는 것을 막아 주었으며 이성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기사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그대로 실천하려 노력했다.

어느새 경일은 이들과 깊이 동화되어 갔다.

고블린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스탄다비아의 군대를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이들에겐 고블린은 비누의 재료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쥐가 아무리 덤벼 봤자 고양이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수천 마리의 고블린이 죽어 풀밭을 덮었다.

“캬아아아아악!”

수천의 동족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에 고블린 대장이 분노의 포효를 질렀다.

녀석은 핏발 선 눈으로 경일을 노려봤다.

자신의 동족을 가장 많이 벤 것도 그였고, 전장의 흐름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

자신이 죽더라도 경일만은 같이 데리고 가고 싶었다.

고블린 대장은 경일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엄청난 살의가 경일을 덮쳐 왔지만, 경일은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에게는 하찮은 한 마리 몬스터일 뿐이었다.

“캬아악!”

고블린 대장이 날아오르듯이 경일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와 함께 경일의 창이 수평으로 움직였다.

서걱!

단 한 수였다.

고블린 대장의 목이 떨어진 건.

애초에 상대도 되지 않는 존재였다.

고블린 대장이 부릅뜬 두 눈에는 허망함만이 남아 있었다.

싸움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이 났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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