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선조의 땅으로 (1)
“와아아아아아아!”
승리의 함성이 조용했던 숲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것은 몬스터의 숲에 새로운 강자의 탄생을 알리는 외침이기도 했다.
이 소리에 겁이 난다면 덤비지 말고 도망가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실제 이 소리는 숲에 남아 있는 고블린에게 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일부 고블린들은 새로운 강자의 출현에 미련 없이 이주를 선택했다.
“우리는 강하다!”
“우리는 강하다!”
자포리자의 선창에 모든 병사들이 합창했다.
이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에 경일의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고블린과의 전투가 끝이 나고 곧바로 뒷정리가 이어졌다.
“고블린의 지방과 가죽을 분리한 후, 나머지는 모두 태워라.”
고블린의 가죽을 모우는 건 경일의 지시였다.
이주에는 많은 마차가 필요했다.
기존의 나무 바퀴는 작은 충격에도 부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생각한 게 고블린의 가죽이었다.
나무 바퀴에 가하는 직접적인 충격을 줄이기 위해 고블린의 가죽을 바퀴에 감쌀 생각이었다.
“기사들은 맡은 사상자를 파악해 보고하라. 힐링 포션을 아끼지 말고 상처를 치료하도록.”
자포리자의 지시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손윤찬의 힐링 포션이 힘을 발휘했다.
이미 지구에서도 충분히 통하고 남을 만한 효능의 포션이 병사들의 상처를 빠르게 치료해 나갔다.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건 그들이 알던 힐링 포션이 아니었다.
상처를 치료받은 병사도, 그것을 지켜보던 병사도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고 알려진 힐링 포션보다 몇 배나 효과가 좋은 힐링 포션을 아끼지 않고 치료해 주는 모습에 병사들은 감격했다.
부상자를 제외한 병사들은 모두 고블린의 뒤처리에 들어갔다.
이미 많이 해 본 작업이라 고블린을 해체는 능숙하게 이루어졌다.
숲은 순식간에 고블린이 타면서 내뿜는 매캐한 냄새로 뒤덮였다.
검은색 연기는 하늘을 치솟아 멀리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이건 몬스터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가르쳐 주는 것과도 같았다.
위험할 수도 있는 이런 행동을 서슴치 않게 하다는 것은 자신감의 발현이었고, 어떤 몬스터가 쳐들어와도 이길 수 있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전투보다 오히려 전장의 뒷정리가 훨씬 힘들었다.
한 시간 남짓한 전투에 뒷정리는 반나절이 꼬박 걸렸다.
수천 마리에 육박하는 고블린을 해체한 후 자포리자는 휴식을 명령했다.
이번 전투에서 중상자는 스물다섯 명, 죽은 자는 세 명이었다.
힐링 포션으로 중상자는 치료가 가능하지만, 이미 죽은 이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들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전쟁을 시작한 이상 각오해야 하는 부분 중의 하나였다.
경일의 인벤토리에 고블린의 가죽과 지방이 담기고 자포리자의 인벤토리로 옮겨 갔다.
자포리자의 인벤토리는 경일이 보내 주는 물건을 받는 용도로밖에 쓰지 못하는 반쪽짜리였지만, 경일이 옆에 있으니 상관이 없었다.
고블린과의 전투가 벌어진 곳과 조금 떨어진 넓은 벌판에 휴식을 위한 진지를 구축했다.
시야가 넓게 트여져 있어 몬스터의 습격에도 대비하기 좋은 곳이었다.
곳곳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경일은 이들은 위해 준비해 온 고기를 꺼냈다.
해성 길드라는 든든한 거래처를 잡은 만큼, 앞으로 물자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이들의 앞에 엄청난 양의 돼지고기가 펼쳐지자, 모두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와우!”
“우하하하하!”
병사 중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나오자, 병사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이들은 경일이 보내 준 고기를 맛본 적이 있었다.
경일이 보내 준 식량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었지만, 그중에서 압권은 당연히 고기였다.
이들에게 고기는 일 년에 한두 번도 먹기 힘든 정도로 귀했다.
그런 고기를 경일이 보내 주었고, 처음 먹은 날 이들은 말 그대로 열광했다.
자신들이 아는 고기의 맛이 아니었다.
먹으면서도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자신들과 아는 고기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질기도 않았고 야생 특유의 잡내가 전혀 없었다.
부드럽고 고소하고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이었다.
이건 당연했다.
인간의 입맛에 맞게 개량된 현대의 고기가 야생의 고기와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고기를 먹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했다.
그런데 경일이 보내 준 고기를 먹어 본 순간, 새로운 미식의 세계를 맛보았다.
처음 맛보았을 때의 그 강렬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경일이 의도치 않게 이들의 입맛을 버려 났을지도.
하여간 경일이 꺼내 놓은 고기를 본 이들은 미치도록 환호했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이 시대의 미식은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이어질 시간만으로 오늘의 전투가 더없이 보람차게 다가왔다.
“선인님, 많이 드십시오.”
“네, 영주님도 많이 드세요.”
자포리자와 경일이 식사를 시작하자, 기사와 병사들도 먹기 시작했다.
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술도 한잔 대접하고 싶었지만, 내일도 전투가 이어질 거라 마지막 날로 미루었다.
“옛 영지까지 가는데 며칠이나 걸릴 거라 예상하십니까?”
“거리상으로는 이틀도 걸리지 않을 테지만, 앞으로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있을지 몰라 예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어떤 몬스터를 만날지도 모르는 상황인 거네요.”
“그렇습니다. 샤벨 타이거가 영역을 구축한 걸로 봐서는 그보다 약한 몬스터가 자리 잡고 있을 거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뭐, 어떤 몬스터가 나오든 저희의 앞을 가로막진 못할 겁니다.”
경일은 일부러 강한 모습을 보였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 전투 경험이 가장 없고, 가슴이 떨리기도 했지만, 자신을 등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일평생 뜰 허풍을 한꺼번에 떨고 있었다.
경일은 그 말을 끝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몬스터의 숲이라고 불리는 곳이지만,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곳은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곳이었다.
짙은 숲 내음이 바람을 타고 와 경일의 코를 간지럽혔다.
하늘을 닿을 듯 뻗은 키 큰 나무들과 여기저기로 뻗은 가지에 달린 싱그러운 나뭇잎들.
숲이 주는 평온함에 조금 전 있었던 전투가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자포리자와 하는 대화는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자포리자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아는 것은 작은 일부분뿐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훨씬 더 진중한 남자였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똑똑했고, 무엇보다 신념이 확실했다.
마치 위인전의 인물을 현실에서 만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런 인물이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는 건, 황송하면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몬스터 숲의 첫날이 끝나고 다들 잠자리에 들었다.
이들의 아침은 빨랐다.
자신도 나름 부지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에 비하면 게으름뱅이나 다름없었다.
빠르게 식사를 한 후 앞으로 전진했다.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는, 길도 없는 숲은 확실히 힘들었다.
험한 산세는 인간의 손길을 거부했다.
산세를 벗어나면 넓은 평야와 함께 강이 나온다고 하니, 스탄다비아의 옛 영지는 천혜의 요새와도 같았다.
그런 경일의 발걸음을 막은 건, 거대한 트롤이었다.
3미터가 넘어가는 키에 거대한 덩치의 트롤들이 이들의 전진을 막아섰다.
“쿠워워워워어!”
트롤 중 유독 덩치가 더 큰 트롤이 큰 소리를 질렀다.
그와 맞춰 나머지 트롤이 같이 소리를 질렀다.
트롤들의 엄청난 함성이 조용했던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일부 병사들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기죽지 마라! 우리에게 선인이 계시다! 쓰러진 병사를 돌보고 기사들은 모두 앞으로 나서라!”
자포리자의 명령에 그의 기사단이 앞으로 나왔다.
모두 샤벨 타이거와 함께 싸웠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기사단이 열 마리의 트롤들과 맞섰다.
“장창 병들은 기사들의 뒤에서 트롤을 공격하고, 병사들은 모두 뭉쳐서 또 다른 몬스터들의 공격에 대비하라.”
병사들이 트롤과 싸우기에는 무리였다.
승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희생은 곤란했다.
그 점을 상기시킨 자포리자가 병사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때, 경일은 처음 들어간 던전에서 트롤을 만났던 상황을 떠올랐다.
던전 체인지로 인해 등장한 트롤과 목숨을 걸고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으니, 분명 트롤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있었지만, 절대로 방심하지는 않았다.
‘샤벨 타이거도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어. 이상하게 같은 종류의 몬스터인데, 이곳의 몬스터가 더 강한 거 같단 말이야. 이번에 트롤과 싸워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경일과 자포리자가 눈빛을 주고받으며 각각 두 마리의 트롤을 맡기로 하고, 여섯 마리의 트롤은 기사단이 맡기로 했다.
트롤의 피어를 겨우 버틴 병사들이 장창을 들고 싸움에 합류했다.
기사들이 앞장서서 싸우는 사이 틈이 있을 때마다 찌를 계획이었다.
경일이 가장 먼저 트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를 자포리자와 기사들이 따랐다.
부웅!
트롤의 휘두른 커다란 몽둥이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경일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에 경일은 오른발로 바닥을 강하게 차며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몽둥이는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몽둥이가 일으킨 바람에 몸이 살짝 밀려 균형이 틀어질 뻔했다.
‘확실해! 지구의 던전에서 만나 트롤보다 훨씬 강해. 기본적으로 1.5배는 강한 거 같은…….’
경일은 하던 생각을 접음과 동시에 다급히 슬라이딩하듯 낮게 몸을 던졌다.
부우웅!
그의 등 뒤로 또 다른 트롤이 휘두른 몽둥이가 지나간 것이다.
‘일단 지금은 트롤에만 집중하자. 그나저나…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라고! 난 지금도 더 강해지고 있거든!’
경일은 지금도 신체 능력이 올라가고 있었다.
현재 경일과 자포리자가 행하는 일은 스탄다비아를 발전시키는 일과 다름없었다.
그동안 스탄다비아가 어려움에 처해 있어 신체 능력이 올라가는 속도가 정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경일이 몬스터의 숲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신체 능력이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처음 몽둥이를 휘두른 트롤의 지척에 접근한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푸른빛을 가득 머금은 창을 꽂아 넣었다.
창끝에 형성된 검기가 두껍고 질긴 트롤의 가죽을 가볍게 파고들었다.
“케에에엑!”
창에 찔린 트롤의 고통스러운 비명에 반응하듯 또 다른 트롤이 빠르게 경일을 향에 몽둥이를 내리찍었다.
이미 녀석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경일은 즉시 창에 손을 떼고 몸을 날려 피했다.
일어서는 그의 손엔 어느새 새로운 창이 쥐어져 있었다.
그의 빠른 몸놀림에 약이 올랐는지 트롤의 눈초리가 험상궂어졌다.
그런 트롤을 보고도 경일은 무심히 어깨를 뒤로 젖히더니, 이내 빠르게 휘두르듯 창을 던졌다.
마나 공급이 끊어진 창의 색깔이 살짝 연해졌지만, 원체 가까운 거리라 마나가 흩어지기 전에 트롤의 가죽을 가볍게 뚫고 박혔다.
“크아아아앙!”
창에 찔린 트롤이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이번 공격이 트롤의 급소를 정확히 파고들어 장기를 찌른 탓이었다.
경일은 신이 났다.
지금까지 어렵게 여겨졌던 동작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자신의 생각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몸이 움직이고, 그에 따라 공격이 성공하자 희열이 느껴진 것이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