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선조의 땅으로 (2)
“아아아악!”
그런 경일의 귀에 비명이 들려왔다.
이건 트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인간이 지르는 비명이었다.
‘이런! 기사들이 고전하고 있구나. 빠르게 해치워야겠어!’
기사들은 세 명 내지 네 명이 짝을 이루어 한 마리의 트롤을 상대했다.
그들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지만, 트롤은 의욕만 가지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트롤이 휘두르는 거대한 몽둥이를 방패로 막는 순간, 거의 날아가듯이 몸이 뒤로 밀렸다.
온몸이 진탕되는 충격에 눈앞의 사물이 빙빙 돌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트롤의 공격을 막았다.
그 사이로 병사들의 장창이 트롤에게로 나아갔다.
하지만 병사들의 힘으로는 트롤의 단단하고 질긴 가죽에 깊은 상처를 내기 힘들었다.
오히려 트롤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눈을 노려라!”
기사 중 한 명이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공격이 효과가 없자, 트롤의 약한 부분을 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창으로 움직이는 트롤의 눈을 맞추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들의 창이 허무하게 허공만 찔렀다.
“우어어어어!”
트롤은 자신을 귀찮게 하는 인간들을 향해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큰 덩치에 워낙 힘이 강해 마구잡이로 휘두른 몽둥이도 기사들에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기사들은 최선을 다해 트롤에 대항에 보지만, 트롤의 거친 기세에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밀려난 사이, 트롤이 노린 것은 병사들이었다.
자신을 찌른 병사들을 향해 거대한 몽둥이를 휘둘렀다.
쿵! 쿵! 콰앙!
“으아아아아악!”
병사들이 방벽을 세워 몽둥이에 대항해 보지만, 트롤의 강한 힘에 방패째로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몇몇은 등을 나무에 부딪치고, 땅바닥으로 추락했고, 몇몇은 그대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고통이 큰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신음만을 내뱉었다.
일부 병사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지 그대로 즉사한 듯했다.
그 모습을 본 자포리자가 소리쳤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라!”
핏발 선 자포리자의 눈동자는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트롤에 대한 증오, 쓰러진 병사들에 대해 안타까움과 슬픔.
자포리자의 애끓은 외침에 경일은 고통스러웠지만, 오히려 머리를 비우고 눈앞의 트롤들에게만 집중했다.
어찌 됐건 이 녀석들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도움을 줄 수 없었으니까.
“하아아앗!”
기합을 내지른 경일이 창에 장기를 찔린 눈앞의 트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를 악문 경일은 빨랐다.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에 당황한 트롤이 어색한 자세로 몽둥이를 휘둘러 보지만, 경일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땅을 박차고, 트롤의 무릎을 디딤대 삼아 다시 한번 뛰어오르자 녀석의 두 눈과 마주쳤다.
갑자기 등장한 경일과 눈이 마주친 녀석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랐는지 커다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경일은 창이 부러질 듯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내뻗었다.
쐐애애애액!
창이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를 내며 걸리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겠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푸우욱!
툭툭!
“으어…….”
트롤의 눈으로 파고든 창이 녀석의 뇌를 관통해 뒷머리의 단단한 뼈까지 뚫었다.
녀석은 전기가 끊긴 전구처럼 생명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절명한 것이다.
쿵! 탁.
놈의 거대한 몸이 땅과 맞닿으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경일은 가볍게 착지하며 다음 목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일족이 쓰러지자, 남은 트롤이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트롤은 조금 전과 달리 쉽게 경일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트롤의 피를 뒤집어쓴 경일의 모습에 녀석은 겁을 먹었다.
“우, 우어어어어어!”
공포에 질린 트롤이 이리저리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이성을 잃고 휘두르는 몽둥이는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경일은 간결한 움직임으로 몽둥이를 피하며 트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나를 한가득 머금은 창이 지체 없이 놈의 심장을 노렸다.
질긴 가죽의 저항이 느껴졌으나, 그 정도로는 경일의 창을 막아 낼 수 없었다.
푸욱!
자신의 몸을 뚫고 들어온 차가운 창의 느낌에 트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가죽을 뚫은 창은 연한 속살을 거쳐 심장에 닿았다.
힘차게 뛰는 심장을 창은 거침없이 돌진해 헤집어 놓았다.
트롤은 자신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참사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불에 짓이겨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뇌로 밀려들었고, 그 고통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지속됐다.
압도적인 강함이었다.
“…….”
“…우, 우와아아아!”
몬스터 숲의 최상의 포식자 중 하나인 트롤이 겁을 집어먹고 벌레처럼 하찮게 죽어 버렸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순간 말을 잃었지만, 이내 그 존재가 같은 편인 걸 깨닫곤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와 반대로 일족의 허무한 죽음을 본 트롤이 겁에 질렸는지 얼굴에 공포가 일었다.
그와 함께 인간에게 겁을 먹었다는 수치심이 떠올랐다.
“크으으… 쿠아앙!”
신음을 흘리던 트롤이 뒤늦게 고함을 질러 보지만, 어색해 보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했던 트롤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깨어지며 병사들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선인이시여! 금방 뒤따르겠습니다! 병사들을 도와주십시오.”
자포리자는 트롤을 한 마리를 쓰러뜨리고, 두 번째 트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아슬아슬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병사들을 신경 쓰고 있었다.
이에 경일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가장 힘들게 트롤을 상대하고 있는 기사와 병사들의 조를 향해 달렸다.
“으아아아아! 선인께서 오셨다! 모두 반격하라!”
“으아아!”
“빌어먹을 트롤 놈들아! 죽어어어어!”
경일의 등장에 힘을 얻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소리를 지르면 적극적으로 트롤들에게 달려들었다.
수십 개의 창이 한꺼번에 찔러 오자, 당황한 트롤들이 몽둥이를 휘둘러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다.
하지만 이미 기세를 탄 인간들을 막을 순 없었다.
병사들의 힘으로는 트롤의 가죽을 뚫을 수는 없었으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 병사들은 집중적으로 눈을 노렸고, 몇 개의 창이 눈을 찌르는 데 성공을 한 것이다.
트롤은 갑자기 찾아온 고통과 암전에 당황하면서 극도로 화를 냈다.
붕! 붕! 붕!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자 말 그대로 발작했다.
거대한 몽둥이가 미친 듯이 춤을 추며 공간을 장악했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롤의 공격에 겁을 먹은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경일이 그들의 앞에 서서 트롤의 모든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텅! 텅! 텅!
몽둥이와 방패가 부딪치는 묵직한 소리가 났다.
경일은 방패로 전해지는 적잖은 충격에도 한 발짝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병사들은 트롤의 모든 공격을 막아 주는 경일이 있으니 겁이 날 리가 없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조금 전 트롤의 공격으로 다치고 목숨을 잃은 동료의 복수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한 번에 수십 개의 창이 트롤의 몸을 찔렀고, 공격을 받은 트롤은 급속도로 힘이 빠졌다.
살기등등했던 눈엔 어느새 두려움만이 감돌았다.
더 이상의 위험은 없을 거라 판단한 경일은 자신이 막고 있는 트롤의 마무리를 기사와 병사들에게 맡기고, 열세인 곳 위주로 지원을 하러 다녔다.
경일이 합류하자 승리의 추는 급속도로 스탄다비아로 기울어졌다.
거기다가 두 마리의 트롤을 죽인 자포리자까지 합류했으니, 이미 승부의 행방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쿵, 쿠웅!
여기저기서 육중한 트롤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둘씩 쓰러지고, 마침내 단 두 마리 트롤만이 남았다.
트롤들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트롤은 본능적인 흉포함을 내세우고 자신의 동료를 죽인 인간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으나,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녀석의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경일과 자포리자가 진정한 포식자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선인님, 제가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자포리자가 한 걸음 크게 발을 내디뎠다.
그의 자신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피를 끓게 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영주를 보았다.
경일 또한 힐링 포션을 나누어 주러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포리자를 지켜보았다.
그에게는 사람들을 기대하게 하는, 가슴을 들끓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모든 시선이 자포리자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으아아아아악!”
포효를 내지른 자포리자가 트롤의 목을 향해 롱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마나의 빛 꼬리가 반달이 되어 잔상을 남긴 순간.
툭, 데구르르르르.
몸과 분리된 트롤의 머리는 바닥에 떨어져 허무하게 나뒹굴었다.
“크아아아아앙!”
이제 혼자 남게 된 트롤은 자포리자를 노려보며 혼신의 힘을 담은 몽둥이를 휘둘렀다.
부우우웅!!
여태껏 들어 본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몽둥이에서 들려왔다.
이 무리를 이끈 우두머린 듯 녀석의 힘은 놀라웠다.
단번에 자포리자의 몸을 박살 내려는 듯 녀석의 무식해 보이기까지 한 근력과 합쳐진 가속 에너지로 몽둥이는 무서운 속도로 자포리자를 노렸다.
“피, 피해!”
놀란 병사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몸을 돌려 놈과 마주하고 있던 자포리자는 다른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앞으로 달려갔다.
“허억!”
“여, 영주님!”
당황한 기사들과 병사들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경일은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그가 아는 자포리자는 이 정도에 무릎 꿇을 남자가 아니었으니.
앞으로 달려 나가던 자포리자는 땅을 강하게 박차며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발밑으로 몽둥이가 정말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자포리자의 롱소드가 그의 머리 위로 치켜 올라갔다.
“죽어라!!”
온 힘과 단전에서 터져 나온 마나를 담은 자포리자의 롱소드가 트롤의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내려갔다.
푸욱!
찌이이이익!
자포리자가 바닥으로 내려오는 동안 롱소드는 트롤의 머리를 가르고 단단한 갑옷 같은 몸을 가르고, 놈의 사타구니까지 대번에 잘랐다.
푸슈슛!
반으로 갈라진 녀석의 몸에서 쏟아져 내린 피가 자포리자를 흠뻑 적셨다.
땅에 착지한 자포리자는 굽혔던 무릎을 피며 천천히 뒤돌았다.
그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우와아아아!”
그 모습을 본 병사들과 기사들이 신화 속 영웅을 본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경일 또한 자포리자의 미소에 화답하듯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씨익.
트롤의 무리를 맞아 몇 명의 병사를 잃는 것만으로 막아 낸 건 엄청난 성과였다.
몇 년 전만 해도 한 마리의 트롤이라도 난입하면 영지를 버리고 도망가야 했던 때와 비교하면 괄목할 만큼의 성장이었다.
이들의 전진하는 발걸음은 힘이 넘쳤다.
이제는 이곳의 왕이 자신들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증명해 보였다.
트롤 무리와 전투에서 승리한 그들의 발길을 막을 몬스터는 없었다.
멋모르고 덤벼드는 몬스터는 모두 병사들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선조의 땅으로 가는 길은 하나였다.
다른 길로 가자니 워낙 지세가 험해 많은 사람이 이동하기엔 불가능했다.
길을 따라 걷는 도중 거대한 협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불구불 실선을 그리는 거대한 협곡 아래 길이 나 있었다.
겹겹이 쌓인 퇴적층의 절벽은 이곳의 역사를 보여 주는 듯했다.
인간의 손때가 느껴지지 않는 이곳의 풍광은 환상, 그 자체였다.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군데군데 빽빽하게 자란 야생 풀, 성장을 멈춘 듯한 나무, 야생 동물의 배설물이 보였다.
그리고 협곡 끝에서 드디어 선조의 땅임을 알리는 방벽을 만났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여기저기가 무너지고 식물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위용만은 전혀 흐트러짐 없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