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97화 (197/300)

[197화] 이상한 사람?

“이건… 천혜의 요새구나. 자포리자가 왜 이곳으로 오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되네.”

방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져 왔다.

패색이 짙은 전쟁에서 만난 우군의 존재.

당장 달려가 안아 주고 싶었다.

경일도 이런 마음이었으니, 자포리자는 얼마나 기쁘겠는가.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그의 얼굴에 눈물이 맺힌 게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감동에 젖어 있는 자포리자에게 경일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이게 다 선인님의 은혜입니다.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스탄다비아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선인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포리자의 목소리에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때보다 강렬한 그의 눈빛을 보니, 앞으로 스탄다비아가 어떻게 발전할지 기대가 되었다.

가장 감격한 이는 카스만이었다.

카스만의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포리자에게 부탁해 이번 출정에 따라왔다.

그가 어릴 때, 그의 아버지가 살았던 땅을 누구보다 먼저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늘 그 땅을 그리워했고, 어린 카스만에게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그 땅에 묻히는 것이 아버지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을 이루어 줄 수가 없어 카스만의 마음엔 멍울로 남아 있었다.

살아생전 자신의 두 눈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자, 그는 크게 감동했다.

노구의 몸으로 이곳까지 오는 것만으로 힘들었을 텐데, 그는 어느 때보다 기운차 보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카스만은 경일의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제 죽어도 소원이 없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죽더라도 선인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어이쿠, 무슨 그런 말씀을. 스탄다비아는 이제 시작인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셔야죠. 그리고 영주님이 카스만 경을 얼마나 의지하는데, 오래오래 사셔서 스탄다비아를 이끌어 주세요.”

“그럼요. 제가 죽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

누군가는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고, 누군가는 가만히 서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간의 고생이 큰 기쁨으로 돌아왔다.

나이가 어린 병사는 신이 나서 방벽으로 달려가 고개를 뒤로 젖혀 위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거대한 방벽이 신기한 듯 바라보는 어린 병사들의 눈에는 커다란 희망이 보였다.

새로운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들에게선 약간의 걱정도 느낄 수 없었다.

이들이 자포리자를 얼마나 믿는지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져 왔다.

경일은 이들이 온전히 기쁨을 누릴 수 있게 자포리자에게 인사를 한 후, 던전으로 돌아왔다.

던전으로 돌아오니 피곤이 밀려왔다.

그와 함께 온몸에 묻은 몬스터의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경일은 개울로 가서 알몸으로 누웠다.

마음도 몸도 시원했다.

앓던 이가 수십 개는 빠진 듯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천천히 흐르는 물살이 몬스터 피와 함께 그의 피곤함도 씻어 내렸다.

선조에 땅에 도착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스킬로 바라보던 경일의 입가에 행복한 웃음이 걸렸다.

그런 경일을 던전이 수고했다고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 * *

역시 대형 길드의 힘은 대단했다.

경일과 계약 후 이틀 만에 동네에서 세보 길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해성 길드가 어떤 방법을 써는지는 몰라도, 귀찮은 벌레들이 사라지자 홀가분했다.

‘기다려라. 절대 이대로 넘어갈 순 없지. 이제는 내가 사냥꾼이 되어 네놈들을 사냥하러 갈 것이다.’

경일은 스탄다비아에서 끊임없이 몬스터와 싸웠다.

그는 그 싸움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단지 레벨만 높은 헌터에서, 마나의 운영과 함께 검술을 익힌 헌터로 재탄생한 것이다.

특히 소드마스터로 올라서면서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어 그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해성 길드와 계약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오늘은 두 번째 거래가 있는 날이었다.

약속 장소는 야외의 고즈넉한 한정식집이었다.

사극에서나 보던 대문을 지나자, 멋진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잘 가꾸어진 잔디에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판석이 깔려 있었다.

그중 압권은 소나무였다.

“이야, 멋있네. 내가 나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게 엄청 비쌀 거란 건 알겠는데?”

하나의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에서 또다시 가지가 뻗어 나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었다.

알맞게 휘어진 굴곡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경일은 소나무를 지나 본채로 들어갔다.

단층으로 지어진 넓은 기와집은 현대의 건축 기술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우해수 씨로 예약되어 있습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경일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방의 천장에는 과거의 제등을 본떠 만든 듯한 등이 은은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좋네.”

경일은 기다리는 동안 창밖의 정원을 감상했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던전의 자연도 좋았지만, 조경으로 다듬어진 것도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고 우해수가 들어왔다.

“먼저 와 계셨네요. 빨리 온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우해수가 정중히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아닙니다. 아직 약속 시간이 된 것도 아닌데요.”

“식사 안 하셨죠?”

“네.”

식탁 위의 벨을 누르자, 곧바로 종업원이 들어왔다.

“여기 정식으로 2인분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음식이 들어왔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한 상이 차려졌다.

“많이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누군가에게 대접받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상대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접은 더 기분 좋게 다가왔다.

살짝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맛있네요.”

정갈스럽고 솜씨 있게 만든 음식이었다.

하나하나 만든 이의 정성이 느껴졌다.

던전의 농산물로 만든 음식보다는 조금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훌륭한 맛이었다.

특히 갈비찜은 정말 맛있었다.

부드러우면서 쫀득한 소고기의 풍미가 제대로 살아 있었다.

‘이 소스 만드는 법은 배우고 싶어질 정도네.’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배가 들어간 수정과가 나왔다.

“어떻게 음식은 입에 맞으셨나요?”

“네. 훌륭했습니다. 특히 갈비찜은 정말 괜찮더군요.”

“직원에게 말해 일어나실 때 가져가실 수 있도록 포장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일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이런 좋은 곳에서의 식사 대접을 할 만큼 자신이 중요하다는 뜻이니까.

“저번에 주신 커미네스와 미스릴의 품질에 놀랐습니다. 그렇게 구하기 힘들다는 최상급 커미네스에 미스릴의 경우에는 불순물의 함유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하더군요.”

“네.”

경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던전에서 나온 부산물이 다른 던전의 부산물에 비해 품질이 어느 정도 뛰어날 거라고는 예상은 했지만, 이건 예상을 뛰어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칭찬받은 듯 기분이 좋아졌다.

‘어쩐지, 이런 극진한 대접을 하는 이유가 다 있었어. 그래도 자신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해 주니 믿음이 가네.’

“그래서 계속 이 정도의 품질을 유지해 주신다면, 기존의 가격에서 20% 더 인상된 가격으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경일은 담담한 목소리로 우해수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돈은 경일에게 더는 감동을 주기 힘들었다.

단지 스탄다비아를 지원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돈 때문에 자살까지 생각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경일이 봐 왔던 세상은 오로지 자신의 시야에 비친 모습뿐이었다.

하지만 스탄다비아의 현황을 볼 수 있게 되면서 수백, 수천 명의 인생을 봤다.

자신이 얼마나 편협하고, 어리석고, 속 좁은 인간인지 알 수 있었고, 그들의 삶을 간접적이나 체험해본 뒤로 많은 부분이 변했다.

그들의 삶에 비하면 던전을 만나기 전의 비루했던 삶도 충분히 살 만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군다나 자포리자라는 위인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다.

자포리자가 자신을 신인으로 깍듯이 모시지만, 경일에게 그는 인생의 스승이기도 했다

우해수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어느 정도 협상이 필요할 거라 판단했는데, 경일이 너무 빨리 승낙해 버리자 살짝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최대 40%의 인상 안까지 마련해 둔 상태였다.

‘뭐지? 이렇게 쉽게 우리 조건을 받아들인다고? 분명 최상급의 품질이라고 밝혔는데도…….’

그와의 거래로 회사가 많은 도움이 되는 상황에서 그가 납품한 것이 최상급이라는 것이 판명되면서 경일의 중요도가 수직 상승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최고의 조건으로 계약한 셈이지만, 회사에게만 너무 좋은 조건인 거 같아 왠지 모를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최고의 조건으로 계약하긴 했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경일의 환심을 사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 경일과 계약을 하고 다시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계약할 당시 자신이 직접 모습을 보인 것만 해도 상당한 성의를 표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경일이 중요 인물이긴 했다.

헌터 용품 회사가 자리를 잡기까지 경일과의 거래는 상당히 중요했지만, 이렇게 자신이 직접 나가 접대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경일의 접대보다 더 중요한 일정이 많았으니까

그러던 중 경일이 제공한 물품이 최상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회사는 그와의 좋은 관계를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계약 조건을 상향하기로 결정했다.

경일과의 거래를 최대한 오래 가져 가야 할 강력한 이유가 또 하나 생긴 것이다.

그 일환으로 좋은 곳에서 식사 대접과 함께 기존의 계약과 상관없이 그 즉시 매입가의 가격을 올리면서 그에게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하기로 했다.

원래 이 자리는 담당자가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보고를 받은 그녀가 직접 나가기로 했다.

그 만큼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지만, 이건 사실 그녀의 변덕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변덕이라고 보기보단 호기심에 더 가까웠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느끼지 못했던 독특한 분위기를 느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캐릭터였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었나 생각도 해 봤지만, 오늘 보니 확실히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그날은 경일의 정말 작은 부분만 본 기분이 들었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네. 20%면 적은 금액이 아닐 건데, 전혀 기쁜 모습이 아니네. 분명 산동네의 작은 분식점 사장인 거로 알고 있는데, 돈에 대해 이렇게 초연할 수도 있는 건가?’

우해수는 경일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유심히 관찰했다.

‘지금까지 나를 만난 사람들과의 반응도 너무 달라. 묘하게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보통의 경우에는 나의 위치에 알게 되면 먼저 고개를 숙이든지, 아니면 환심을 사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전혀 없어. 이건 그냥 길에 지나가는 사람을 대하는 듯하잖아. 그리고 물품 값 대신 받아 간 그 많은 식량과 건축자재는 어디에 쓰는 걸까? 아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던전과 관계가 있겠지?’

그녀가 생각하는 경일은 독특하면서도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비서의 보고로는 물품 값으로 받아 가는 식량과 건축자재에 대해 현재 파악된 것은 없다고 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그가 시장에 다시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 황당한 건, 식량과 건축자재가 배달되는 곳이었다.

경일이 말한 주소는 허허벌판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