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198화 (198/300)

[198화] 도둑

창고라도 있으면 이해하겠지만, 허허벌판에 물건을 놓고 가라니.

식량을 그런 식으로 보관하면 품질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시멘트는 비를 맞거나 하면 돌처럼 굳어져 쓸모가 사라져 버린다.

배달 기사 중 한 명이 호기심에 다음 날 배달한 곳에 다시 가 보았으나, 그 많던 물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야 계약대로 물건만 들어오면 되니 상관이 없긴 하지만, 정체가 궁금하기는 하네.’

경일과의 만남은 우해수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음식에 대해서는 만족감을 드러냈지만, 20%나 물품 값을 올린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들이 큰 호의를 보임으로써 앞으로 더 좋은 거래를 이어 가자는 의미였는데, 경일은 당연한 것을 받았다는 듯이 행동했다.

만약 자신들의 준비한 마지노선인 40%로 인상했어도 그는 달라질 게 없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돈에 그렇게 집착하는 성격이 아닌 거 같으니, 앞으로는 다른 방향으로 신뢰를 쌓아야겠어. 제공받는 물건의 양도 양이지만, 질이 너무 뛰어나서 후발 주자인 우리에게 새로운 무기가 생긴 거나 다름없어. 포션과 헌터 무구의 프리미엄 라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니까. 이 사업을 실행시키기 위해서라도 이 사람과의 계약 기간을 늘일 필요가 있는 만큼 앞으로 더 신경을 써야겠어.’

해성 그룹에서 경일은 수평한 관계가 아닌 경일이 위인 수직적인 관계로 재설정됐다.

우해수는 아직 자신이 계획한 프리미엄 라인에 대한 계획은 밝히지 않았다.

그와의 신뢰도 부족했고, 아직 경일이라는 사람의 파악이 끝나지 않아서였다.

어설프게 다가가 중요한 사업 기회를 놓칠 바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신뢰를 쌓고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경일은 우해수에게 준비해 온 커미네스와 미스릴을 넘겨주었다.

“이번 물품 대금의 반은 돈으로 받고 싶습니다. 가능한가요?”

경일의 물음에 우해수가 싱그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럼요. 내일까지 바로 입금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형님, 한 분이 길드가 없습니다. 해성 길드의 파티에 끼워 주실 수 있을까요? E급 던전까지 가능한 헌터입니다.”

“그럼요. 며칠 안으로 연락이 갈 겁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해수의 입장에서는 별로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간단한 부탁을 들어준 것뿐인데, 경일은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물품 대금을 올려 줬을 때보다 더 격한 반응에 그녀는 잠시 헷갈리기도 했다.

‘엄청나게 아끼는 사람인가 보네. 특별히 신경 쓰라고 해야겠어.’

우해수와 헤어진 경일이 향한 곳은 세보 길드장인 문근철의 집이었다.

사람 찾기 스킬이 있는 경일은 이미 세보 길드 주요 인사들의 집을 모두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분식점을 마치고 나면 그들의 집 주변을 돌아다니며 지형을 익혔고, 습격할 장소 또한 정해 둔 상태였다.

오늘은 드디어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실행할 셈이었다.

‘이제 맺힌 원한을 풀 때가 됐지. 나를 건드렸으니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어.’

경일은 스킬로 문근철의 위치를 탐색했다.

이윽고 이곳에 한참 떨어진 곳에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재밌게 놀라고. 오늘 밤부터는 화가 좀 날 테니.”

문근철의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경일은 스탄다비아에서 공수한 갑옷을 입었다.

CCTV가 여러 개 보였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찍혀 봐야 스탄다이아의 감성이 녹아 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갑옷은 추적도 되지 않을 테니까.

담을 가볍게 넘어가자, 1층의 창문에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경일은 곧바로 벽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도둑고양이처럼 조용히 창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의 거실에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첫 번째 방에 귀를 가져다 대고 문을 밀어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했다.

이러면 문의 합판이 스피커의 울림판 역할을 해서 안의 소음이 100배는 더 잘 들렸다.

그런데 귀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경일은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빙고!”

방은 서재였다.

커다란 책상이 방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옆에 그가 찾는 것이 있었다.

금고였다.

커다란 금고가 위풍당당하게 책상 옆에 있었다.

“돈이 많은가 보네. 이렇게 큰 금고를 쓰는 걸 보니.”

금고는 묵직했다.

경일이 금고를 옮기려고 힘을 쓰는 순간, 귀를 찢는 듯한 경고음이 들렸다.

“경보 장치가 확실하네. 이 정도면 지레 겁먹고 알아서 도망가겠다.”

계단이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비해 경일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경일은 금고를 인벤토리에 넣은 뒤, 게이트를 열어 곧바로 사라졌다.

그렇게 누군가가 서재의 문을 열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이, 이럴 수가. 분명 경보가 울리자마자 올라왔…….”

이런 그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이 있었다.

금고가 사라진 걸 알아차린 것이다.

“이, 이게 가능한 거야? 아무리 강한 헌터라도 몇 초 사이에 무거운 금고를 가지고 사라질 수 있는 건가?”

급하게 연락받은 문근철이 곧바로 집으로 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둑이 들어와서 금고를 가져갔다니!”

“그, 그게 말입니다.”

하민규가 당황스러워 입을 제대로 떼지 못했다.

“이 새끼야, 똑바로 말해!”

“저, 그게… 분명 경보가 울리자마자 뛰어 올라갔는데, 금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경보가 울리고 바로 올라갔는데 금고가 사라졌다니? 너 이 새끼, 집 안 지키고 밖에 나갔었지?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

“아닙니다! 분명 집에 있었습니다! CCTV를 확인해 보시면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CCTV란 말에 문근철의 노여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는 곧바로 CCTV를 확인했다.

“이 새끼는 뭐야?”

난생처음 보는 디자인의 갑옷을 입은 남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남자가 2층으로 가볍게 올라가는 모습이 CCTV에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2층 거실에 설치된 CCTV에도 등장했는데, 남자에게선 약간의 긴장감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자기 집에 들어가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서재에 들어가고 얼마 뒤, 경보가 울렸다.

거의 경보가 울리자마자 몇 초 뒤에 하민규가 계단으로 뛰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서재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

문근철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가 이상한데…….”

의문에 가득했던 그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이 새끼, 들어간 모습은 있는데 나온 모습이 없잖아! 이게 가능한 거야? 야, 너도 저 새끼 서재에 들어간 거 보이지? 나 혼자 보이는 거 아니지?”

“네, 저도 보입니다.”

“씨발, 귀신인 줄 알았잖아. 그건 그렇고, 저게 가능한 거야? 금고는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놈이라면 설명할 수 있다고 쳐도, 방 안에서 어떻게 사라진 거지?”

아무리 물어본들 이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이 새끼 정체가 뭐야?”

김형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경일은 부동산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니에요, 김 사장님.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시세보다 더 좋은 가격으로 사 주셨는데. 어쨌든 축하드려요. 분식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건물까지 사시고.”

“하하하, 언제든지 오시면 제가 VIP로 모시겠습니다.”

“어머, 그럼 저야 좋죠. 안 그래도 이사 가면 더는 동네 분식 음식을 못 먹나 걱정했는데.”

“사장님은 당연히 예외죠.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경일은 자신이 세 들어 있는 건물을 샀다.

‘이거, 세보 길드 길드장 집에서 턴 돈이 이렇게 짭짤할 줄 알았으면, 굳이 해성 그룹에서 현금을 받지 않아도 될 걸 그랬어. 뭐, 언젠가 또 목돈이 필요할 때가 있겠지’

경일은 던전에서 금고를 열어 봤을 때, 놀라 자빠질 뻔했다.

금고 속에는 골드바와 현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분식점 건물을 몇 채나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 정도 돈을 한꺼번에 날렸으니 속이 꽤 쓰리겠지? 지금쯤 미쳐 날뛰고 있을 거야. 흐흐흐, 푸하하하하하!’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내가 건물주가 되다니. 죽을 때가 되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좋냐?”

배실배실 웃고 있는 경일을 보고 네로가 물었다.

“당연히 좋죠. 조물주와 동급인 건물주가 됐는데.”

“쯧쯧, 이것보다 몇천 아니, 몇만 배 좋은 던전을 가지고 있는 놈이 겨우 이런 걸로 호들갑은.”

“던전이랑 비교하면 안 되죠. 이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로망 같은 거라고요.”

“로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은 뭐야?”

순간, 경일의 얼굴에 먹구름이 밀려들었다.

요즘 네로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음식에 대한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네로가 음식을 원체 좋아하기도 했고, 늘 새로운 걸 원해서 머리가 아팠다.

“어, 그게 말이죠…….”

“너, 딱 보니까 건물 산 거에 빠져서 저녁 식사를 신경 안 쓴 거 같다?”

네로의 귀여운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아, 네로님, 그 얼굴에 화를 내는 건 반칙이라고요.’

화난 모습이 더 귀여워서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누님한테 부탁할게요.”

“그래? 알았다.”

네로는 선호연이 준비한다는 말에 한발 물러났다.

그녀는 요즘 팔자에 없는 요리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한식, 중식, 일식까지.

처음에는 동네 분식의 주방 일도 바빠 거절했으나, 경일의 적극적인 푸시로 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네로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려는 조치였다.

덕분에 경일은 분식점 일이 더 바빠졌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주아 씨에게 한 이틀 데리고 있어 달라고 해 버릴까? 그럼 저 까다로운 입맛도 조금 나아질 거 같은데.’

“너 눈초리가 왜 그래? 무슨 나쁜 짓을 꾸미는 악당의 눈인데.”

“아닙니다. 제가 감히 네로님께 그런 불충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음, 수상한데…….”

손주아에게 고양이 간식을 듬뿍 안겨서 네로에게 보내고 싶어지는 하루였다.

경일은 그동안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실행했다.

네로의 지도 아래 안정적으로 던전 고유 식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자, 포션의 개량에 나선 것이었다.

‘스탄다비아의 마법사가 만든 방법이 지구의 포션보다 효과가 더 뛰어난 거 같아. 그런데 여기에 던전 식물이 들어가면 효과가 더 좋아지지 않을까?’

경일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연금술사인 손윤찬에게 전달했고, 그는 포션에 던전 사과즙을 넣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더 나은 포션을 연구했다.

경일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포션에 던전 식물이 들어가면서 기존 포션보다 효능이 더 뛰어난 포션이 탄생한 것이다.

“마나 포션의 효능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게 가장 기분이 좋아. 이걸로 스탄다비아의 병사들이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몸속에 마나가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강해진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스탄다비아 병사들뿐만 아니라 경일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경일이 만든 마나 포션에 가장 큰 효과를 본 건 이철호였다.

마의 구간을 깬 뒤로도 꾸준히 마나 포션을 먹어 비슷한 레벨의 헌터들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헌터 협회가 주관하는 던전 폐쇄에만 참여 중이라 그의 성장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E급 던전 몬스터 사냥이 가능해지면서 F급 던전 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길드에 속해 있는 헌터들에 비해 던전 참여 횟수가 적었다.

하지만 경일의 부탁으로 해성 길드 던전 폐쇄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그도 정상적인 성장이 가능해졌다.

아니, 경일의 뒷받침이 있으니 지금까지의 세월을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의 빠른 성장이 가능할 터였다.

경일이 분식점에 도착하니 못 보던 사람들이 보였다.

경일의 죽이 던전병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아름아름 퍼져 멀리서도 죽을 얻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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