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도대체 어떤 놈이야?
“사장님, 이 이상 죽을 만드는 건 힘들 거 같아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티를 내지 않던 선호연이 두 손을 들었다.
그녀의 성향 상 쓰러질지언정 자기 입으로 힘들다고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한 건, 동네 분식의 주방 규모로는 이 이상의 죽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분식점 장사만으로도 바쁜데.”
“아니에요. 이 죽의 효과를 가장 먼저 본 게 전데요, 뭐.”
선호연은 전혀 힘들지 않다고 말했지만, 경일은 속이 편치 않았다.
일면식도 없는 남을 돕는다고 자기 사람이 힘들어지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를 힘들게 하는 건, 언제나처럼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느 날 죽이 떨어져 받지 못한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죽을 파는 사람을 목격한 것이었다.
‘무슨 암표상도 아니고. 휴~’
다음부터는 저 사람에게 죽을 주지 않을 생각이지만, 저런 이들은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었다.
‘내가 인류를 지키는 히어로도 아니고, 내 능력만큼만 하자.’
경일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을 도와줄 순 없었다.
이에 분식점이 동네 사람들에게만 음식을 파는 것처럼 동네 사람들에게만 죽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죽을 얻지 못하는 이들이 행패를 부렸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이길호가 상대했다.
아직 레벨이 낮긴 했지만, 헌터인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일반인은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던전병을 앓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이곳이 마지막 기회일 수밖에 없었다.
경일이 퇴근하면 꼭 몇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죽을 얻으려고 온 처지에 분식점 장사를 방해할 수는 없는 터라, 급한 마음을 누르고 경일이 퇴근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발 죽을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염치없는 건 알지만, 아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키는 건 다 할 테니, 제발 죽을 좀 나누어 주십시오.”
남자의 목소리는 얼굴에 비해 아주 젊었다.
실제로 생긴 것보다 최소 열 살은 어릴 것이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얼굴엔 주름투성이였고, 경일의 팔목을 잡은 손은 상처투성이에 굳은살이 딱딱했다.
아들을 생각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 와서 마음이 아팠다.
“사장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남자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는 이는 젊은 여자였다.
“아버지가 던전병으로 많이 아픕니다. 벌써 3년째 거동도 못 하고, 고통 속에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발 죽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아버지가 죽을 먹고 처음으로 고통 없는 밤을 보냈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절박한 심정으로 경일에게 간청했다.
처음 이 일을 겪었을 때는 너무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다시 분식점으로 가 비후초를 넣은 죽을 만들어 주었다.
이 일이 몇 번 반복되자, 경일은 아예 비후초를 달인 물을 가지고 다녔다.
아무리 동네 사람들에게만 죽을 나누어 주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절박한 사람들을 외면할 만큼 그는 모질지 못했다.
물통을 받아 든 사람들이 경일에게 크게 감사했다.
어떤 이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까지 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이에게 죽을 나누어 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웠다.
분식점은 손님들로 넘쳐났다.
동네 사람들만 이용했는데도 자리가 없어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사장님, 요즘 미용실 손님이 부쩍 늘어난 거 있죠. 이대로만 된다면 금방 부자 되겠어요.”
이미순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일주일에 두세 번은 동네 분식에서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여기도 손님이 많아졌네요. 옛날처럼 점점 이용하기 힘들어지겠어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미용실과 분식점의 손님이 늘어난 건, 동네 사람들이 늘어난 덕이었다.
최근 이 동네에 이사를 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낮에 거리를 걷다 보면 이삿짐 차를 보는 일이 많았다.
‘이사를 오는 사람들이 늘었네. 이 동네까지 오는 것을 보면, 다들 사는 것이 더 팍팍해진 모양이네.’
이 당시만 해도 경일은 이 동네에 이사를 오는 사람이 늘어난 게 자신 때문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
사실 이사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 중에 던전병 환자가 있었다.
그 때문에 죽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손호연은 더 이상 바쁘지 않았다.
죽을 대신할 것이 나타난 덕이었다.
연금술사 손윤찬이 경일의 지시를 받고 드디어 던전병 치료 포션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포션은 지금까지 던전병에 좋다는 모든 던전 고유 식물과 도움이 될 만한 던전 식물을 넣어 만든 특제 포션이었다.
극적으로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꾸준히 먹는다면 던전병을 치료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치료 식물이 포션화 되면서 그 효능도 크게 향상되었다.
같은 양의 던전 고유 식물로 더 많은 사람의 치료가 가능해진 것이다.
손윤찬은 자신의 목표에 비해 아직 효능이 부족해서 개량할 게 필요하다고 했지만, 경일의 입장에서는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그날부터 동네 분식에서 치유의 죽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포션을 섞은 치유의 물이 채웠다.
이것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을 배제하고, 최대한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했다.
“저기, 여기 오면 던전병 치료제를 얻을 수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그런 건 없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차일 뿐입니다.”
경일은 굳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소문이 퍼져 나가는 건 막지 못하겠지만, 최대한 소문이 퍼지는 걸 늦추고 싶었다.
“저, 그거라도 한 병 얻을 수 있을까요?”
경일이 처음 보는 사람이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곧바로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였다.
“저, 여기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동네 주민입니다.”
“아, 네. 식사 때마다 종이컵으로 한 컵 드시면 됩니다. 더 많이 먹는다고 효과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니, 꼭 지켜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남자가 돌아가고 나서야 이 동네에 이사 오는 사람이 늘어난 이유를 알았다.
처음 아이가 비후초가 들어간 죽을 얻으러 왔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다.
세보 길드 같은 날파리가 꼬일 것도.
으슥한 밤, 경일이 향한 곳은 세보 길드 부길드장인 김형성의 집이었다.
세보 길드 헌터들 중에 가장 원한이 깊은 이가 그였다.
직접 찾아와 협박하고, 경찰을 보내고, 직접 자신을 잡아다 고문까지 하려고 했으니.
애초에 길드장의 집보다 김형성의 집을 먼저 털 생각까지 했지만, 상징성에 있어서 길드장을 따라갈 수가 없어 김형성은 2순위로 밀렸다.
그의 집은 고급 빌라 주택단지였다.
“이야, 좋은 데서 사네. 이 새끼들은 도대체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 거야. 이건 도시 안의 숲 같잖아. 조경에 얼마나 돈을 바른 거야… 이들이 잘 사는 만큼 분명 피해자도 그만큼 많다는 거겠지.”
가난하게 살아온 경일에겐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들 정도의 동네였다.
총 아홉 개 동 규모로 동과 동 사이의 길을 따라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여러 개의 박스를 쌓아 올린 듯한 건물 디자인은 보기만 해도 세련돼 보였다.
잘사는 동네답게 군데군데 경비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경일은 갑옷을 입은 뒤 어둠을 틈타 재빨리 빌라로 잠입했다.
불규칙적으로 박스를 쌓은 듯이 만든 특유의 디자인 덕에 굳이 계단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벽을 타고 김형성의 집으로 올라갔다.
그의 집은 펜트하우스였다.
꼭대기 층이라 방심했는지 창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불이 꺼진 집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부엌의 그릇이나 화장실에 칫솔이 하나 있는 걸로 봐서는 혼자 사는 집 같았다.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거실의 불을 켰다.
“멋진데? 사람을 고문하는 게 취미라고 들었는데, 색다른 면도 있네. 하여간 미친 싸이코 새끼가 별짓을 다 하네.”
김형성의 집 거실은 작은 미술관 같았다.
비싸 보이는 그림들이 벽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거 진짜는 아니겠지?”
미술에 문외한인 경일이 보기에도 대단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독특한 스타일의 그림은 화가의 개성이 그대로 느껴졌다.
밝은 톤의 다채로운 색깔은 정교하게 배열되어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림이랑 이 새끼는 도저히 매치가 안 되네. 아마 정상적인 루트로 구한 게 아니라, 또 죄 없는 누구를 협박해 뺏었겠지. 안 그래도 던전의 집이 썰렁했는데, 그림을 걸어 놓으면 뭔가 있어 보이고 괜찮겠네. 네로님한테 진품인지 물어봐야겠다. 오랜 시간을 산만큼 예술에도 조예도 깊겠지.”
경일은 집안의 그림을 빠짐없이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 새끼는 악질 중의 악질이니까, 좀 더 약을 올려야겠어.”
자신을 잡으러 온 세보 길드의 헌터들에게 김형성에 관한 모든 것을 들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는 놈일수록 자신이 당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경일의 손길이 스쳐 지나가자, 집은 이사 오기 전 상태로 바뀌었다.
벽만 남겨 두고 모든 것을 쓸어 담은 것이다.
집에 있던 모든 세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젓가락 하나 남겨 두지 않았다.
“주인을 잘못 만나 스탄다비아까지 가는구나. 다 주인을 잘못 만난 팔자라 생각해라. 아니지, 스탄다비아에서는 아주 귀한 물건일 테니, 더 사랑받을 수도 있잖아.”
김형성이 집에 들어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며 즐겁게 작업을 끝냈다.
“어디 제대로 열 받아 봐라. 네놈은 이렇게 당해도 싼 놈이니까. 조만간 더욱 큰 시련을 안겨 주지.”
경일은 사악한 미소를 지은 뒤, 곧바로 게이트로 들어갔다.
세보 길드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길드장에 이어 부길드장까지 깡그리 털렸으니, 난리가 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특히 김형성은 미칠 지경이었다.
집이 털린 것만 해도 분한데, 모든 세간마저 사라졌다는 이야기에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평소 악랄하게 군 것에 대한 벌을 받은 거라고 그의 뒤에서 수군거렸다.
“씨발, 잡히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그는 얼마나 분했는지 으드득거리며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
결국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발광하는 모습은 광견병에 걸린 한 마리 미친개 같았다.
회의실 안에는 세보 길드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부길드장은 물론 각 팀의 팀장들이 자리해 있었다.
“길드장님과 부길드장님을 턴 도둑은 같은 인물로 보입니다. CCTV를 분석한 결과, 같은 갑옷을 입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정도 도둑이라면 이미 알려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다방면으로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은 약간의 성과도 없는 실정입니다.”
“이놈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거야?”
문근철의 화난 목소리에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합죽이가 되었다.
헌터 사회는 넓은 듯 보였지만, 사실 많이 좁은 사회였다.
여섯 다리만 건너면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라는 말이 있듯, 한두 다리를 건너면 헌터 사회에서의 정보는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경일처럼 갑옷을 입는 경우, 헌터 용품을 제작한 회사부터 뒤진다.
회사마다 고유한 디자인이 있어서 찾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을 시작으로 정보를 좁히다 보면 언젠가는 찾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경일처럼 처음 보는 독특한 디자인의 갑옷이라면 찾는 것이 더 쉬웠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