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분명 수제로 만든 갑옷이었고, 이 정도 갑옷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은 모두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 봐도 경일이 입은 갑옷을 제작한 장인은 없었다.
갑옷이 유일한 단서였는데, 중간에 끊겨 버린 것이다.
“씨발, 도대체 누구지? 전혀 꼬리가 잡히지 않잖아. 이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다면, 시간과 정성이 보통 많이 드는 일이 아닌데… 그런데 나를 노린다고? 그것도 인벤토리 스킬이 있는 놈이? 가장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놈이 돈이 부족해서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야… 아니, 돈이 부족하다 해도 굳이 위험한 나를 노릴 이유가 없지. 더 쉬운 사냥감이 널렸는데. 이건 분명 나에게 원한이 있는 놈이 틀림없어.”
문근철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잡히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살아오면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상대가 희귀한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곤 하지만, 그게 강함의 척도가 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이는 전투원이라기보다는 지원조의 성격이 강했다.
이 동네에서 자신과 일대일로 붙을 수 있는 헌터가 드문 만큼, 그는 싸움에 자신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손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분 나쁘고 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세보 길드는 때 아닌 도둑 경계령이 내렸다.
경일이 세보 길드 주요 인사들의 집을 꾸준히 털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김형성은 두 번이나 집이 털렸다.
자신은 때리는 사람이지, 누군가에게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직접 갑옷을 만드는 전국의 장인을 찾아다녔다.
“씨발, 다른 곳은 금고만 털어 갔는데, 나는 양말 한 켤레까지 모두 털어 가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 이 개자식이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나 김형성이야, 김형성. 나를 보기만 해도 오줌 지리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넌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도록 해 주지. 내가 얼마나 집요한지 보여 주마. 몇 년이 걸리더라도 네놈을 꼭 잡고야 말겠어!”
그는 모든 시간과 방법을 동원해 도둑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는 달리 조그마한 단서 하나 잡지 못했다.
.
.
.
보고를 받은 문근철의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개 같은 일이.”
결국 그가 가장 우려하는 일이 터졌다.
세보 길드가 관리하는 사업체에도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경일은 문근철의 금고에 있던 중요 서류를 검토하고, 그들의 은밀한 사업체까지 모두 털었다.
어쩔 수 없이 세보 길드는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자신을 노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경일에게 털린 것만 해도 엄청난 액수인데, 길드의 활동까지 멈추는 바람에 엄청난 손실을 봐야 했다.
.
.
.
경일은 불 꺼진 분식점에서 간단히 한잔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꼭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더라고. 그것보단 상대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줄 방법이 있는데 말이야. 내가 강하기도 하지만, 내 능력에 머리만 잘 쓰면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더라 이거지. 앞으로 내가 서서히 피를 말려 주지, 기대해.”
경일은 오래간만에 양쪽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을 만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이야, 내 복수의 끝도 기대해 달라고. 안 그래도 싱싱한 일꾼이 엄청 필요했거든, 하하하!”
맑고 투명한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캬~ 좋네!”
오늘따라 소주가 무척이나 달았다.
* * *
스탄다비아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쳤다.
자포리자가 전 영지민의 이동을 선언한 것이다.
“우리는 선조들의 땅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것이다.”
자포리자의 선언에 영지민들은 깜짝 놀라며 불안감에 휩싸였다.
특히 알리사에서 이주해 온 영지민들의 불안감이 컸다.
당연했다.
고생 고생해서 이제 터전을 마련해 겨우 살 만해졌는데, 새로운 곳에서 또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건, 그들에겐 큰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스탄다비아 영지민들에게서도 반발이 일어났다.
모든 재산이 이곳에 있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하니 당연했다.
특히 평생 찢어지게 살다가 경일이 나타난 이후로 처음 재산을 가져 보니, 그 애착이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 영지민들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대로 무리하게 추진하다가는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있습니다.”
첩보장 블라도의 보고에도 상관치 않고 자포리자는 더욱 강력한 선언을 했다.
“좋아, 불만이 있는 자는 여기에 남으라고 해라.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까지 책임져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주는 각자의 결정이니, 모두 신중히 결정하라 이르라.”
자포리자의 더욱 강해진 선언에 영지민들의 동요는 커져만 갔다.
그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 영지민들까지 품에 안을 생각이 없었다.
이건 스탄다비아를 침공한 종교의 영향이 컸다.
그때, 일부 영지민들의 이중적인 자태에 자포리자는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무조건 최선을 다해 잘해 주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부 영지민들은 경일이 보내 준 식량을 달라고 농성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때의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다. 나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위해 내가 노력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선인의 은혜를 나누어 준 것만 해도 충분히 영주로서 할 일은 다 했다. 선인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나를 진정으로 따르는 영지민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하겠다.”
자포리자는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이주 준비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마차의 제작이었다.
영지민들의 짐을 싣고 가기 위해서 마차는 필수였다.
경일이 가르쳐 준 대로 나무 바퀴를 보강하기 위해 고블린 가죽을 덧댔다.
이로써 나무 바퀴의 수명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자포리자는 비누의 판매도 중단했다.
팔아 봐야 적인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배만 불리니, 팔 이유가 없었다.
이에 상인들이 크게 반발했다.
비누는 귀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 된 지 오래였다.
비누를 거래하고 있는 상단은 사실 비누로 인해 더 많은 유무형의 이득을 보고 있었다.
다른 거래에 비누를 이용해 더 유리한 계약을 맺거나, 여러 군데에서 투자까지 유치할 수 있었다.
만약 비누의 거래가 중지된다면, 단순히 상품 하나의 손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 그 피해가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상인들이 곧바로 들고일어났다.
한창 일을 보고 있는 자포리자에게 집사가 찾아왔다.
“영주님, 상인들의 대표란 사람이 영주님을 뵙기를 요청합니다.”
“무슨 일이지?”
“비누에 관한 일로 알고 있습니다.”
“알겠네. 들어오라고 하게.”
“네, 영주님.”
집사가 금발에 선이 굵은 인물을 데리고 들어왔다.
상인보다는 용병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큰 덩치의 남자였다.
“반갑습니다, 영주님. 전 로렌 상단의 지점장 하인스입니다.”
“그래, 반갑군. 자리에 앉지.”
그가 자리에 앉자 집사가 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마시면서 이야기하지.”
“감사합니다, 영주님.”
하인스를 차를 마시며 자포리자를 자세히 살폈다.
그가 자포리자를 실제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거래는 대부분 행정관인 사미르를 통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볼 일이 없었다.
‘뭐지? 이 여유는? 마치 절대자의 기품이 있잖아. 변방의 이 작은 영지에 이런 인물이 웅크리고 있었을 줄이야. 비누가 그냥 나온 게 아니란 말이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상행을 시작했다.
벌써 상인으로 활동한 지 30년 가까이 됐다.
그렇기에 오늘 이 자리가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배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자포리자가 먼저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비누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비누가 왜?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인스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뻔히 알고 있을 거면서 모른 척하는 자포리자가 순간 얄미웠다.
일부로 모른 척하는 이상, 먼저 용건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비누에 문제가 있을 리 있겠습니까? 최고의 제품인데요. 제가 상인들을 대표해서 찾아온 건, 판매가 중단된 비누를 다시 팔아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인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자포리자는 정말 비누를 팔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네?”
하인스가 생각지도 못한 자포리자의 대답에 당황했다.
자신이 온 이유를 알고 있으니 협상에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해 일부러 연기를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진짜 관심이 없어 보였다.
협상할 생각이 없는 상대와 협상을 하는 건,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이 상황은… 대단히 좋지 않았다.
“영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인스는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자포리자가 한 말의 의미를 물었다.
“방금 말하지 않았는가? 좋아, 한 번 더 말해 주지. 내가 왜 비누를 팔아야 하지?”
“죄송합니다. 너무 의외의 말씀이라 제가 실수했습니다.”
하인스는 이미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최대한 동요를 숨기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격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렸다.
잠깐이라도 빠르게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되도록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영주님, 이번 통행세 사건으로 저희에게 마음이 많이 상하신 거 같습니다.”
하인스는 자포리자와 동질감을 형성하기 위해 그의 마음부터 달랬다.
“뭐, 알고 말하는 거 같으니 나도 솔직히 말하지. 이번 통행세 사건 때문에 머리가 아프긴 꽤 아프긴 했지.”
“하지만 이건 저희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은 프라인과 아드리온이 통행세를 거두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저희도 이 일 때문에 많이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하인스는 자포리자가 조금 마음이 풀어진 틈을 타서 재빨리 책임 소재를 프라인과 아드리온으로 돌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들이 본 손해를 전부 스탄다비아로 돌린 사실을 뺐을 뿐.
“하하하하! 그러니까 화를 낼 거면 프라인과 아드리온에게 내야지, 왜 거래를 끊어 상인에게 화풀이하느냐? 이 말이지?”
“…….”
하인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말이야, 난 화풀이를 하지 않았어. 내가 상인들에게 화풀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대들과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무슨 화풀이를 한단 말인가? 스탄다비아는 아무 상관없는 이들에게 화풀이를 할 만큼 무례하지 않다네.”
“네?”
또다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포리자의 말에 하인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붉어진 피부 색깔까지 돌리기에는 무리였다.
자포리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의 손에 땀이 맺혔다.
의외의 반응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끌려가기만 하고 있었다.
비누를 팔아 달라고 요청하러 온 입장에서, 이건 매우 좋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돌아갈 판이었다.
그건 곤란했다.
비누 판매가 재개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속한 상단에도 큰일이었다.
더군다나 상인들의 대표로 이 자리에 온 만큼,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이대로는 곤란했다.
“영주님, 지금까지 우리와 수많은 거래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니요. 그 말씀은 너무하신 거 같습니다. 저희가 들어오면서 스탄다비아가 엄청나게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새롭게 상인의 거리가 형성되면서 영지민들의 일자리도 많이 늘어났고요. 영지민들 생활이 우리 덕에 훨씬 나아진 건 분명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상인들이 이 땅에 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인스는 목소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몸짓을 크게 하며 말했다.
덩치가 튼 하인스가 저렇게 열정적으로 말을 하니, 말 그 자체에 대단한 설득력이 실렸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