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가족 같은 관계?
상인의 대표로 뽑힐 만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사람으로 따지면 혈관에 흐르는 피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그동안 좁아진 혈관은 넓히고 막힌 혈관을 뚫었습니다. 솔직히 영주님의 말씀에 섭섭한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인스가 열변을 토했다.
그의 다채로운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히 그에 말에 빠져들 거 같았다.
하지만 자포리자는 좋아하지 않는 연극에 억지로 끌려간 관객처럼 무심히 하인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글쎄,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우리는 철저히 계약 관계가 아니었나? 내가 알기론, 비누로 그대들이 얻은 이익이 훨씬 큰 거 같은데? 비누를 거래한 상단들은 많은 돈을 벌어 하나같이 규모가 커지지 않았나? 내 말이 틀렸나? 너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나에게 크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포리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하인스는 자신만만하게 짓고 있던 표정에 금이 갔다.
“물, 물론 상인인 이상 저희도 당연히 이득이 남았습니다. 제 말의 의도는 서로 이렇게 이득인데, 굳이 거래를 끊을 필요가 없지 않으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거래를 한 만큼, 우리는 스탄다비아를 단순한 계약 관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깊은 신뢰를 쌓은 가족 같은 관계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인스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이 열변을 토했다.
“상인들과의 거래가 끊겨서 영지민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받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상단에 취직해 일을 하는 영지민들도 많습니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일자리가 없어지면, 죽으라는 소리와도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비누와의 거래는 이제 물건을 팔고 사는 단순한 거래가 아닙니다. 많은 것이 얽혀 있습니다. 이 거래가 재개되면 영지민들의 생활에 나아지고, 세수가 늘어나니, 스탄다비아에 큰 이득이 되는 건 사실 아닙니까? 그것만 봐도 비누의 거래를 다시 할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내세운 논리가 통하지 않자 하인스는 영지민들을 위한 일이라는 점을 들고 나왔다.
“가족 같은 관계라… 언제부터 상인들과 우리가 가족 같은 관계가 됐지? 상인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영지민들을 위해 한 일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있으면 한 번 말해 보게.”
자포리자가 하인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인스는 뭐라도 하나 이야기해야 하는데, 한 게 없으니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보너스라도 한 번 줬으면 여기서 할 말이 있었을 텐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자포리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정당한 대가를 주고 일을 시켰습니다. 임금을 떼먹은 적도, 날짜를 어긴 적도 없었습니다. 영주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다른 영지에서는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탄다비아를 존중하기에 그런 짓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인스는 이렇게 된 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꾸했다.
“일을 시켰으면 임금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게 자랑거리가 되는가?”
자포리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하인스를 노려봤다.
“내가 알기론 오히려 다른 영지들보다 낮은 임금을 주고 일은 더 많이 시킨 거로 아는데 말이야. 더군다나 변방에 사는 촌놈이라 무시하고 온갖 폭언은 물론 괴롭히기까지 했고 말이야. 너는 이런 짓을 하는 걸 두고 가족이라고 말하는 모양이지? 그리고 영지민들을 돌보는 건 내가 할 일이니, 함부로 선을 넘지 말게.”
폐부를 훅 찔러 오는 자포리자의 말에 하인스는 진땀이 났다.
‘어떻게 영지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는 게 없을 수가 있지? 지금까지 저런 일까지 신경 쓰는 영주가 있었나? 아니, 없었어. 그리고 무슨 사람이 이렇게 날카롭지? 이건 무슨 거대 상단의 상단주와 거래를 하는 거 같잖아.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이런 촌구석에서 많은 사람을 겪어본 것도 아닐 텐데… 어디서 저런 식견이 나오는 거지?’
이 모든 건 경일이 보내 준 책을 공부한 결과였다.
경일은 자주 역사에 관한 책을 번역해 보냈다.
그에게는 역사는 최고의 스승이니 다름없었다.
자포리자는 자신에게 미래가 될 수도 있는 역사에 큰 흥미를 느꼈다.
공부가 깊어질수록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 또한 넓어지고 깊어졌다.
이제 저런 상인의 얄팍한 술수를 깨부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인스는 이곳에서 벌어질 모든 상황을 상정하고 그에 따른 대비를 세워 왔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고, 돌에 맞은 유리처럼 철저히 깨져 버렸다.
이 시대의 어떤 영주가 영지민들의 삶을 저렇게 잘 알고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자포리자는 행정가 스타일의 영주가 아니었다.
뼛속 깊숙이 기사였고, 강함을 숭상하는 자였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에 하인스가 아무리 상인으로 잔뼈가 굵었어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포리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신뢰? 이득이라고 했나?”
짧은 말과 동시에 방 안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그는 분노를 드러냈다.
‘뭐지?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왜 화를 내지?’
지금까지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갑자기 화를 냈다.
하인스는 상인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친절한 얼굴에 얕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괜히 온 거 아냐? 아무래도 실수한 거 같은데. 거래액의 0.1퍼센트를 준다는 말에 혹하는 게 아닌데. 이렇게 어려울 자리일 줄이야.’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신뢰, 이득이라고 말했나?”
자포리자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하인스에게 다시 한번 같은 단어를 짓씹듯 내뱉었다.
“네놈이 감히 내 앞에서 신뢰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줄은 몰랐는걸. 상인이란 종족이 돈만 된다면 어떤 짓인지 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네놈은 특히 심하더군. 이번에 통행세가 생기고 그 손해를 우리에게 모두 받아 내자고 한 놈이 감히 내 앞에서 신뢰를 말하다니. 지금 스탄다비아는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다. 그건 단합으로 스탄다비아에 들어오는 모든 물건 값을 올린 너희가 더 잘 알 텐데? 성질대로라면 당장이라도 네놈의 목을 베고 싶다는 것만 알아 두어라.”
하인스는 숨이 턱하고 막혔다.
‘이런, 어떤 새끼가 이런 걸 흘렸지? 통행세를 논의하던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는 당연히 비밀을 지켜야지. 나 혼자 좋자고 한 이야기도 아니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이거늘. 당시에 모두 동의하며 손뼉을 치며 나를 치켜세우더니 뒤에서 이런 짓을 해? 실수했어. 이득이 된다면 부모도 팔아먹을 놈들을 믿었다니… 이 자리에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하인스는 얼굴에서 상인의 탈을 벗었다.
이런 사실까지 알고 있는데, 협상으로 문제를 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웃음기를 뺀 얼굴은 무척이나 달랐다.
조금 전과 같은 얼굴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싸늘한 얼굴이었다.
“맞습니다. 제가 그 회의에서 의견을 냈고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행이 됐습니다.”
본 얼굴을 드러내자, 그의 분위기 또한 달라져 있었다.
상인이 아닌 기사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제법 날카로운 게 칼만 들지 않았지 일기토에 나선 기사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비누로 많은 이득을 본 것도 사실입니다.”
“제법이군.”
자포리자는 자신의 기세에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본모습을 드러낸 하인스를 한편으로는 칭찬해 주었다.
“칼자루는 영주님이 가지신 거 같으니, 그에 맞는 대접을 해야겠지요.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서로 이득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하인스는 잠시 말을 끊어 자포리자의 관심을 더욱 집중시켰다.
“비누의 가격을 10퍼센트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이건 저희 상단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상단의 동의했다는 걸 알려 드립니다.”
하인스는 자포리자가 이 제안을 절대 거절할 리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습니까? 10퍼센트면 절대 적은 금액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전 영지민의 이주라는 큰일을 실행 중인 거로 아는데, 돈이 많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화가 나신 건 압니다만, 그런 사소한 감정 때문에 큰돈이 걸려 있는 거래에 영향을 끼칠 만큼 영주님은 소인배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하하하. 제법이군. 내가 이 거래를 거절하면 소인배가 되는 건가?”
호탕하게 웃던 자포리자가 순간 정색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이 거래를 거절할 것이다. 겨우 10퍼센트로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너희의 한계가 뭔지 아느냐? 너희는 스탄다비아를 깔보고 있다는 것이다. 변방의 힘없는 작은 영지라고 말이야. 여기 사람들은 멍청해서 너희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갈 거라 생각하는 거지. 10퍼센트만 높여도 내가 흥미를 보일 거라고 생각한 걸 보면 같잖지도 않아.”
쾅!
자포리자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던 그의 그 큰 덩치에 하인스는 등에서 땀이 찔끔 났다.
“스탄다비아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놈들이 입으로만 신뢰니, 이익이니, 그 딴말을 들을 때마다 보통 역겨운 게 아니야. 10퍼센트를 올리면 스탄다비아 입장에서 겨우 본전이야. 어차피 우리가 벌어야 할 돈은 네놈들과 프라인과 아드리온에 모두 들어갈 텐데, 겨우 이걸 거래 조건이라고 가지고 온 거야? 웃기지도 않는군. 겨우 이따위 소리를 하려고 온갖 개폼을 다 잡은 건가? 제법 분위기를 잡길래 뭔가 있는 놈인 줄 알았더니, 길가에 널린 돌멩이 같은 놈이었군.”
자포리자는 하인스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신랄하게 이죽거렸다.
상인은 절대 어떤 경우에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
그들이 거래에서 드러내는 감정은 모두 유리한 계약을 맺기 위한 하나의 연기일 뿐이다.
하지만 하인스는 자포리자의 비난에 얼굴이 차츰 붉어져 어느 순간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달아올랐고, 그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우리가 이대로 스탄다비아를 빠져나가면, 영주님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어찌 됐건, 우리가 가지고 오는 여러 물품 때문에 영지민들의 생활이 더 편리해졌잖습니까? 실질적인 이득을 말씀하시는데, 농사를 짓거나 사냥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도 분명 커다란 이득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인스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영주님은 영지민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 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정도만 돼도 충분히 거래할 이유이지 않습니까? 설마 앞에서만 영지민들을 위한다고 하고 뒤에서는 무시하는 그런 위정자는 아니시겠지요?”
그는 결국 선을 넘어 버렸다.
비누의 판매를 요청하러 온 자가 오히려 상대를 비난하고 헐뜯다니.
상인인 자신이 촌구석의 작은 곳의 영주인 자포리자에 계속해서 밀리자,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다친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그는 무리수를 던졌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