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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02화 (202/300)

[202화] 협박?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주를 생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 그럴수록 우리가 가지고 오는 물품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영주님이 비누의 거래를 끊은 거처럼 우리도 거래를 끊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스탄다비아에 생필품을 팔아 봐야 몇 푼 남지도 않거든요.”

마치 자신이 봐주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하인스의 태도에 자포리자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갔다.

“그리고 만약 이 자리에서 비누의 거래를 거절하신다면 앞으로는 모든 상인과 거래는 하실 수 없을 겁니다. 다시 비누의 판매를 재개한다고 해도 아무도 거래에 응하지 않을 겁니다. 처음부터 협상 없이 이런 식으로 비누의 거래를 다시 요청할 수 있었지만, 영주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먼저 머리를 숙인 겁니다.”

“…….”

“우리가 주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십시오. 자존심이 상한 것은 이해하지만, 순간의 치기로 스탄다비아의 미래를 망치실 만큼 멍청한 분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인스는 얼굴을 이죽거리며 건방진 수탉처럼 머리를 쳐들면서 자포리자를 눈 아래로 깔아 보았다.

이건 거래를 가장한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창과 칼이 동원되지 않았지,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의 비장한 분위기와 달리 되돌아온 건 자포리자의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허, 허, 허, 푸하하하하하하!”

자포리자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다 크게 웃었다.

이전부터 이런 경우를 너무 많이 당해 봤다.

힘 있는 자가 크게 베풀어 준다고 말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는 자포리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럴 때마다 하나같이 그런 자들의 모가지를 꺾어 버렸다.

“네놈이 오히려 나를 봐주고 있었다고? 이런 건방진 새끼.”

웃음을 멈춘 자포리자의 눈이 매서워졌다.

“네놈들이 우리의 목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제일 처음 비누를 거래한 상단이 있었다. 비누를 독점할 수도 있는 행운을 잡았지. 그런데 그 상단은 지금 존재하지 않아. 왜 그런 줄 아느냐? 나를 변방의 아무것도 모르는 영주라 무시하면서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 했거든. 바로 너희처럼 말이야.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을 거 같은가?”

자포리자의 질문에 하인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거래를 끊었지. 지금처럼 말이야.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어. 그 상단이 망했더군. 난 그저 거래를 끊은 것뿐인데 말이지. 그래서 궁금해서 알아봤더니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더군. 그놈이 비누를 담보로 아주 많은 일을 저질렀던 모양이야. 여기저기서 비누를 미끼로 투자금을 끌어다 쓰고, 뿐만 아니라 비누 거래해 준다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아주 유리한 계약을 했더군. 그런데 비누의 공급이 끊어졌는데 어떻게 됐겠어? 아마 상단주는 처참한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데?”

하인스는 순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포리자는 자신들의 약점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건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란 걸 깨달았다.

자포리자를 노려보는 눈빛에서 점점 독기가 빠져 갔다.

지금의 흐름을 끊고 새로운 이슈를 던져 분위기를 바꿔야 하는데,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얘져서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너희가 철수한다면 스탄다비아가 더 큰 손해를 입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기해도 좋아. 난 너희가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큰 손해를 입을 거라는 데 돈을 걸지. 크크크크, 너희와 거래하는 사람들은 나처럼 힘없는 사람이 아닐 거야. 그런 사람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어떤 보복을 당할지 궁금하군. 너희가 깔보는 우리는 워낙 못살아서 그까짓 물건이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어. 십수 년을 그렇게 살아왔거든.”

자포리자는 평상시 그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하인스의 얼굴이 똥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인스는 뭐라도 반박하고 싶었지만, 자포리자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와 가슴 깊숙이 박힌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비록 이 싸움에선 자포리자가 승리하긴 했지만, 하인스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만약 경일이 그의 뒤에 없었으면 억울하고 분했겠지만, 하인스의 말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포리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건, 모두 인벤토리에 들어 있는 수많은 식량과 물자들 때문이었다.

경일은 해성 길드와 계약을 하면서 엄청난 식량과 물자를 보냈다.

지금도 인벤토리에 새로운 물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프라인이든, 아드리온이든, 상인, 종교, 경일이 뒤에 있는 이상 모든 걸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자포리자의 신랄한 비난을 받은 하인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 이 자리가 이런 식으로 흘러갈지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자포리자의 말대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상인들이 은연중에 스탄다비아를 깔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장 결정적인 건, 자포리자가 이토록 똑똑한 사람인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거래하기 위해 상대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거늘.

그는 자신을 책망하듯 일그러진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이 피의 비릿한 맛으로 채워졌다.

변방의 이런 작은 영지에 이런 거대한 용이 웅크리고 있을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인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거래가 끊어진다면, 자포리자의 말대로 어마어마한 손해가 발생할 터.

결국, 그는 다시 한번 자포리자를 물고 늘어졌다.

그만큼 비누의 존재는 돈으로만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 이대로 상인들과 척을 질 생각입니까?”

하인스의 말에는 스산함을 넘어 살기까지 담겨 있었다.

“너도 대단하구나.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다니. 그 끈기는 내 인정하지. 신의를 아는 자였다면, 아마 크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좋은 머리에 비해 눈앞의 이익밖에 모르는 너의 작은 그릇이 운명을 결정했구나. 그래, 어디 한 번 말해 봐라. 경고하는데, 네가 지금 할 말은 미래에 아주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날 선 면도날처럼 자포리자의 말은 날카롭고 흉포했다.

자포리자는 말한 미래의 대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하인스가 속한 상단은 물론, 모든 상단과의 거래를 영원히 끊을 작정이었다.

순간, 하인스는 말을 하기가 망설여졌다.

자포리자의 경고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막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는 없다. 이미 나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꺼냈어. 이대로 물러난다면 모든 상인들이 나를 비난할 게 틀림없어. 아마 우리 상단도 나를 매장시키겠지. 내가 이 말을 꺼내든 말든 어차피 내 인생은 정해졌어. 내가 망하는데, 상단이 더 큰 피해를 받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야. 나를 위해서라도 마지막 시도를 해 봐야지.’

그는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조금 전에 그를 위해 자포리자가 해 준 말은 이미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하인스는 철저히 자신만을 생각했다.

“영주님, 스탄다비아에 들어오는 상단이 무려 열 개가량 됩니다. 이들의 힘은 절대 적지 않습니다. 똑똑한 분이시니 이 정도만 말해도 분명 알아들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말은 열 개의 상단이 뭉쳐 스탄다비아와 싸우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건방진! 쥐새끼밖에 안 되는 놈이 사자 흉내를 내는구나. 상단주도 아닌 기껏해야 지점장 놈이 뚫린 입이라고 주제도 모르고 막 나가는군. 당장이라도 네놈의 목을 베어 대가를 치르게 해 주고 싶지만, 그건 너무 과분한 배려인 듯싶구나. 좋다. 어디 네놈 마음대로 한 번 해 봐라. 과연 네놈이 그럴 힘이 있는지 보자꾸나. 아니지, 아니야 이건 이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야.”

화를 내던 자포리자가 갑자기 몇 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바뀐 분위기에 하인스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가 읽은 책에 의하면 굳이 적을 만들 필요가 없다더군. 음, 혹여나 내가 마음을 바꾸어 비누의 거래를 시작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열 개의 상단과 대적하는 건 네놈 말대로 나에게도 손해가 크니.”

자포리자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됐다!’

하인스는 자포리자의 달라진 말투에서 희망을 보았다.

이건 분명 긍정의 표시였다.

비록 거칠긴 했지만, 자신의 수가 분명 통한 것이었다.

그는 9회 말 투 아웃 역전 홈런을 친 거처럼 기쁘고 통쾌했다.

“하지만 말이야… 내가 귀족의 명예를 걸고 이거 한 가지는 약속하지. 로렌 상단과 비누의 거래를 다시 시작하면, 네놈의 몰락을 조건으로 걸 거야. 네놈의 상단이 과연 잘난 너를 지켜 줄지 궁금해지는걸?”

하인스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자포리자가 방금 한 말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괴롭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리고 가장 가슴이 아픈 건, 이 말로 인해 자신의 미래는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자포리자는 잔인하게도 희망을 주고 하늘 끝까지 올렸다가 강제로 땅바닥으로 처박아 버렸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마지막 자존심 때문에 자포리자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결국, 그는 머리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귀족의 명예를 건 이상, 앞으로 자포리자가 비누에 대한 거래를 다시 시작하더라도 자신은 이미 끝장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오히려 비누의 거래를 막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말이야, 협박을 하려면 좀 그럴듯한 것을 내세워야지. 상인의 담합? 하, 웃기지도 않군. 내가 너희 상단을 빼고 비누를 거래한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맨발로 뛰어올걸? 돈 몇 푼에도 회의 내용을 흘리는 것들이 단합? 하하하하하! 웃기지도 않아서. 꺼져라. 이제 네놈에게 나의 귀한 시간을 내 줄 이유가 사라졌군.”

자포리자가 크게 폭소하다 갑자기 지엄한 표정을 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순간, 하인스는 무릎을 꿇었다.

지금 그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건, 자신이 속한 상단주도 아닌 바로 자포리자였다.

“영주님,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저의 무례를 잊어 주십시오. 부디 여기서 나눈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해 주십시오!”

“하하하하! 넌 끝까지 쥐새끼 같은 짓만 하는구나. 당장 꺼져라!”

하인스는 결국 칼튼의 손에 질질 끌려 나갔다.

상인들은 거래에 실패하고 돌아온 하인스를 크게 책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갈 때는 온갖 큰 소리를 치는 모습에 거래 이익의 0.1퍼센트나 주기로 하지 않았는가.

상인들의 질타를 받은 하인스는 철저하게 자포리자의 잘못으로 몰아갔다.

자포리자는 분명 비누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고, 그럼 자신이 한 짓이 들통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인스는 상인들의 이름을 팔아 자포리자를 협박한 사실은 무조건 숨겼다.

모든 상인들이 거래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 건, 급해서 나온 그의 독단적인 발언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상단까지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로렌 상단은 자포리자의 말대로 그를 손절할 건 뻔했다.

그는 적당한 말로 둘러대며 머리를 숙이고 일일이 사과했다.

상인들은 그의 화려한 언변에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포리자가 그와의 회담 내용을 모두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과 영원히 비누 거래를 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했다.

깜작 놀란 상단들은 모두 로렌 상단으로 달려가 항의했다.

하인스 때문에 자신들까지 자포리자에게 찍힌 것이다.

로렌 상단은 하인스를 찍어 내 다른 상단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상단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로렌 상단은 많은 돈을 합의금으로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이 일의 원흉인 하인스는 죽지 않았다.

대신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평생 탄광에 갇혀 일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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