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결정은 본인의 책임
무려 5만 명이 움직이는 이주의 날이 정해졌다.
몬스터 숲의 몬스터를 토벌했다고는 하나, 몬스터들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금도 새로운 몬스터로 채워지고 있었다.
영지민들의 입장에서는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포리자는 굳이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을 따르지 않는 영지민을 걸러 낼 생각이었다.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면 전 영지민의 단합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굳이 자신을 따르지 않은 이들까지 품고 갈 생각도, 여유도 없었다.
영지민들도 스탄다비아를 노리는 세력이 많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잘 체감이 되지는 않았다.
오죽했으면 이주 날을 늦춰 달라고 하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빗발쳤다.
당장 프라인과 아드리온 둘 중 하나가 쳐들어와도 스탄다비아가 멸망할 판국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최대한 방어가 쉬운 옛 영지로 옮기는 게 최선이었다.
“자네는 어떡할 거야? 영주님을 따라갈 생각이야?”
“고민 중이야. 여기에 모든 재산이 다 있으니 문제지. 소문에는 여기 가만히 있는 게 훨씬 낫다는 이야기가 많더라고. 영주님이 옛날 영지에 자리를 잡으면 몬스터들이 그쪽으로 쏠릴 거라 하던데? 그럼 자연히 이곳은 몬스터의 침공에서 안전해질 거라고. 그리고 이번에 상인들이 더 좋은 조건으로 비누 거래를 요청했는데, 영주님이 일부러 거래를 끊었다더라. 그게 다 이주를 독려하기 위해서라던데? 필요한 물품을 못 사서 생활이 너무 불편해졌어. 아무리 그래도 상인들까지 몰아낸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어. 누구는 영주님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틀린 이야기 같진 않아. 그런데 이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척이나 불편해.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있는 이유가 모두 영주님이 노력한 결과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잖아. 영주님이 남을 사람은 남으라고 하지만, 그건 솔직히 배신이잖아. 이건 은혜를 저버리는 거라고.”
“그렇지…….”
“그리고 지금까지 영주님을 따라서 안 좋았던 적이 있었어? 괜히 여기에 남아 있으면 분명 다른 귀족이 들어올 거야. 영주님이 가르쳐 준 방법으로 농사도 잘돼서 좋긴 한데, 수확한 작물이 지금은 내 것이지만 내년에도 내 것이란 보장이 없잖아. 분명 새로 들어온 귀족이 세금을 무겁게 매기겠지.”
“그것도 그렇네. 새로운 영주가 세금으로 모두 걷어 가 버리면 옛날처럼 힘들어질 수도 있는 거네. 제기랄, 몬스터보다 더 무서운 게 귀족이야. 자네 말대로라면 영주님을 따라가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런데, 그게 또 그렇지도 않아.”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분명 영주님을 따라가는 게 나을 것 같이 말하더니. 사람 헷갈리게 왜 이래?”
자포리자를 옹호하던 남자가 의견을 바꾸니, 듣고 있던 남자가 짜증을 냈다.
“지금 영주님이 이곳을 떠나는 이유가 프라인과 아드리안과의 영지전 때문이잖아. 그리고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종교 연합이 쳐들어올 거고 말이지. 우리가 영주님을 따라나서면 언젠가는 그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마음에 걸려. 이곳에 남으면 최소한 그들과는 싸울 필요가 없는 셈이니까.”
“그래, 또 그런 면이 있었네.”
스탄다비아에 여러 소문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사실을 일부분 섞은 괴소문도 있었다.
이주를 위해 상인들을 몰아냈다는 둥, 몬스터가 새로운 이주지로 모두 모일 거라는 둥, 이주의 끝은 목숨을 잃는 거라는 둥.
자포리자를 따라나서면 분명 전쟁의 위험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주를 독려하려고 일부러 상인의 거래를 끊었다는 건 거짓말이고, 몬스터의 습격에 대한 것은 확실하지 않았다.
지금 소문에는 새롭게 이주하는 곳에 몬스터의 습격이 집중될 거라고는 하지만, 이건 닥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몬스터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곳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사실 이는 모두 상인들이 퍼뜨린 소문이었다.
비누의 협상이 결렬되자,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자포리자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자 퍼뜨린 유언비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 그래도 결정이 힘든 영지민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들을 망설이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곧 있으면 겨울이 온다는 사실이었다.
자포리자에게 신기한 능력이 있다곤 하지만, 이 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혹독한 겨울을 버텨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포리자는 소문에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자신이 새로운 길을 열어 둘 수는 있지만, 결정은 본인의 책임이었다.
이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지금까지 충분히 보여 줬다고 생각했다.
이제 공은 영지민들에게 넘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탄다비아는 격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 * *
스탄다비아의 이주 일이 다가올수록 경일도 바빠졌다.
이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무려 몇만 명이 한꺼번에 쓸 물자였다.
거기다 식량과 생필품만이 아닌 그들이 자립하는데 필요한 모든 물자를 공급해야 했다.
“확실히 거대 길드의 힘은 대단하구나. 무슨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느낌이야.”
해성 길드는 경일이 요구만 하면 그 즉시 모든 물품을 구해 주었다.
특히 대단한 건, 이 많은 물품에 대한 뒷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세금 관계까지 확실히 처리해 경일에게 넘겨주었다.
지금 경일의 눈앞에는 엄청난 양의 벽돌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벽돌이 사라져 갔다.
그 많은 벽돌이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네로님. 인벤토리는 한계가 없는 건가요?”
“아마 있겠지? 그런데 지금까지 인벤토리가 가득 찬 적을 본 적은 없어. 차원과 차원을 잇는 것이니, 아마 엄청난 크기겠지.”
“대단하네요. 지금까지 넣은 물품의 양이 적지 않은데…….”
“그건 네 상상력의 한계야. 내가 생각하는 인벤토리의 크기와 네가 생각하는 인벤토리 크기의 차이는 너무 많이 나니까. 이 정도 양이라면 난 아직 새 발의 피라고 생각하는데, 넌 이것만 해도 혹시 다 차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거고.”
“네로님 말씀대로라면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군요.”
“그냥 인벤토리 크기는 신경을 쓰지 말고 이용하기만 하면 돼.”
“저번에 이전 던전의 주인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럼 이 인벤토리도 이전 주인이 썼겠네요?”
“그렇지. 그건 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인벤토리가 이렇게 크니 혹시 이전 주인이 잊은 물건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가능한 이야기이긴 해.”
“그럼 어떻게 확인해야 하죠?”
“간단해. 스탄다비아를 보듯이 인벤토리를 본다고 생각하면 정보가 머릿속으로 들어올 거야. 그런데,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게 나을 거야.”
“그건 왜요?”
“인벤토리가 엄청난 크기라고 했잖아. 보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몰라. 있을지도 모르는 이전 주인의 물건을 확인한다고 그 많은 시간을 보내면 아깝지 않겠어? 그리고 만약 찾아도 도움이 될지 의문이기도 하고.”
“하긴, 그렇겠네요. 그냥 작은 호기심이었을 뿐이었어요. 사실 이게 중요하게 아니라, 지금 큰 고민이 있습니다.”
경일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뭔데 그래?”
그런 경일의 모습에 네로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전에는 돈이 없어 이런 필요한 물품을 구하는 것만 고민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필요한 물품을 모두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생기니, 또 다른 고민이 생기네요.”
네로가 경일의 어깨 위에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제가 어느 선까지 지원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현대의 문명을 아무런 필터링 없이 무조건 공급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걱정입니다. 그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이 뻔한데… 최대한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지원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만 현대의 문명을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 맞을지.”
“그건 내가 조언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이건 내게 허락된 권한을 넘어서는 문제라, 거기에 관해서는 충고를 해 줄 수가 없어. 이건 순수하게 네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야.”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에 침이 꿀꺽 넘어가며 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던전 수호신의 권한을 뛰어넘는 문제란 말에서 느껴지는 압박이 작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일은 최대한 그들의 삶을 지켜 주는 선에서 지원을 해 왔다.
비누나, 염색 기술은 아주 오래된 기술이라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큰 동요 없이 생활에 녹아들 수 있을 거라 판단했고, 실제로 사람들은 놀라긴 했어도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현대 문명을 전하는 것이 옳은 건지 꾸준히 고민했지만,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아니, 무의식적으로는 좋지 않을 거란 쪽에 무게를 두고 있긴 했다.
해성 길드와 계약을 하고 지금 보내는 물품들 대부분이 식량과 집이나, 방어 시설을 세울 수 있는 벽돌과 시멘트가 대부분이었다.
벽돌과 시멘트를 보내는 것에도 고민이 많았지만, 지금 사정이 너무 급해 어쩔 수가 없었다.
고민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스탄다비아가 발전하는 것이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급속도로 빠른 발전이 과연 맞는 것일까? 빠르게 발전한 만큼 그에 못지않은 큰 문제들이 생겨나겠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빠른 발전은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넘어서는 급격한 기술의 발달이나, 새로운 이념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실제 지구의 역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폐해라든지, 여러 이념의 대립으로 일어난 전쟁 등 그 예는 수없이 많았다.
그래도 지금 당장 답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힌트는 있었다.
그건 바로 지금까지 했던 지원의 결과였다.
그가 가르쳐 준 기술들은 큰 문제없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섞여 들었다.
그건 이 시대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는 증거였다.
‘그래, 기존의 방식대로 가자. 그들의 삶을 존중하면서 해치지 않을 범위에서만 최대한 지원하자.’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경일의 모습을 본 네로가 왠지 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현재 세보 길드는 침몰하는 배와 같았다.
너무 큰 빙하와 부딪친 덕에 그들의 능력으로는 수리할 방법이 없었다.
모든 돈줄이 말랐으니, 세보 길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는 올 스톱 상태였다.
가장 큰 문제는 소속 헌터들의 동요였다.
길드가 헌터들에게 지급해야 할 돈까지 경일에게 도둑을 맞자, 그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경일은 철저히 세보 길드 간부들의 재산만 털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세보 길드 모든 헌터들의 재산을 털고 싶었지만, 그건 시간상 불가능했다.
그리고 굳이 털지 않아도 서로 간에 균열이 일어날 건 불 보듯 뻔했다.
세보 길드의 회의실에는 경일에게 재산을 털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길드장과 부길드장, 그리고 각 팀의 팀장들이었다.
“이런 썅! 미리 대비까지 했는데, 왜 도둑놈 하나 못 잡는 거야?”
테이블을 내린친 문근철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살기등등한 눈동자가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압박했다.
그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김형성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일은 특히 김형성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의 집에는 숟가락 하나 남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어야 될 판국이었다.
김형성은 견디다 못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였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어떻게 알고 오는지 외출만 하고 돌아오면 싹 다 털려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