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똥 밟았어. 그것도 아주 큰 똥을
조금 전까지 이곳을 지배하는 이는 자신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것도 천적인 뱀을 마주한 개구리.
이제야 경일이 말한 것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정말 자신의 길드를 혼자 무너뜨린 것이었다.
이런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도둑질을 한 것은 모두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분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분할 틈이 없었다.
지금 당장 목숨이 위험한데,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겠는가.
‘씨발, 제대로 똥을 밟았어. 그것도 엄청난 똥을.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
맨몸으로도 잡지 못한 상대였다.
그런 그의 손에 검이 쥐어져 있고, 검기까지 일렁이고 있다.
문근철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함께 창끝이 조금씩 내려갔다.
“지구에서도 검기를 쓰는 헌터가 있다고?”
도망가려고 마음먹은 순간, 경일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는 속마음이 들킨 거 같아 순간 너무 놀랐다.
“아, 네, 그렇습니다.”
문근철은 얼떨결에 존대를 하고 말았다.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지금까지 깡다구 하나로 살아온 인생인데.
“하하하하, 한순간에 순한 양이 되어 버렸네. 하긴, 너 같은 양아치들은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더욱 비굴해지더라고. 희한하지 않아? 조금 전까지는 마치 왕이라도 된 것처럼 큰소리치던 놈이 말이야. 너 지금 네 표정을 한 번 봐 봐. 얼마나 추한지.”
경일의 기세가 변했다.
지금까지는 장난을 치는 악동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포식자, 그 자체였다.
이게 그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문근철은 경일의 모욕적인 말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다만, 마음 한구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속에선 이런 모욕을 받을 바에는 죽더라도 싸우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라고 강요했다.
스멀스멀 밀려드는 두려움과 목숨에 대한 집착에 의해 한 번 해보려는 마음은 차츰 옅어져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새 분함은 사라지고 경일의 동정만을 바라고 있었다.
창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고개가 꺾이고, 그의 눈은 바닥으로 떨어진 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상대가 완전히 굴복했습니다. 광산으로 이동을 원하십니까? (Y / N)]
경일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야, 핸드폰 줘 봐.”
문근철은 경일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핸드폰을 건넸다.
그의 손에는 수많은 감정이 묻어 있었다.
분노, 수치, 모욕, 망신, 부끄러움, 자괴감, 치욕.
경일은 곧바로 김형성에게 이곳으로 오라는 문자를 보냈다.
도둑에 관한 일이라고 했으니, 아마 총알처럼 날아올 것이었다.
“십 년간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반성할 기회를 줄게.”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런 게 있어. 조금 있으면 알게 될 테니,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마. 그리고 열심히 해. 만약 조금이라도 농땡이를 피우면 기간이 더 늘어날 거야. 그럼 잘 가.”
그 말을 끝으로 문근철의 몸이 희미해지더니 곧 사라졌다.
김형성은 연락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빨리 달려오는지 멀리서도 차의 거친 엔진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꽁지에 불이 붙었네. 하긴, 내가 특별히 더 신경을 써 줬는데, 당연히 저래야지.”
엔진 소리가 커질수록 경일의 만족도 또한 높아졌다.
끼이익!
김형성의 차가 길드장의 차 옆에 섰다.
얼마나 급했는지 차 문을 박차듯이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길드장님, 길드장님!”
김형성이 급하게 문근철을 찾으며 그의 차 문을 열었다.
그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차에 아무도 없자, 실망한 듯 차 문을 세게 닫았다.
“뭐지? 사람을 불러 놓고 어디 간 거야? 이거 궁금해 미치겠네.”
주위를 둘러봐도 길드장이 보이지 않자, 그는 버릇처럼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그는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강박적으로 계속 시계를 바라봤다.
“도둑이 누군지 많이 궁금한가 보지?”
그때, 어둠 속에서 경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김형성은 순간 혼란스러웠다.
분명 자신이 가장 궁금해하는 내용이긴 한데, 전혀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헷갈렸다.
“너는 누구지?”
김형성의 물음에 경일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 네놈은?”
생각지도 못한 경일의 등장에 순간적으로 눈동자가 커졌다.
“오래간만이지? 정말 보고 싶었어.”
경일은 십 년 만에 친구를 만난 거처럼 정겹게 말했다.
다정한 행동과 표정이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오싹한 느낌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네가 해성 길드랑 계약을 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네놈 하나 정도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도 있어.”
“쥐도 새도 모르게라… 내가 그 단어를 참 좋아하는데 말이야.”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네놈이 왜 여기 있는 거지? 길드장님은 어디 가고?”
“문근철은 떠났어. 좀 먼 곳으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정말 죽고 싶어? 내가 지금 기분이 많이 안 좋거든? 이제부턴 말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게 하는 게 좋을 거야. 경고했어.”
김형성이 눈이 파랗게 빛이 났다.
이건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노리는 눈빛이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나 보네. 처음 봤을 때는 고급 양복에 온갖 깔끔을 다 떨던 놈이 이제는 노숙자라고 해도 믿겠어. 그동안 거지새끼가 다 됐네. 네가 그런 모습이면 내가 너무 뿌듯하잖아.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망가졌네?”
“이 새끼가 미쳤나.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이렇게 씨부렁거리는 거야? 안 되겠다. 일단 좀 맞아야겠다.”
김형성이 참지 못하고 경일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 참, 너 변태라면서? 남에게 고통을 주고 흥분한다면서? 그럼 밑에 불근불근 힘이 들어가고 그래? 막 터질 거 같고? 참 살다 살다 별 쓰레기 같은 새끼가 다 있네.”
“이런 개새끼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경일의 말에 김형성은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에 프라이팬을 올리면 계란 후라이가 될 거 같이 불타올랐다.
그 누구도 자신의 치부를 이런 식으로 대놓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경일이 자신의 치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놀리자, 머리 쪽으로 온몸의 피가 쏠렸다.
“날 잡으러 온 헌터 새끼들이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하더라. 이미 소문이 다 난 거 같은데, 뭘 그리 부끄러워하고 그래? 희한하게 너 같은 변태 새끼일수록 더 아닌 척하고 다니더라. 고급 양복에 비싼 시계를 차고, 깔끔하게 머리를 빗고 다니면 변태처럼 안 보일 거라 생각해? 그럴수록 길드원들이 뒤에서 더 욕하고 다녔다더라. 보아하니 넌 몰랐던 모양이네. 변태 새끼가 눈치도 없으면 어쩌자는 거야. 하긴, 인간 백정도 아니고, 네가 생각해도 쪽팔리긴 하지?”
“썅! 이런 개 같은 새끼가! 죽어!”
김형성이 참지 못하고 주먹을 뻗었다.
주먹이 정확히 경일의 얄미운 입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뿌드득!
“아악!”
그런데 정작 주먹을 날린 김형성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아프냐?”
경일이 유들거리는 얼굴로 김형성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런 개새끼가?”
김형성이 으르렁거리면 왼손으로 오른쪽 팔목을 꽉 잡았다.
조금 전까지 단단하게 말아 쥐었던 주먹이 힘없이 덜렁인다.
경일이 날아오는 김형성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부딪친 것이다.
이 한 방에 그의 주먹 뼈가 부러졌다.
몇 개의 뼈가 손등을 뚫고 튀어나오려는 듯 피부가 볼록 솟아 있었다.
“내가 웬만하면 신체 건강하게 보내는데, 넌 안 되겠다. 듣자 하니, 사람을 난자하며 가지고 논다면서? 이제 입장 바꿔 너도 한 번 당해 봐야 공평한 거 아니겠어? 아니지, 네가 한 짓의 두 배는 당해야 공평하지. 내가 지은 죄에 비해 너무 가벼운 처벌을 내릴 뻔했네. 실수.”
경일이 비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김형성에게 다가가자, 겁에 질린 듯 김형성이 발을 끌며 뒤로 물러났다.
“너, 너 정체가 뭐야? 일개 분식점 주인 놈이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가 있지?”
분노로 달아올랐던 얼굴은 이제 없었다.
단 한 방에 김형성은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걸 알아차렸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놈은 숫제 괴물이었다.
몇십 년이 지나도 도저히 이길 자신이 안 드는 그런 천외천의 괴물.
본능이 곧바로 반응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상대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 댔다.
“이거 네 꺼지?”
경일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건, 김형성의 집 거실에 걸려 있던 그림이었다.
“어, 어떻게 이걸 네가? 그럼 네놈이 그 악랄한 도둑?”
“역시 한 방에 이해하네. 아까 너희 길드장에게도 이렇게 설명할걸. 말로 했더니 통 믿지를 못하더라고. 내가 설득하려 애를 좀 먹었지.”
“너 설마, 길드장님을 죽였냐?”
“네가 너희 같은 줄 아냐? 사람을 함부로 죽이게? 근데 넌 사람 새끼가 아니니까 살심이 좀 솟구치네. 바퀴벌레처럼 발로 밟아 죽여 버릴까?”
경일이 담배꽁초를 비벼 끄듯 발바닥을 땅에 문지르며 김형성을 노려봤다.
그 눈빛이 너무 섬찟해 김형성은 등골이 오싹했다.
“네놈이 분식점에 처음 와 나를 협박한 날.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밤에 잠이 안 와. 너무 분해서 말이지.”
“잠깐만, 잠깐만. 내가 사과하지. 내가 너를 잘 모르고 실수했어. 미안해. 한 번만 이해해 줘.”
“실수? 이런 미친놈이 어디다 대고 실수란 거야. 뭐, 이해를 해 줘? 그게 말 몇 마디로 용서받을 수 있는 짓이라 생각했어?”
퍼억!
“아아악!”
김형성은 경일의 발길질에 종이 인형처럼 날아가 자신의 차에 박혔다.
차가 구겨지며 그의 몸이 반쯤 차에 함몰됐다.
“욱!”
차에서 떨어져 나온 김형성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개처럼 엎드린 그의 입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잘못했어. 아니, 잘못했습니다.”
김형성은 갈비뼈가 몇 개 나갔는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한 채 다가오는 경일을 향해 비굴하게 빌었다.
경일의 다리라도 붙들고 빌 기세였다.
“아, 진짜 꼴 보기 싫은 놈이네. 넌 자존심도 없냐? 지 꼴리는 대로 온갖 짓은 다하고 다닌 놈이, 조금 불리하다 싶으니 꼬리를 내려? 넌 좀 오래 있어야겠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역겨움으로 가슴이 끓어올랐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역겨울 정도였다.
남들을 고문하면서 쾌락을 얻는 인간이.
지금까지 자신이 자행했던 고통에 비하면 새 발의 피보다 못한 아픔에.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아프다고 호소하며 동정을 바라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쳐질 정도로 꼴 보기 싫었다.
“그게 무슨…….”
경일의 알 수 없는 말에 의아한 눈빛을 보내던 김형성의 몸이 희미해졌다.
“이게 뭐야? 아악, 살…….”
김형성의 겁먹은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마 살아서는 다시 지구의 땅을 밟기는 힘들 것이다.
“스탄다비아나, 여기나 해충이 끊이지를 않는구나!”
경일은 이곳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게이트를 열고 던전으로 들어갔다.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사라진 세보 길드의 앞날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만큼 빤한 수순으로 흘러갈 것이다.
* * *
드디어 선조의 땅으로 출발하는 이주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부터 영지민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여보, 혹시 빠진 거 없지?”
“어제도 확인했잖아. 얼마 되지도 않은 살림인데, 빠질 게 뭐가 있다고 남자가 그렇게 호들갑을 틀어요.”
“그래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한 번 더 살펴봐.”
“알았어요.”
남편의 재촉에 아내는 눈을 흘기면서도 다시 한번 짐을 꼼꼼히 살펴봤다.
상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영지민들은 자포리자를 믿고 이주를 결정했다.
그는 정말 어려웠을 때부터 자신들과 함께한 영주님이었으니까.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