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이주
자신들이 굶으면 그도 굶었고, 작은 거라도 생기면 늘 나누어 주었다.
죽어 가는 영지를 세우려 누구보다 노력했고, 매일 누구보다 앞장서서 몬스터와 싸웠다.
그렇게 형성된 믿음은 매우 단단했고, 이 정도 계략으로 영지민과 자포리자의 사이를 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물론 이제 겨우 살 만해졌는데,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자포리자에 의해 일어난 일임을.
그런 그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주를 결정했고, 따르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굳건히 믿었다.
넓은 광장이 짐을 가득 실은 수레로 채워졌다.
거의 만 개가 넘는 수레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누구는 걱정스러운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도 하고, 누구는 두고 가는 것이 아까운지 연신 발을 동동 구르는 이도 있었다.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걱정스러웠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 가지 감정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바로 기대감이었다.
출발 시간이 되자, 자포리자가 나타났다.
커다란 말 위에 늠름하게 앉아 천천히 영지민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당당한 자태에 영지민들의 가슴에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희망이 빠르게 채워졌다.
“자포리자!”
누군가가 기대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를 연호했다.
“자포리자!”
“자포리자!”
“와아아아아아아!”
4만 명이 넘는 인원이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진정으로 자포리자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삶의 터전을 전부 버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상인들의 악의적인 소문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묵묵히 자신을 따라와 주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이들이 행동으로 직접 말해 주고 있었다.
자포리자는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뻗었다.
몸속에서 야생마처럼 날뛰는 뜨거운 열기가 검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의 롱소드가 마나로 타오르더니, 검 끝을 뚫고 나와 강렬한 검기가 형성됐다.
이 순간 느껴지는 강렬한 희열은 자포리자에게 새로운 경지의 문을 열어 주었다.
소드 익스퍼트를 넘어 소드마스터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안 그래도 긴 그의 롱소드가 검기가 합쳐져 마치 창처럼 보일 정도였다.
“검기다!”
“소드마스터!”
“영주님!”
“자포리자!”
“자포리자!”
“와아아아아아아아!”
자포리자의 위용에 영지민들은 환호했다.
이런 변방 중의 변방에서 왕국에서도 몇 없는 소드마스터가 탄생했다.
이건 엄청난 쾌거였다.
영지민들의 마음속에서 자부심이 차올랐다.
그와 동시에 일부 이주를 거부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보 같은 결정이라고 자신을 비웃던 그들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자포리자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가자, 영지민들의 자부심이 깃든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지옥과 같은 몬스터의 숲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포리자와 앞장서고 영지민이 그 뒤를 따랐고, 군데군데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함께 배치되었다.
영지민들 또한 지급받은 강철 창을 가지고 있었다.
고블린과 같은 하위 몬스터는 사람들의 행렬에 감히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끔 주제 파악을 못 하는 몬스터가 덤벼들긴 했지만, 자포리자의 롱소드가 한번 움직이자 그 즉시 반으로 쪼개져 피를 뿌리고 죽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행군이 이어졌고, 몬스터의 숲이 점점 어두움에 물들어 갔다.
“정지. 오늘 밤은 여기에서 쉬어 간다.”
자포리자의 명령에 여기저기서 불이 피어올랐다.
영지민들은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영지민들은 각자의 마차로 벽을 만들고 쉬었다.
짙은 어둠이 밀려들었지만, 영지민들이 피운 불로 인해 전혀 어둡지 않았다.
수색조에서 활동하고 있는 탄두스가 빠르게 다가와 자포리자에게 보고했다.
“오크의 무리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숫자는?”
“밤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 1,000마리 이상은 되어 보입니다.”
지금까지 겪어 본 적 없는 엄청난 숫자의 오크 떼였다.
이곳에 모인 인간들의 진한 체취가 오크들을 끌어들인 듯했다.
“칼튼.”
“충!”
“계획대로 너는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오크를 상대하라. 그리고 나머지 기사단은 오크를 마중하러 간다.”
“충!”
칼튼이 병사들을 모아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훈련이 잘된 병사들은 마차로 만든 벽 뒤에 자리를 잡고, 긴 창을 꺼내 오크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오크가 오고 있다! 모두 불을 밝혀라! 창을 가진 영지민들은 앞으로 나오고, 여자와 아이들은 안쪽으로 이동하라!”
칼튼이 돌아다니며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스탄다비아 영지민들은 확실히 강했다.
위험한 순간이 처했지만, 그들의 동요는 크지 않았다.
지시를 받은 대로 빠르게 움직이며 여기저기에 불을 피웠다.
어릴 때부터 몬스터와 끊임없이 싸우면서 자란 그들은 스탄다비아의 숨겨진 전사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영주를 믿었고, 영주가 나누어 준 무엇보다 단단한 강철 창을 믿었다.
이 창이 자신의 손에 있는 이상, 몬스터는 그리 무섭지 않았다.
그 순간, 자포리자 앞 공기가 가볍게 일렁였다.
그는 이 현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포리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경일을 기다렸다.
일렁이던 공간에서 곧바로 게이트가 나타났고, 경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인이시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이 큰일을 하시는데, 제가 당연히 도와야지요.”
경일은 이미 스탄다비아를 관찰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이 생기면 바로 달려 나갈 생각으로 갑옷까지 미리 입고 있었다.
그러다 정찰대의 보고를 듣자 곧바로 게이트를 열어 넘어왔다.
자포리자가 경일을 탈 말을 직접 끌고 왔다.
관리가 잘된 찐한 갈색 털에는 윤기가 흘렀다.
말은 멋진 근육을 자랑하며 가볍게 투레질했다.
“와, 정말 멋진 말이군요.”
경일이 탈 말은 자포리자의 말보다 더 컸다.
가장 좋은 말을 준비한 그의 성의가 그대로 느껴졌다.
가볍게 발을 놀려 말안장에 앉았다.
자포리자가 그 뒤를 이어 말에 오르자, 기사들도 말에 올랐다.
“축하드려요.”
경일이 자포리자가 소드마스터에 오른 것을 축하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오크 사냥을 시작해 볼까요?”
“알겠습니다.”
자포리자가 고개를 돌려 기사단을 강렬한 눈으로 한 번 바라보고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모두 진격하라!”
자포리자가 앞장서서 달리자, 경일이 그 옆에 바짝 붙어 달렸다.
기사들은 그들의 든든한 등을 보자, 사기가 크게 고취되었다.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앞장서고 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으랴.
오크 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엄청난 수의 붉은 귀화가 허공을 떠다녔다.
살기 가득한 오크의 눈이었다.
“우리의 앞길을 막는 건, 모두 베어 죽여라!”
자포리자가 크게 소리치며 말의 옆구리를 박차곤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를 중심으로 부챗살처럼 퍼져 경일과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쿠워어어어억!”
이들은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쇠를 긁는 듯한 끔찍한 오크의 함성이었다.
오크의 무리를 향해 스탄다비아의 기사단이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경일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가장 긴 창을 꺼냈다.
거의 5미터에 달하는 창이 그의 손에 쥐어지자, 오러가 피어나 파랗게 빛이 났다.
그리고 긴 창을 망설임 없이 오크를 향해 휘둘렀다.
서걱! 서걱! 핏잇!
창의 사정거리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베었다.
오크뿐만 아니라 굵은 나무도 여지없이 베어져 쓰러졌다.
“케에에에엑!”
숲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창뿐만 아니라 넘어지는 나무에 오크들이 깔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경일이 앞으로 달려 나가며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처럼 창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경일의 손에 여러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창의 속도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소드마스터에 오른 경일에게 오크는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두부와 같이 가볍게 썰릴 뿐이었다.
놈들은 몸과 다리가 분리되어 죽어 갔다.
자포리자가 특별히 준비한 말답게 오크들의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달렸다.
오히려 마음껏 달리는 지금이 즐거운지 말의 몸에서 흥분이 느껴질 정도였다.
경일이 지나간 곳엔 오크의 시체와 피로 뒤덮인 길이 생겨났다.
“키에에에엑!”
쿵, 쿵, 쿵!
오크의 비명과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자포리자의 무위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경일보다 소드마스터의 경지는 늦게 올랐지만, 평생을 수련하고 싸워 온 경험이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소드마스터가 된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마치 오래전에 경지에 오른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나를 운용하고 있었다.
자포리자의 길고 묵직한 롱소드가 오크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오크 중 특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오크 전사도 자포리자의 롱소드 앞에서는 일반 오크와 다를 바 없었다.
오크 전사가 다른 오크에 비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포리자 앞에서는 그저 한낱 벌레일 뿐이었다.
당연히 경일과 자포리자의 등을 쫓아가는 기사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왕국 기사단도 받지 못할 대우를 받았으며, 자신이 모시는 주군은 소드마스터이며 선인과 연결이 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미 오크보다 훨씬 강한 최상위 몬스터와도 목숨을 건 전투를 경험한 적이 있어 오크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결국 오크에게 남은 건, 수적 우위뿐이었다.
하지만 이 우위도 순식간에 깨져 나갈 것이다.
오크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는 한꺼번에 덤벼들기 시작했다.
경일이나 자포리자에게는 통하지 않았으나, 나머지 기사들에게는 제법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기사들이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오는 공격까지 막아 내긴 힘들었다.
텅!
오크의 칼이 기사의 몸을 강타했다.
힘이 좋은 몬스터인 만큼, 오크의 공격은 제법 매서웠다.
하지만 오크의 공격을 받은 기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공격한 오크의 목을 곧바로 날려 버렸다.
오크의 칼을 맞은 기사의 갑옷에는 약간의 생채기만 남아 있었다.
힘이 좋은 오크의 공격을 맞고도 기사가 멀쩡할 수 있던 건,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의 재료가 미스릴이었기 때문이다.
미스릴 갑옷은 오크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가볍게 막아 냈다.
오크의 칼은 갑옷을 강하게 때렸지만, 그게 다였다.
녀석의 강한 공격은 오히려 기사들의 사기만 올려놓았고, 안전이 확보되자 거칠 것 없이 공격을 이어 갔다.
“케에에에엑!”
“크어어어억!”
“크륵.”
“케에에엑!”
전장에서 들리는 것은 모두 오크가 죽어 가며 내는 단말마뿐이었다.
일부 오크들은 무리를 이탈해 영지민들을 노렸다.
본능적으로 강자를 피해 약자를 노린 것이다.
하지만 놈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몇만 개의 창이었다.
오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영지민들이 똘똘 뭉쳐 내지르는 창을 이길 수는 없었다.
영지들은 평소 두려워했던 오크를 쉽사리 죽이자, 희열과 함께 자부심이 차올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더 이상 당하기만 하던 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뭉치면 그 어떤 것도 이겨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같이 창을 내질러 오크를 죽인 옆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눈은 함께라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지고 소속감이 깊어졌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