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감히, 죽여 버리겠어
오크의 숫자에 비해 의외로 싸움은 금방 끝이 났다.
두 소드마스터와 기사단, 그리고 똘똘 뭉쳐 대항하는 영지민들을 상대하기엔 오히려 오크들의 숫자가 한참 모자랐다.
오크 무리와의 전투를 일방적인 승리로 끝낸 이들의 발걸음은 스탄다비아를 떠나올 때와 달리, 마치 소풍을 나온 것같이 가벼웠다.
이미 경일과 자포리자, 그의 기사단이 몬스터를 정리한 터라 더 이상 위협적인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빈 땅인 줄 알고 들어왔던 오크 무리만 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영지민들은 처음 출발할 때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평생 공포의 대상이던 몬스터 숲을 이제는 관광하듯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몬스터 숲은 아름다웠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강렬한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런 땅에 농사를 짓는다면 얼마나 잘 자랄까?
이렇게 비옥하니 매년 풍년이 들겠지.
그럼 우리 아이들이 배곯을 일은 없을 거야.
평생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어 왔던 영지민들의 눈에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듣기론 거대한 강을 끼고 있어 물 걱정도 없다는데, 마음은 벌써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드디어 영지민들은 선조의 땅에 도착했다.
협곡에 세워진 거대한 방벽의 위용에 놀라고, 이내 어릴 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듣던 땅에 발을 딛었다는 감격에 사로잡혔다.
살아생전 다시는 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경일은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닌 듯해서 자포리자에게만 조용히 인사를 건네고 던전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모든 영지민이 참석한 한 번도 유례 없던 거대한 잔치가 열렸다.
자포리자는 모든 영지민들이 배불리 먹고 남을 술과 고기를 지급했다.
곳곳에 불이 피워지고, 영지민들은 고기를 굽고 같이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이렇게 많은 고기는 본 적이 없었다.
영지민들은 이때만큼은 이주에 대한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든 영지민이 먹고 마실 고기와 술을 한 번에 내어 준 영주님인데, 앞으로 무슨 걱정이 있으랴.
이주에 대해 쓸데없이 걱정을 한 자신들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순간, 자신들과 반대의 선택을 한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 선택으로 그들은 자신은 물론, 그 자식들까지 힘든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술과 고기를 먹은 영지민들은 피곤했는지 금방 곯아떨어졌다.
비록 노숙이지만,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빨리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길.
* * *
스탄다비아가 이주에 성공하고 한시름 놓았다.
큰 걱정이 없어지니 기분이 좋은 날이 이어졌다.
“사장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손주아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경일을 보며 물었다.
“아니, 특별한 일은 없는데.”
“그냥 기분이 좋아 보여서요.”
“하하하, 주아 씨가 열심히 일해 준 덕분에 분식점 장사가 잘 돼서 그래. 늘 고마워하고 있는 거 알지?”
“아이참, 사장님도. 음식 맛이 좋아 잘되는 거지,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손주아는 손사래를 쳤지만, 고맙다는 말에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떡볶이를 먹으러 온 아이들과 놀다 보니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오늘 하루도 참 보람차게 보냈구나.”
기분 좋게 가게를 마치고 게이트로 들어가기 직전, 핸드폰이 울렸다.
처음에는 모르는 전화라 거절하려다 혹시 해성 길드에서 온 연락일 수도 있을 거 같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경일 씨죠?”
순간, 괜히 받았다는 후회가 들었다.
자신을 소개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상대부터 확인하는 모습에 기분이 나빠졌다.
경일은 기분이 나쁘다는 걸 확실히 티를 내며 되물었다.
“누구시죠?”
“거, 생각보다 목소리가 까칠하시네. 나 우해수 오빠인 우성범이요.”
핸드폰을 통해 거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어떤 자세로 전화하고 있을지 짐작이 될 정도였다.
최고급 가죽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고, 나머지 손에는 담배를 끼고 찰랑거리는 양주가 담긴 잔을 들고 있을 거 같은 느낌.
‘우성범? 이 사람이 나에게 무슨 볼일이지?’
생판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전화라 궁금증이 일었다.
“무슨 일입니까?”
경일은 오래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거참, 성격 한 번 급하시네. 전화로 이야기할 건 아니고, 일단 만납시다. 시간이랑 장소는 내가 따로 문자로 보낼 테니.”
우성범은 경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당연히 경일이 나올 거처럼.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어이가 없어 핸드폰을 내려다보는데 문자가 도착했다.
“미친.”
약속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는 문자를 보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진짜 우해수의 오빠 맞는 거야? 남매가 어떻게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지?”
경일은 자신에게 늘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우해수를 생각하자, 진짜 남매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우성범이 일방적으로 약속한 시각이 됐지만, 경일은 당연한 듯이 나가지 않았다.
그를 만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우해수와의 거래가 끊어진다고 해도 아쉬울 게 전혀 없었다.
약속 시간이 몇 분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려 댔다.
우성범이었다.
경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저 한두 번 하다 말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핸드폰은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울려 댔다.
“그래, 계속 전화해 봐라. 나야 안 받으면 그만이니. 대신 네 속은 많이 좀 답답할 거다.”
경일은 핸드폰을 아예 주방 한구석으로 치워 놓았다.
얼마나 전화하는지 두고 볼 심산이었다.
한창 바쁜 시간이 지나고 핸드폰을 보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부재중 전화를 무슨 300통씩이나.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하여간 돈도 많은 것들이 가만 보면 어딘가 한 군데씩은 꼭 고장이 나 있더라.”
그는 곧바로 수신 거부 목록에 전화번호를 추가했다.
* * *
“어라, 이 새끼가 나를 기다리게 하는 거야? 이거, 어이없는 새끼네.”
우성범은 경일이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단 일 분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전화했다.
하지만 전화는 통화 연결음만 들릴 뿐, 그가 기다리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삐 소리 이후 소리샘으로…….]
“이런 개새끼가!”
그는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걸었지만, 여전히 들려오는 건 기계음뿐이었다.
혹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경일의 까칠한 목소리를 생각하면 그럴 거 같지는 않았다.
분명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고 있는 거다.
당연히 받을 거라는 그의 생각은 유리가 깨지듯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바람맞고 거기다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씨발, 어디 한번 끝까지 씹어 봐라.”
눈이 크게 벌어지면서 흰자위가 드러난 것이 발작하기 일보 직전의 모습 같았다.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경일이 전화를 받지 않을수록 더욱 약이 올랐다.
별거 아닌 놈이 생각했는데, 그런 아무것도 아닌 놈에게 자신이 모욕당하자 치밀어 오르는 화가 주체가 되지 않았다.
“전화 받아라. 좋은 말로 할 때 전화 받아. 너 이번에도 안 받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번에도 경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런 개자식이! 나를 무시해!”
얼굴이 달아오름과 동시에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쳐 보지만,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우성범은 분노로 활활 불타올랐다.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붓듯이 마셨지만, 불타는 가슴은 식지 않았다.
“그래 어디 네놈이 언제까지 전화를 받지 않는지 한번 보자.”
그리고 다시 통화를 터치하자, 우성범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번 전화는 곧바로 음성 안내로 넘어갔다.
[지금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이런 미친 새끼. 지금 나를 차단한 거야? 하~ 내가 이런 꼴을 당한다고? 일게 분식점 사장 나부랭이가 던전 자원 좀 공급한다고 눈에 봬는 게 없다 이거지? 그래, 내가 어떤 놈인지 똑똑히 보여 주지.”
살아오면서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해성 그룹의 외아들인 자신을 무시한 건, 해성 그룹을 무시한 것과도 같았다.
우드드드득!
손에 쥔 핸드폰이 점점 형태를 잃어 가더니, 결국 반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틀림없이 우해수, 그년이 시킨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그 하찮은 놈이 이런 간 큰 짓을 할 리가 없어. 내가 가만히 둘 거 같아? 내가 반드시 너희 연놈들을 씹어 먹어 버리겠어.”
그는 온몸이 분노의 불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으아아아아아!”
우성범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물건을 집어 던졌다.
벽에 맞은 와인 병이 깨지고 새빨간 와인이 흘러내려 새하얗던 벽지가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테이블이 쪼개지고, 의자에 맞은 벽이 시멘트 조각을 토해 냈다.
단정했던 머리는 산발이 된 지 오래였고, 그의 붉은 두 눈엔 핏발이 가득 차 있었다.
해성 그룹의 후계자는 원래 자신이었다.
외아들인 그는 어릴 때부터 그룹의 후계자로 자라 왔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제왕학을 교육받았으며, 미래의 자신이 해성 그룹의 회장이 된 모습을 늘 상상했다.
자신은 해성이라는 강력한 제국의 왕자였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보면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남들과 신분 자체가 다르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던 사건이 일어났던 건, 그의 나이 겨우 일곱 살 때였다.
재벌가의 자제답게 어릴 때부터 그에게 가정교사가 붙었다.
늘 단정한 옷차림에 머리카락 한 올조차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단단히 빗어 넘긴 머리, 안경 너머 쌀쌀한 눈을 가진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도련님, 이런 행동은 안 됩니다.”
“지금은 공부 시간입니다. 집중하세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안 됩니다.”
“안 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그에게는 가정교사는 가장 짜증나는 존재였다.
24시간 따라다니며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지적했다.
지금껏 하고 싶은 것은 모두 것을 하고 살았다.
원하는 것은 모두 가졌고, 하고 싶은 말, 행동,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했다.
그런 그를 지적하고 제지하는 그녀가 좋아 보일 리 없었다.
오늘도 그녀는 감정이 묻어나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로 그를 지적했다.
“똑바로 서세요. 제가 분명 말씀드렸죠. 이런 행동은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앞에 세워 두고 안 된다고 말하는 가정교사가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그는 참지 않았다.
충동을 억제하는 방법 따위는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배를 걷어찼다.
2층 계단 입구에 서 있는 그녀를.
가정교사는 휘청거리며 날다시피 계단을 굴렀다.
이리저리 부딪치고 계단 끝으로 굴러 떨어졌을 때는 그녀의 한쪽 다리가 처음 보는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우월한 사람이라고 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크게 혼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전혀 혼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 일로 인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건 아닌지 오히려 그를 걱정했다.
그 뒤로 가정교사를 본 적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일로 큰돈을 받자 오히려 감사하다며 여러 번 인사하고 떠났다는 걸 들었다.
그녀의 놀란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자신의 발에 차여 계단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그 얼굴.
늘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울먹이며 당황하던 그 얼굴이 뇌리에 그대로 박혔다.
옷에 작은 주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단정했던 그녀가 검정 치마가 말려 올라가 흰색 팬티를 드러내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그 얼굴만 떠오르면 웃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짜릿한 무언가가 지나갔다.
하루하루가 더 신나졌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