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10화 (210/300)

[210화] 좋은 생각

“국이 짜잖아.”

“죄송합니다, 도련님. 다시 끓여오겠습니다.”

40대 가정부가 곤란해하며 머리를 숙였다.

“아저씨는 왜 그 나이에 운전이나 하고 있어요? 싸구려 옷이나 입고? 근처에 가기만 하면 냄새가 나잖아요.”

“아, 네. 더 깨끗하게 다니겠습니다.”

50대 운전기사의 얼굴이 붉어진다.

학교는 더 재밌었다.

일진이든, 선생님이든 모두 자신의 눈치를 봤다.

돈 몇 푼을 쥐여 주는 것만으로 친구들은 자신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그럼 자신이 벌을 주면 됐다.

어릴 때 그 가정교사처럼.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친구들을 괴롭힐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것으로 우월감과 희열을 느꼈다.

그는 이 방면으론 누구보다 머리가 뛰어났다.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했다.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 많이 발생했고,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그럼 다른 방법을 쓰면 됐다.

어차피 돈 몇 푼이면 자신의 손발이 되어 줄 얘들은 널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암흑의 흑막처럼 뒤에서 사람을 조종하는 게 훨씬 더 재밌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도 사라지니 운신도 훨씬 편했다.

유일하게 자신에게 잔소리하는 부모님의 관심을 끌 일도 없었다.

누구에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모습을 훔쳐보는 것은 짜릿한 쾌감이었다.

열심히 공부할 필요도 없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최고의 엘리트들이 알아서 모든 걸 처리해주었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남들이 평생 노력해야 가질 수 있는 걸, 아주 쉬운 방법으로 가질 수 있었다.

세상이 너무 쉬웠다.

어디를 가나 대접받았고, 언제부턴가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한층 더 오만해졌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은 일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한 번씩 갑질 하는 재벌 2세로 신문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개돼지들이 할 수 있는 건 뒤에서 떠드는 것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아들은 자신 하나였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

결국에는 자신이 해성 그룹을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조용하게 지내던 배다른 여동생이 성인이 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신경도 쓰지 않았던 우해수가 후계자 싸움에 뛰어든 것이다.

처음에는 무시로 일관했다.

이미 회사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자신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아무런 기반도 없는 우해수가 도전하기엔 절대 넘을 수 없는 높고 커다란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모 입장에서도 아들인 자신을 제쳐 두고 배다른 여동생에게 그룹을 물려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우해수가 아무리 설쳐도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는 아주 달랐다.

능력과 끈기, 재능, 머리 무엇 하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는 승승장구했다.

맡은 일마다 대박을 터트렸으며, 결국에는 해성 그룹의 재계 서열까지 올려놓고야 말았다.

더군다나 각성까지 하면서 빠르게 고레벨 헌터로 우뚝 섰고, 그룹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해성 길드의 부길드장 자리까지 올랐다.

나이 때문에 부길드장을 맡았지, 그녀가 길드의 실질적인 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힘으로 후계자 자리를 성취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결과였다.

결국에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를 제외하고, 아버지는 물론 그룹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인정했다.

우성범은 뒤늦게 정신을 차려 봤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심장을 뜯어 갔는데, 그 누가 참을 수 있겠는가.

.

.

.

며칠 뒤, 우성범이 향한 곳은 시내 클럽의 VIP 룸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한 병에 몇백만 원 하는 양주와 샴페인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기분이 안 좋으면 특히 더 이곳을 찾았다.

이 클럽의 VIP 룸은 3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바퀴벌레처럼 다닥다닥 붙어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맛이 쏠쏠했다.

아래층에서 부러운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을 보고 있으면, 나빴던 기분도 금세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회장님, 무슨 일입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오길석이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우성범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곳이 앉아 우성범의 잔이 빌 때마다 빠르게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범성 기업의 사장이자, 범성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범성 기업과 길드는 우성범 개인의 돈으로 만든 곳이었다.

당연히 범성 길드는 손과 발이 되어 주었고, 범성 기업은 그의 비자금을 관리하며 늘려 주는 역할을 했다.

우성범의 힘의 기반이자, 앞으로 후계자 자리를 되찾기까지 많은 역할을 할 곳이었다.

“하~ 내가 어이가 없어서 말이야. 그년에게 후계자 자리를 뺏기더니, 이젠 별 거지같은 놈에게 치욕을 당했어.”

“감히 회장님에게! 어떤 놈입니까? 제가 직접 잡아다 제대로 손보겠습니다.”

오길석은 우성범의 입속 혀처럼 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길석은 우성범에게 붙은 뒤로 능력에 비해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절대 이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우해수, 그년이 새로 시작하는 사업 알지?”

“네. 헌터 장비랑 포션 생산에 뛰어들었다는 건 들었습니다. 기존의 시장이 워낙 빡빡해서 꽤 고전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 그동안 운이 좋아 승승장구하다 이번에 제대로 넘어질 거라 예상했지. 그 사업이 실패하면 그년의 입지도 당연히 좁아질 테고. 그럼, 그때를 노리고 내가 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우성범은 짜증이 나는지 독한 양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하필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일이 복잡해졌어.”

“네? 의외의 인물이라니요?”

“그래, 의외의 인물. 어디서 개떡 같은 놈이 나타나서 미스릴과 커미네스를 납품하는 바람에 다 죽어 가던 사업이 확 살아났어. 더군다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 물건이 최상급이라니. 하~ 이거…….”

답답한 마음에 우성범은 독한 양주를 또다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의 얼굴이 독한 양주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악귀처럼 찡그러져 있었다.

오길석은 그런 우성범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운이 좋은 사람은 못 이긴다더니. 그 덕에 이번에 최고급 라인을 새로 런칭 했잖아. 원래 후발 주자가 자리 잡는 게 훨씬 어려운 법인데, 다른 회사에 없는 최고급 라인이 알려지면서 사업 전체가 살아나 버렸어.”

그의 입가엔 어느새 허탈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하지만 가늘어진 눈에선 맹렬한 분노가 스쳤다.

오길석은 얼른 우성범의 기분을 읽고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한 번 누군지 알아보겠습니다.”

“이미 알아봤어. 내가 당하고 있을 사람은 아니잖아. 우해수, 그년이 하도 숨겨서 알아내는데 애를 먹긴 했지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지.”

오길석의 발 빠른 대처가 마음에 드는지 우성범이 약간 누그러진 말투였다.

“역시 회장님은 대단하십니다. 정보를 빼 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재빨리 오길석이 손바닥을 비볐다.

“그런데 말이야~ 그러다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오르더라고. 그년에게 제대로 엿을 먹이고, 그년의 성과를 내 쪽으로 가져올 방법이 말이야.”

“역시, 회장님 머리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 내가 좀 똑똑하지. 내가 생각해도 이번에 생각한 방법은 정말 좋았거든.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브레이크가 걸렸어.”

“네? 아니, 무슨…….”

“물건을 공급하는 놈이 감히 내 말을 거역했어. 약속을 깬 것도 모자라 내 전화까지 씹더군.”

“이런, 미친놈이! 그놈이 있는 곳을 알려 주시면 제가 단단히 버릇을 고쳐 놓겠습니다. 감히 누구에게 무례를 저지른 건지 제대로 가르쳐 주고 오겠습니다!”

오길석은 마치 자신이 당한 일인 것마냥 분노하며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흐뭇한지 우성범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나도 그러려고 했어. 오 길드장을 시켜 제대로 혼을 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놈이 물건을 납품하지 못하면 우해수, 그년이 곤란해지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날리는 거더라고. 그래서 이번에만 특별히 내가 참아 주기로 했어. 알아보니 거지같이 못사는 동네의 분식점 사장이더라고. 오 길드장이 직접 가서 정중히 그놈을 데리고 와. 가오 좀 살게 좋은 차를 가지고 가서 아예 혼을 빼 버리라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회장님, 굳이 어렵게 갈 거 뭐가 있습니까? 제가 가서 곧바로 잡아 오겠습니다. 회장님 앞에서 고개도 못 들 게 제대로 다져 놓겠습니다.”

오길석이 자신이 있다는 듯이 가슴을 탕탕 쳤다.

덩치가 크니 그 자체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오 길드장, 내가 그 양아치 근성 버리라고 했지? 당신이 삼류 깡패야? 이 사업이 얼마짜린 줄 알아? 그런 사업을 하는데, 사람을 납치해서 협박을 한다고? 이 일이 동네 조폭이 술집에 우리 술 넣으라고 주인한테 협박하는 일로 보여?”

그런 오길석을 향해 우성범이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쳐다봤다.

콧날에 잔주름이 일어날 정도로 잔뜩 찌푸린 눈살을 본 오길석은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일어서서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커다란 덩치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머리를 조아리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큰물에 왔으면 그에 맞게 행동해야지. 옛날 양아치 근성을 못 버릴 거 같으면 다 때려치워. 당신 말고도 할 사람은 널렸어.”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오길석이 다시 한번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빌었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얼굴이 우성범에게 보이지 않게 되자, 오길석의 한쪽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우성범은 이런 우월감을 좋아했고, 오길석은 그런 그의 성향을 이용하는 데 능했다.

“앞으로 잘할 거라고 믿는다.”

“더 잘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그럼 일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오길석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기껏해야 산동네 분식점 사장이니까, 그런 놈 하나 홀리는 건 문제도 아닐 거야. 우해수, 그년은 아마 접대라 해 봐야 식사나 했겠지. 오늘 예쁜 얘들 준비하고 단단히 일러 2차를 보내. 놈한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쾌락을 맛보여 주는 거지, 흐흐흐.

더러운 욕망을 잠깐 드러낸 우성범은 이내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본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큼, 더군다나 우해수, 그년보다 내가 돈을 더 주면 군소리 없이 계약하겠지. 그리고 그년이 새롭게 런칭 하려고 했던 최고급 라인을 우리 범성에서 만드는 거지. 그럼 상위 5퍼센트 헌터들이 줄을 서서 사 갈 거야. 고위급 헌터들일수록 자신의 장비에 돈을 아끼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리고 단지 판매에 그치지 말고 고위급 헌터들이랑 이번 기회에 친분도 쌓고. 그럼 앞으로의 사업에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잖아.”

“역시 회장님은 대단하십니다! 제가 내일 당장 가서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저녁 일곱 시까지 여기로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회장님!”

오길석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음 날, 상당한 크기의 세단 한 대가 산동네에 나타났다.

차의 전면부를 거의 덮은 은색 그릴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런 산동네에서는 물론 시내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의 고급차였다.

중압감을 뽐내는 차는 겉모양과 달리 움직임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씨팔, 동네 한번 거지같네. 길이 왜 다 이 모양이야?”

오길석은 혹시나 좁은 길로 인해 차가 상하진 않으려나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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