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화풀이
‘저 새끼가 또 지랄이야. 적당히 혼을 내줘야지. 아예 죽여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아직 양아치 근성을 버리지 못하니… 실력이 좋아 데리고 오긴 했는데, 계속 이러면 곤란한데. 이번에 제대로 혼을 내줘야겠어. 썅~ 이런 큰 거래를 말아먹다니.’
손 안에 거의 다 들어왔던 대어를 눈앞에서 놓치자, 우성범은 짜증이 치솟았다.
‘내가 먹지 못해 아깝기는 하지만 우해수, 그년 사업을 망친 것으로 만족해야 하려나… 오늘 이래저래 별 거지같은 것들 때문에 짜증만 나네. 오 길드장, 저 바보는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지금은 강한 놈보다 머리 좋은 놈이 옆에 더 필요해. 그나저나 오늘 이 짜증은 어떻게 풀지? 요즘 되는 일이 없어, 아오!’
우성범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와 동시에 오길석이 몸이 휘청이더니,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테이블을 덮쳤다.
와장창창창창!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비싼 양주가 쓰러지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우성범의 고급 양복이 술과 안주가 튀어 엉망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상황에 눈이 소 눈망울처럼 커졌다.
그 눈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오길석의 주먹이 빠르긴 했지만, 경일이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헌터의 강함의 뿌리는 마나였고, 마나는 그들의 의지에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하지만 마나를 그 무엇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마나 연공법을 익힌 경일이 마나의 발현을 알아차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주 정직한 공격이었다.
고개를 살짝 트는 것만으로 경일은 오길석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당연히 성공하리라고 생각했던 공격이 빗나간 것을 깨달은 오길석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 갈 때쯤, 경일의 주먹이 정확하게 그의 턱을 가격했다.
멋진 크로스 카운터였다.
그 순간, 그의 의식은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베어 낸 것처럼 끊어졌다.
곰같이 커다란 몸이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와장창창창!
곰같이 커다란 오길석이 널브러진 모습을 보던 경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성범을 노려보았다.
그의 행동은 마치 ‘너는 안 덤벼?’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길석보다 훨씬 약한 헌터인 우성범은 조용히 눈을 깔았다.
피식!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고 경일의 눈이 경멸로 물들었다.
우성범의 귀에 경일의 비웃음이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무너지는 자존심에 이가 빠드득 갈렸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경일은 바닥에 떨어진 양주병을 툭 하고 찼다.
병이 굴러가 우성범의 발에 맞고 멈췄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을 보여 주지 않았다.
마치 메두사의 눈을 보고 석화가 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병신 새끼.”
경일은 가만있는 우성범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VIP 룸을 나갔다.
우성범은 경일이 떠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씨팔아알~~!”
경일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우성범은 폭발했다.
꽝꽝꽝꽝꽝!
두 주먹을 움켜쥐고 단단한 테이블을 연신 내리쳤다.
테이블에 전달된 진동으로 인해 기절한 오길석의 몸이 들썩였다.
살아생전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우해수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 때보다 더 분할 정도였다.
“이런 개병신 새끼가! 오로지 강한 거 하나 믿고 데려왔는데, 저런 하찮은 놈 주먹 한 방에 기절해? 이 새끼야! 일어나, 일어나지 못해!”
우성범은 테이블 위의 얼음 통을 우길호의 얼굴에 끼얹었다.
얼음과 함께 녹은 물이 우길호의 얼굴에 쏟아져 내렸다.
“허억!”
피부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오길호는 정신을 차렸다.
곧바로 일어난 그는 곧바로 가드를 올려 다음 공격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에라이, 이 병신 새끼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신 안 차려? 아니야, 그냥 나가 죽어! 나가 죽으라고!”
우성범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길호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경일이 이미 떠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런 머저리 새끼라는 걸 알았다면 데리고 오는 게 아닌데. 너, 레벨도 나한테 거짓말한 거 아냐? 헌터계에서 알아준다는 새끼가 듣도 보도 못한 놈에게 한 방에 기절해?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너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네놈 때문에 지금 모든 일이 틀어졌잖아! 우해수, 이년이 이 일을 알면 분명 날 물고 늘어질 건데! 썅! 이 개새끼야!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예리한 칼날처럼 두 눈을 번뜩이며 그를 노려봤다.
우성범은 자신의 모든 분노를 만만한 우성범에게 모두 풀었다.
“죄, 죄송합니다! 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건 제가 약해서 당한 게 아니라, 방심해서 당한 겁니다. 처음에는 그 새끼가 헌터인 줄도 몰랐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너무 만만하게 보다 실수한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실수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깔끔하게 일 처리해 놓겠습니다. 던전 자원 계약까지 전부 말입니다.”
오길호는 얼른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우성범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이런 식으로 과장되게 머리를 숙이면 조금이나마 관대해지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이런, 병신 새끼. 잘 들어. 이번 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네 멱을 따 버릴 거야.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명심해. 마지막 기회야. 꼴 보기 싫으니 여기서 꺼져!”
우성범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오길호는 곧바로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고는 VIP 룸을 나섰다.
사회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상상도 못할 엄청난 범죄는 대개 특권층이라는 소수집단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는 특권 의식이 커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며, 결국은 자기 이외의 사람은 매우 하찮게 보게 된다.
그리고 특권 의식이 깊어질수록 범죄에 대한 죄책감 또한 사라져 간다.
한참 술을 들이붓듯이 마시던 우성범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 거야. 죽일 거야!”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저주를 퍼붓듯 중얼대는 우성범의 두 눈이 시퍼렇게 불타올랐다.
VIP 룸을 나서는 오길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 새끼가 비겁하게 기습을 해? 이런 비겁한 놈을 내가 가만히 놔둘 거 같아? 으윽!”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기에 그 충격이 더욱 컸다.
분한 마음에 말을 하다 턱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수십 개의 바늘이 턱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턱에 혹이 하나 달린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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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진아, 안 뺏어 먹으니 천천히 먹어. 모자라면 아저씨가 더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늘도 경일은 동네 아이들에게 음식을 챙겨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향해 방긋 웃어 주는 그의 얼굴이 어느 시점부터 순간순간 미세하게 굳어졌다.
‘하… 이것들이 또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하여간, 가만 보면 있는 놈들이 더 쓰레기라니까.’
경일의 예리한 감각에 불협화음이 느껴진 건, 오후에 막 들어서고부터였다.
분식점을 둘러싸고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인식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저들이 누군지는 금방 짐작이 되었다.
특히 이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향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보니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오길호는 클럽을 빠져나와 곧바로 길드원들을 소집했다.
지금 당장은 경일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다음 날 그의 분식점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혹시나 문을 닫고 잠수를 탄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경일은 평온한 얼굴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개새끼! 누구는 덕분에 똥줄이 탔는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장사를 하고 있네? 씨발, 가게에 사람들이 빠지고 나면 네놈 제삿날이 될 거야!”
이곳에 오기 전에는 혹시나 경일이 도망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우성범은 한다면 하는 놈이었다.
만약 경일을 잡아 오는 게 늦어지면, 그는 대신 자신의 목을 자를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막상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멀쩡하게 장사하는 모습을 보니, 그건 또 그것대로 분통이 터졌다.
분식점에 손님이 빠지길 기다리던 오길호는 한 번씩 경일이 자신을 향해 웃음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경일의 행동이 여러 번 반복되자, 그가 고의로 자신을 향해 비웃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뭘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어디 한 번 그렇게 계속 까불어 봐. 나중엔 피눈물을 흐르게 해 주지.”
오길호는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는 경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길드장님, 이거 아무래도 지금 쳐들어가는 건 힘들 거 같은데요.”
“이 새끼야, 나도 보는 눈 있어! 그런 것도 모르겠냐?”
그는 애꿎은 길드원에게 화풀이했다.
오길호는 경일을 잡기 위해 길드의 에이스를 열 명이나 데리고 왔다.
그러면서 혹시 있을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일이 시작부터 꼬였다.
이들은 분식점에 손님이 없는 시간에 곧바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분식점은 도대체 손님이 비는 시간이 없었다.
거리에 사람도 얼마 다니지 않는 산동네에 분식점만 계속 사람이 바글거리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결국 이들은 밥까지 굶어 가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분식점에서 마지막 손님이 나갔다.
남은 사람은 경일과 손호연, 이길호, 손주아까지 네 명이 다였다.
“길드장님, 지금이라도 덮칠까요?”
계속된 기다림에 지친 길드원이 물었다.
“이 새끼야, 대가리는 장식이냐? 조금 있으면 분식점 문을 닫을 거고, 그럼 저놈도 집에 갈 거 아냐.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목격자를 남기지 않을 수 있는데, 그 약간을 못 기다려서 안달을 부리고 지랄이냐?”
질문을 한 길드원은 작게 투덜거리며 제자리도 돌아갔다.
분식점의 불이 꺼지고 직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경일만 남았다.
혼자 남은 경일이 움직이자, 오길호와 길드원들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그래, 열심히 쫓아와 봐라.”
경일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뭐야? 야, 얼른 뛰어!”
놀란 오길호가 먼저 달려 나가자, 길드원들이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경일이 코너를 도는 모습이 보이고 오길호가 뒤따라 코너를 돌았을 때, 그는 제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 새끼가 어딜 간 거야?”
아무리 두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펴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코너를 돌자 눈앞으로 쭉 뻗은 도로가 펼쳐져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경일은 사라지고 없었다.
딱 3초였다.
경일이 코너를 돌고, 자신이 따라 코너를 돌 동안 걸린 시간이.
그 짧은 시간에 그는 귀신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거… 지금 내가 귀신에 홀린 거야? 어떻게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지?”
경일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우성범에게 얼마나 욕을 들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니, 욕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하다가는 진짜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허망하게 서 있는 오길호를 본 길드원들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일은 던전에 들어와 있었다.
던전의 게이트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자신이 귀신처럼 사라진 것으로 보일 터였다.
“그나저나, 귀찮게 됐네. 이번에 붙은 똥파리는 좀 큰데… 예전처럼 한 명씩 찾아가 광산으로 보내야 하는 건가? 그럼 우성범까지 처리해야 하는데… 음~ 이건 좀 곤란한데. 유명 인사가 갑자기 사라지면 사건이 너무 커질 거야. 그럼 나도 귀찮아질 수 있을 거 같은데… 뭐, 어쩔 수 없지. 일단은 두고 보는 걸로 하자.”
“뭘 두고 봐?”
던전에 먼저 와 있던 네로가 물었다.
“아, 그게 말이죠.”
경일은 우성범과 얽힌 이야기를 전부 풀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