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함정
“야, 그냥 가서 조져 버려. 시비를 건 놈일수록 확실히 조져 놔야지.”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하여간, 이 세계가 좋은 점도 많은데, 쓸데없이 복잡한 것도 많다니까. 저번 세상에서는 조져 버리면 다 끝났는데 말이야. 뭐, 내가 관심 가질 일은 아니고, 밥이나 먹자. 저번에 TV에서 보니까 묵은지 곱도리탕이 맛있어 보이던데.”
“아,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경일은 분식점 TV를 없애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묵은지 곱도리탕을 만들었다.
오길호는 귀에서 피가 나도록 우성범에게 욕을 들었다.
경일이 귀신같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댄다고 오히려 더 많은 욕을 들을 것이 빤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무능해서 경일을 놓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그 큰 덩치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빈 건, 큰 비밀도 아니었다.
“씨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해할 수가 없어. 숨을 곳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게 뻥 뚫린 곳에서 사라지냔 말이야! 내가 겪은 일이지만,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 그나저나 분식점 사장 놈을 빨리 잡아야 하는데… 잘못하다간 내가 모두 독박 쓸 거 같은데.”
그는 이를 갈며 다음 날 아침부터 분식점 근처에 자리를 잡고 경일을 노렸다.
출근길에 그를 납치할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허무하게 깨졌다.
경일이 출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온종일 밥까지 굶어 가며 분식점이 마칠 때까지 기다렸으나,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철수한 그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경일을 기다렸다.
하지만 경일은 계속해서 출근하지 않았다.
오길석은 약이 빠짝 올라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경일이었다.
“그래, 계속 기다려 봐라. 모르긴 몰라도 아마 피가 바짝바짝 마르겠지? 우성범, 그 새끼 완전 미친놈이던데, 그런 놈 눈 밖에 났으니 죽을 맛일 거다.”
게이트를 통해 지구로 온 경일은 오길호의 행동을 저 멀리서 모두 보고 있었다.
분식점은 그가 없어도 알아서 잘 돌아갔다.
새벽에 분식점 주방에 게이트를 열어 냉장고에 재료만 채워 넣고, 다시 던전으로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요리는 선호연이 하고, 손주아가 홀을 맡았다.
이길호가 주방과 홀, 두 군데를 오가며 일을 도왔다.
일주일이 지나자 오길호는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낄 정도로 반쯤 미쳐 있었다.
경일을 잡아 오라고 우성범은 매일 길길이 날뛰는데, 어디 보여야 잡아 오지 않겠는가.
수소문해서 경일이 사는 집까지 알아내 찾아갔지만, 사람이 사는 흔적이 없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게, 최소 한 달 이상은 아무도 오지 않은 듯 보였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건, 분식점을 지키고 서 있는 것밖에 없었다.
이미 우성범의 눈 밖에 났다.
당장 자신이 죽지 않은 건, 자신이 사라지면 이 일을 대신할 다른 사람을 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나마 몸이라도 성하게 쫓겨나려면 경일을 잡아 와야 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온몸에 쇠사슬을 칭칭 감고 바다에 수장될 게 빤했다.
헌터로서 자신이 아무리 강해도 우성범 정도의 권력자면, 자신 하나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힘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이 일이 우해수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우해수가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한다면, 우성범은 미친 황소처럼 날뛰었을 것이고, 지금의 기회도 없었을 터.
벌써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겠지.
“제발 좀 나타나라. 오늘이라도 나타난다면 두 대 때릴 거 한 대만 때려 줄게. 아니, 모든 걸 용서해 주지. 그러니 제발 좀 나타나라고!”
오길호는 오늘도 초조한 눈길로 분식점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망부석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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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에게 대접할 고기를 사러 시장에 온 경일에게 때마침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네, 사장님. 이예은 과장입니다.”
“아, 네.”
우해수의 비서였다.
경일과의 거래에서 실질적인 일은 모두 그녀가 처리했다.
“이번 물품 대금으로 요청하신 것들이 모두 준비가 되었습니다. 인수할 장소와 시간이 바뀌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네네. 그럼 그곳으로 시간 맞춰 가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저번보다 물품이 일찍 준비되어 다행이었다.
지금 스탄다비아는 선조들의 땅에서 새롭게 시작한다고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모든 물품이 부족했는데, 하루라도 빨리 보내면 도움이 많이 될 것이었다.
물품을 인수할 날이 왔다.
경일은 새롭게 받은 주소로 트럭을 몰았다.
식량과 자재를 쌓아 둘 큰 창고가 있는 곳은 대부분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 있었다.
시내를 빠져나오자 도로가 한산해졌다.
주소지로 도착하니 여느 때와 같이 큰 창고 건물이 몇 개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트럭에서 내려 창고로 걸어갔다.
그런데 창고에 들어가자 뜻밖의 인물이 경일을 맞이해 주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오길수였다.
“이런 제기랄, 함정이었나.”
“요 미꾸라지 새끼. 네놈이 언제까지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창고의 문이 닫히더니, 순식간에 스무 명 정도의 헌터들이 경일을 에워쌌다.
“이 새끼야, 또 한 번 도망가 봐. 저번에는 어떻게 도망갔는지 몰라도 오늘은 절대 못 빠져나갈 거다.”
매번 경일을 놓친 것이 분했는지, 오길호의 목소리는 바짝 날이 서 있었다.
그의 눈은 퀭한데다가,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볼살이 홀쭉해져 있었다.
‘하~ 이거 어떡한다.’
경일의 의외의 사태에 머리가 아파 왔다.
자신을 포위한 헌터들이 내뿜는 기운이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오길수까지.
클럽에서 한 방에 그를 눕힐 수 있던 건, 그가 실력이 없기보다는 방심한 이유가 더 컸다.
실제로 싸워 보면 저번처럼 쉽게 제압하는 것은 힘들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들 모두와 싸워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이트를 열어 도망갈까? 그럼 저들의 눈에 난 어떻게 보일까? 투명 인간? 아니면 텔레포트를 한 사람? 공기로 스며든 사람? 이건 좋은 선택이 아닌 거 같은데. 목격자가 저렇게 많은데 던전으로 도망갔다가는 전국에 소문이 날 거야. 그나저나 우해수의 비서까지 섭외해서 함정을 팠을 줄이야… 이거 제대로 외통수에 걸렸구나.’
경일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초조한지 한쪽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이쪽저쪽으로 곁눈질하며 틈을 찾았다.
하지만 자신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는 스무 명의 헌터들은 틈을 내주지 않았다.
경일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자 오길수의 기가 살았다.
“잘 들어. 넌 오늘 제대로 교육을 받게 될 거야. 내 생각에는 아마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킥킥킥!”
오길수가 경일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런데 네놈이 살 방법이 하나 있어. 순순히 던전을 넘기면 돼. 물론 던전의 값은 네놈 목숨이니, 거래에 불만은 없을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계약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건데,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한 건 네놈이니까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자, 어떡할래? 우리는 신사니까, 네놈의 의견을 존중해 주지.”
자신을 바보로 보는 것도 아니고, 살려 둘 리 없다는 것을 모를 거라 생각한 건가?
아니면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소리인가?
오길수의 어이없는 말에 무언가 결심한 듯 경일의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하~ 이것들은 도저히 안 되겠다. 힘이 있다고 사람 목숨을 무슨 벌레처럼 취급하네. 내가 인생의 매운맛을 보여 주지. 참고로 내가 웬만하면 교화를 목표로 했어. 그러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이대로 항복하면 한동안 사회랑 떨어져 있어야 하지만, 목숨에 지장은 없을 거야. 나도 지금 권주를 권하는 거니까, 잘 생각해.”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안 되겠다.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 뭔지 내가 똑똑히 가르쳐 주지! 일단 팔다리부터 꺾어 주마!”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협박을 해 대는 경일의 모습에 오길수가 발끈했다.
그는 경일을 노려보던 시선을 돌려 헌터들을 바라봤다.
“일단 적당히 조져 놔.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놓고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걸로 하지.”
오길수의 말에 흉흉한 기세를 뿌리면 헌터들이 다가왔다.
경일을 둘러싼 스무 명의 헌터가 내뿜는 기세는 날카로웠다.
스무 개의 무기가 경일을 노리고 있었다.
“분명 경고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거지? 그래, 한 번 해보자!”
경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에 날카로운 예기가 감도는 검이 생겨났다.
“이 새끼! 헌터인 것도 숨기더니, 스킬을 가진 헌터였나? 큰소리칠 만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바뀌는 것은 없어. 네놈이 어떤 걸 숨기고 있더라도 여기선 절대 빠져나가지 못해!”
오길수가 살벌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의 살벌한 눈빛이 장난스럽게 바뀌었다.
“넌 운이 좋구나? 이대로 너를 죽이려 했는데, 생각을 바뀌었어! 난 아주 관대한 사람이거든. 너 같은 인재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지. 그 대신 말이지…….”
그는 무언가 큰 은혜를 베풀어 준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목을 부러뜨려서 평생 침대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게 해 주지. 성질 같아서는 눈동자도 못 움직이게 만들어 버리고 싶은데, 그건 내가 방법을 몰라서 말이야. 아, 물론 병원비는 내주지. 네놈의 던전 자원을 사들인 값으로 말이지, 하하하!”
오길수는 이미 승부가 났다는 듯이 마음껏 승자의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패자를 조롱해 그가 지금껏 받았던 스트레스를 몇 배로 돌려주었다.
아무것도 없던 경일의 손에 검이 쥐어지긴 했으나, 오길수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길드의 모든 정예가 이 자리에 있는 이상, 신이 아니고서야 절대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경일을 제외한 모든 헌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경일의 옆, 텅 빈 공간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천천히 일렁인 것이다.
몇몇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허상이 아닌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보지만, 오히려 공기의 일렁거림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일렁거리는 공기의 중간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발이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다리가 따라 나왔고,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오길수는 물론 이곳에 있는 헌터들의 눈이 찢어지도록 커졌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헌터들이 알 수 없는 전율에 휩싸였다.
이런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공간이 일렁이고, 그 사이로 사람이 나타나다니.
모든 헌터들이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너무 놀라 몸이 굳어진 순간에도 믿을 수 없게도 여러 사람이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플레이트 메일에 투구까지 갖추어 쓴 약 서른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유난히 덩치가 커 보이는 남자는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헌터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경일을 포위하고 있던 대형을 풀고 오길석을 중심으로 뭉쳤다.
그렇게 두 무리의 대치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자포리자였다.
믿을 수 없게도 자포리자가 그의 기사단과 함께 지구에 나타난 것이다.
경일은 어느 날 자신이 스탄다비아로 갈 수 있으면, 자포리자도 지구로 넘어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경일이 스탄다비아로 넘어갈 수 있게 된 순간,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단도 지구로 넘어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혁명이었다.
혼자였던 경일에게 최고의 아군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