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16화 (216/300)

[216화] 다른 사람이 던전에 들어올 수 있는 조건

‘나름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헌터들인데, 그들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숨었다고? 던전을 두고 해외를 갔을 리는 절대 없을 것이고. 던전을 쥐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어 있을 놈들이 아닌데… 혹시 던전 속에 숨어서 자원을 채집하고 있는 거 아냐? 그래도 오길석까지 그런 노가다를 할 리 없어. 오히려 오길석은 새로운 거래처를 찾으러 다니고 있다고 보는 게 이치에 맞지.’

한두 명도 아니고 스무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 몸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숨었다는 사실이 자신도 잘 믿기지 않았다.

하루라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놈들이 벌써 보름째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다니.

‘혹시?’

“야, 핸드폰 줘 봐.”

“아, 네.”

기분 나쁜 예감에 그는 김행우의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설마… 아니겠지?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누군가에게 전화하면서도 절대 받을 수 없을 걸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가볍게 깨졌다.

“여보세요.”

핸드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일의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전화하셨으면 말씀을 하세요. 뭐야?”

경일이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는 소리가 우성범의 귀에 박혔다.

그의 손에서 핸드폰이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본 김행우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그는 손짓으로 김행우를 쫓아냈다.

방에 혼자 남은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이외에는 이 일을 설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그놈이 스무 명이나 되는 헌터를 이겼다고? 이게 가능해? 오길석도 만만치 않은 헌터인데다 스무 명도 전부 범성 길드 에이스였어. 그 정도 전력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헌터도 가볍게 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거 말고는 그들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우성범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설마, 내가 건들면 안 될 존재를 건든 건가?’

그와 함께 경일에 대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

.

.

“한참 바쁜데 누가 장난질이야.”

경일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요리를 시작했다.

“우리 왕자님, 잠시만 기다려. 아저씨가 맛있는 튀김 만들어 줄게.”

“네.”

“어휴, 귀여워. 우리 재준이는 날이 갈수록 잘생겨진다니까.”

“아저씨, 나는요?”

“우리 서후도 잘생겼지.”

“재준이보다요?”

서후의 기습적인 질문에 경일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곧 정답을 말했다.

아이들과 어울린 지가 언젠데, 이 정도 질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후도 재준이도 둘 다 똑같이 잘생겼어.”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서후가 실망한 듯 투덜거렸지만, 곧 다시 웃었다.

“자, 여기 만두랑 튀김.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모자란 거 있으면 아저씨한테 말하고.”

“네에.”

서후와 재준이는 한입이라도 된 듯 동시에 대답하며 맛있게 먹었다.

경일이 우성범을 내버려 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사회 유명 인사가 실종된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성범을 찾아가 바로 광산으로 보내 버리려다가 일이 너무 커질 거 같아서 일단은 참았다.

아무리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해도 해성 그룹의 직계가족이었다.

만약 그를 광산으로 보낸다고 해도 지금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그가 사라지면 우해수와의 거래에 지장을 받을 수도 있어서였다.

분명 자신이 우성범과 접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날 것이고, 그럼 한동안 거래가 끊어질 수도 있었다.

하루에도 스탄다비아에 엄청난 물자가 들어가다 보니, 절대 지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사람들을 살 곳을 마련해 주고, 100년 동안 버려져 있던 성과 방벽을 손봐야 했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를 상황에서 하루라도 빨리 보수를 마쳐야 만했다.

이 와중에 새로운 거래처를 찾아 물품을 공급받고 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안 그래도 지구보다 몇 배로 빠르게 시간이 흐르는 스탄다비아인데 1분 1초가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경일은 분식점을 마치고 순윤찬에게 가는 길이었다.

네로가 알려 준 키아노티의 재배에 성공했고, 수확까지 마쳤다.

처음 키아노티를 발견한 날, 그는 곧바로 채집해 손윤찬에게 가져다주었다.

손윤찬은 새로운 던전 고유 식물을 연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고, 연구 끝에 커미네스가 들어간 마나 포션의 효능보다 몇 배는 뛰어난 새로운 마나 포션을 만들어 냈다.

오늘은 재배한 키아노티로 마나 포션의 대량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것으로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빠른 시간 내에 실력을 더욱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네로님.”

“응?”

경일의 어깨에 영체화로 앉아 있던 네로가 대답했다.

“아까 보니까 네로님의 수염이 조금 자란 거 같아서요.”

“호~ 제법 눈썰미가 있구나. 그래, 수염이 길어지긴 했지. 확실히 지구의 음식이 좋아서 그런지 회복이 빨라.”

“네? 그 몸이 회복된다는 게 수염이 자라는 거였어요?”

“당연하지. 넌 뭐라고 생각한 거야?”

“전 네로님이 새끼 고양이 모습으로 나타나서 어른 고양이가 되는 걸로 알았죠.”

“내가 이 나이에 몸이 자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하긴, 이야기를 들으니 또 그렇긴 하네요. 그럼 다 회복되려면 수염이 얼마나 더 길어져야 하는 건가요?”

“여기서 1센티 정도 더 길어지면 정체되었던 던전이 다시 발전을 시작할 거야.”

“그럼 또 새로운 던전 고유 식물이랑 던전 금속도 발견될 수 있겠네요.”

“그래.”

“그런데… 네로님.”

“응?

경일의 뭔가 걱정이 그득한 기색에 네로가 궁금해했다.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있어요.”

“뭔데 그래?”

“사실 옛날부터 고민하긴 했는데, 그때는 혼자서 어느 정도 가능해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바뀌다 보니 아무래도 고민이 됩니다.”

“…….”

“요즘은 제가 농사는 거의 제쳐 두고 던전 고유 식물 재배에만 매달리고 있잖아요.”

“그래서?”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생산량에 한계가 있으니 걱정이 돼서요. 앞으로 스탄다비아 사람들이 강해지려면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할 텐데, 지금의 생산량으로는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네 말은 던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게 가능하냐고 묻고 싶은 거지?”

경일이 의도로 파악한 네로가 요점을 찔렀다.

“네. 게이트는 저에게만 보이니 한편으로는 불가능할 거 같은데, 자포리자 영주님이 실제 던전에 방문한 적이 있으니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거 같아서요. 그리고 실제로 영주님이랑 기사들도 지구에 오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오, 제법인데?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래, 불가능하지는 않아. 처음 자포리자가 던전에 올 수 있던 건, 너와 연결하기 위해 아주 짧은 시간 허락을 받은 거고. 던전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들어올 수 있어.”

“어떤 조건인가요?”

경일은 눈빛이 기대감으로 환히 타올랐다.

“너에게 영혼을 받칠 수 있을 정도의 충성을 가진 사람만 던전에 들어올 수 있어.”

던전이 워낙 중요한 곳이라 어느 정도 조건이 어려울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영혼을 받칠 정도의 충성이라니…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래도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자포리자와 이길호.

자포리자는 가능할 거 같았지만, 이길호는 불가능할 거 같았다.

현대인이 누군가에게 영혼을 받칠 수 있을 정도로 충성을 보여 준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자포리자 뿐인데, 스탄다비아 일만 해도 바쁜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경일의 속도 모르고 네로가 말했다.

“어때, 별로 어렵지 않지? 던전의 주인이라면 그 정도 조건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어렵지 않다니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살다 살다 영혼까지 바칠 수 있을 정도의 충성이란 말은 또 처음 들어 봅니다.”

네로의 태평한 말에 경일이 발끈했다.

“그때랑 지금이랑 시대가 같아요? 개개인의 인권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 사회에서 이런 조건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대체가 지금같이 문명이 발전한 세상에서 영혼까지 받칠 수 있을 정도의 충성이라는 게 애당초 말이 안 되잖아요. 조건을 조금 더 쉽게 만들어 주든지 아니면 요즘 시대에 맞는 거로 고쳐 줘요.”

경일은 황당하기까지 한 조건에 볼멘소리를 했다.

“어, 또 듣고 보니 그게 또 그렇네. 이렇게 문명이 발전한 세계에서는 조금 힘들 거 같긴 하네.”

경일의 말을 듣다 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좀 말이 안 되는 조건인 거 같았다.

지금껏 자신 있게 말하던 네로가 슬슬 경일의 눈치를 봤다.

불퉁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경일을 보고서는 그는 몸을 한 번 움찔했다.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야. 던전이 생겼을 때부터 있던 규칙이야.”

네로도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그럼 던전의 전 주인 중에 이 조건에 성공해 던전으로 사람을 불러들인 적이 있어요?”

경일은 머릿속에 강렬한 의구심이 떠올랐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아무리 옛날에도 불가능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그게 말이지…….”

네로가 말꼬리를 흘렸다.

그런 네로의 모습에 경일의 눈초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사실, 없었어.”

“네?”

경일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그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시도조차 못했다고 보는 게 맞아. 암던의 주인에게 너무 빨리 당해 버려서 말이지.”

“확실해요?”

경일의 네로의 말에도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 확실해. 그래도 내가 반신인데 거짓말을 하겠어?”

“어휴…….”

이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시도조차 못하고 당하다니.

‘아마 첫 던전 주인이 너무 쉽게 당하자 그 뒤로 암던보다 던전이 더 늦게 나타나고, 이런 게 반복되니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겠지. 나중에는 던전이 나타나는 시간이 너무 벌어져서 그 열세를 뒤집는 게 아예 불가능했을 거고. 내가 운이 좋은 거였네. 암던의 주인이 세상을 누리기 위해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으니까.’

경일은 지금껏 던전의 전 주인들이 하나같이 욕심만 많고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자, 그 뒤로 점점 더 어려워진 것이었다.

“이거 참, 그럼 어쩔 수가 없네요.”

네로가 말한 조건으로 사람을 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경일은 실망이 큰 듯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 말을 들어 보니 조건이 어렵기는 한데, 한 번 시도라도 해 봐. 혹시 알아?”

네로가 짧은 다리로 경일의 볼을 톡톡 건들이며 위로했다.

“시도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네로의 계속된 말에 거절하기가 힘들어 경일이 맞장구를 쳤다.

“간단해. 게이트를 보여 주면 돼. 게이트가 보이는 사람은 조건에 합격했다는 의미지.”

“네, 한 번 시도라도 해 볼게요.”

경일은 대충 대꾸하고 넘겼다.

저런 말도 되지 않는 조건에 들어맞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도 최선을 다해서 던전 고유 식물을 재배하고 있는데, 이걸로는 부족해. 잠을 더 줄여야 하나? 지금도 그렇게 많이 자는 건 아닌데…….’

경일은 굳은 얼굴을 한 채 포션 공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