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연금술사
“연금술사님, 저 왔어요.”
손윤찬의 연구실에 들어가며 경일이 인사를 건넸다.
“어, 그래. 어서 와.”
처음에 낯을 가리던 손윤찬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경일을 가족처럼 환영했다.
“오늘 온 건 다름이 아니라, 수확한 키아노티를 드리려고 왔어요.”
“오, 그럼 마나 포션을 많이 만들 수 있겠네.”
손윤찬에게 새로운 던전 고유 식물은 축복과도 같았다.
연금술사로서 새로운 포션을 개발한다는 것은 상당히 보람찬 일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포션을 만들 때와 다르게 스킬이 향상되는 속도도 빨랐다.
그는 경일과 같이하면서 허송세월했던 2년간의 세월을 거의 다 따라잡은 상태였다.
“혼자서 연구에 생산까지 하시려면 힘들지 않으세요? 저번보다 더 마르신 거 같은데.”
“괜찮아. 처음부터 이렇게 하기로 한 거니까. 난 아무런 불만 없어. 오히려 지금 너무 행복해. 내가 현존하는 최고의 마나 포션을 만들어 냈잖아. 그걸로 충분히 만족해. 힘들면 체력 포션 하나 마시면 되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버는 연금술사라도 나처럼 자유롭게 체력 포션을 마실 수는 없을걸?”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게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리고 주아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은 뒤로는 지금까지 잔병치레로 한 번 하지 않았어.”
“아니에요. 고급 인력에게 생산까지 맡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엉? 무슨 말?”
손윤찬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이제부터 연금술사님은 포션의 연구만 하시고, 생산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연금술사님이 원하는 분들과 같이하셔도 됩니다. 아, 물론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확실히 지급할 겁니다. 그리고 몇 분이 같이하시든 숫자는 상관없습니다. 저로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앞으로 마나 포션이 많이 필요할 것 같거든요.”
“정말 그래도 되겠어?”
손윤찬은 처음 조건과 다른 갑작스러운 제안에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기쁨이 차올랐다.
사실 바빠도 너무 바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건 주로 포션의 연구 개발인데, 포션의 생산까지 혼자서 하려니 벅찰 수밖에.
“그럼, 입 무거운 사람들로 구해야 하는 거지?”
경일이 이 모든 작업을 비밀리에 해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아닙니다. 일부로 소문을 내는 것이 아니면 상관없습니다. 연금술사님이 지금까지 너무 잘해 오셔서 소문이 나지 않은 거지, 사실 소문이 나도 벌써 났을 일이에요. 이전에는 제가 힘이 없어 숨길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지킬 자신이 생겼으니 원하시는 대로 운영하시면 됩니다.”
손윤찬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경일이 강해졌다는 말은 그에게도 기쁜 일이었으니까.
“마나 포션이 많이 필요하다니… 얼마나 필요한 건가? 대충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인원을 뽑을 수가 있을 거 같은데.”
“음~ 정확히는 말씀드리기가 곤란한데, 대충 한 달에 각각의 던전 고유 식물이 대충 500㎏ 이상은 될 거 같습니다.”
“그렇게나 많이? 설마 키아노티도 500㎏ 이상인 건가?”
“네.”
손윤찬은 방금 들은 것이 확실한 건지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지구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던전 고유 식물인 것만 해도 굉장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커미네스보다 몇 배나 뛰어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다달이 500㎏나 공급해 준다고 하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건 모두 네로가 오면서 생겨난 변화였다.
던전의 발전이 정체되어 있었지만, 네로의 지식 덕택에 지금까지 실패했던 던전 고유 식물의 재배에 성공하면서 수확할 수 있는 양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결과였다.
“그리고 연구소도 이사를 할 겁니다. 아무래도 저랑 가까운 곳에 있는 게 방비하기에도 좋아서요.”
손윤찬은 경일이 오늘 가볍게 얼굴이나 비추러 온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입에서 엄청난 소식이 계속해서 쏟아지니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 행복의 비명이 절로 나왔다.
“제가 연금술사님만 믿고 있는 거 아시죠?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이 최고입니다. 연금술사님이 쓰러지시면 이 모든 게 허사가 되니, 지금부터라도 밤을 새우는 등의 건강을 해치는 일은 삼가세요. 그리고 돈은 걱정하지 마시고, 연금술사님의 일을 덜어 줄 사람을 최대한 많이 뽑으세요.”
“그러다 누군가 기술이나, 레시피를 몰래 빼돌릴 수도 있지 않은가?”
“상관없습니다. 이번에 회사를 통해 제가 납품한 커미네스가 최고 등급이라는 확인을 받았습니다. 같은 기술과 레시피로 만든다고 해도 최고 등급의 던전 고유 식물이 아닌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 재료를 구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연금술사님의 한계는 여기가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앞으로 더 발전할 건데,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겠습니까?”
손윤찬은 경일의 극찬에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고용주가 자신을 이만큼 믿고 인정해 주는데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은혜를 갚을 길이 없었는데, 이렇게까지 날 믿어 주고 지원해 준다니. 정말 감사하네. 내 최선을 다해 최고의 포션을 만들어 내겠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연금술사님이 만드신 포션이 수십, 수백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이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경일은 손윤찬이 너무 큰 부담을 느낄까 봐 인류의 생사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자신이 만든 포션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밝혔다.
“좋은 곳에 쓰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어. 자네가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네. 내가 만든 포션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니, 이거 무척 기분이 좋군.”
“앞으로 새로운 마나 포션을 제외한 다른 포션은 일정량 형님의 이름을 걸고 시장에 유통할 생각입니다. 특히 형님이 개발하신 던전병 치료 포션은 기존의 던전 고유 식물 가격의 20분의 1로 책정되어 시장에 풀릴 겁니다. 그럼 던전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지금의 던전병 치료는 던전 고유 식물을 직접 먹는 방법뿐이었다.
연금술사들 중 어느 누구도 던전병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터 관련 포션이 더 개발하기 쉽고,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어서 벌어진 일이었다.
던전병의 종류마다 새로운 치료 포션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 숫자도 많았고, 참고할 만한 연구 자료가 아예 없으니 맨땅에 헤딩 하다시피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초기 자본이 얼마나 들어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상 경일처럼 많은 종류의 던전 고유 식물을 꾸준히 공급할 수 있는 던전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던전병 치료 포션을 만든 것은 맞으나, 이 모든 건 자네의 지시로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그런데 내 이름으로 시장에 나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더군다나 그렇게 싼 가격으로 공급하는 것도 모두 자네의 의지고. 그러니 당연히 자네의 이름으로 시장에 나가야 하네.”
“하하하,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음~ 뭐라고 하지? 그냥 운 좋은 부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가진 것들이 제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가 앞으로 나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형님이 지금까지 포션에 대해 최대한 숨겨 왔듯이 앞으로는 제 존재를 숨겨 주십시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경일은 진지하게 부탁하며 손윤찬에게 고개를 숙였다.
“허~ 참, 이거 사람 곤란하게…….”
큰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손윤찬은 오히려 겸연쩍었다.
평소 그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연금술사님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금술사님을 무시했던 연금술사 사회에 크게 한 방 먹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금술사님 같이 억울한 분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총대를 메고 앞으로 나서 주십시오.”
연금술사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는 말에 손윤찬은 혹했다.
기존의 성공한 연금술사들은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만들었고, 그들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나면 똘똘 뭉쳐 자라기 전에 싹을 아예 잘라 버렸다.
열정 페이를 강요하며 말도 안 되는 임금으로 사람을 부렸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였을 뿐이었다.
해성 그룹이라는 대기업을 뒷배로 가지고 있는 우해수도 던전 고유 식물을 구하지 못해 경일을 만나기 전까지 사업을 진행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가.
지금의 기득권 연금술사들은 단지 남들보다 빨리 헌터로 각성하고, 스킬을 얻었다는 이유로 모든 부를 독점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기득권을 깨부술 수 있다는 말에 손윤찬의 두 눈에 강한 의지가 일렁였다.
“이런 기회를 주어 정말 고맙네.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을 맹세하겠네.”
“하하하하, 아닙니다. 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연금술사님의 건강입니다. 혹시나 여기서 살이 더 빠지기라도 한다면 수아 씨를 여기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건 좀… 내가 앞으로 운동도 열심히 하지.”
딸의 잔소리가 두려웠는지 손윤찬은 경일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의외로 연금술사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정당한 페이를 지급하고, 노하우는 물론 개인 연구를 보장해 준다는 말에 연금술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경일에게 면접관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포션을 만드는 것을 잘 모른다면서.
이건 표면적인 핑계일 뿐이고, 자신을 믿고 있으니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펼쳐 보라는 응원이었다.
손윤찬은 한동안은 면접을 본다고 다른 일을 손도 못 댈 만큼 바빴다.
사람을 뽑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누구를 떨어뜨리는 게 죄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면접을 할 때마다 하나같이 절박한 심정을 담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뽑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원래 뽑고자 하는 인원보다 두 명 더 뽑기로 했다.
공간이 줄어들어서 일할 때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다들 충분히 이해할 것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실력 있는 사람들을 뽑았고, 썰렁했던 연구실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모든 여건이 갖추어진 만큼, 더 뛰어난 포션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터라, 늦게 각성한 것이 남은 인생에서 가장 큰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는구나. 이거, 하루하루가 즐거워 견딜 수가 없어. 이 나이에 이런 흥분이라니.’
손윤찬은 과거를 회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주아가 분식점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못마땅했었는데, 만약 그때 말렸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이런 기회를 주신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더 나은 결과물로 보답하겠습니다.’
새롭게 뽑힌 연금술사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연구를 하고 싶었겠는가.
그들에게 이곳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손윤찬은 열정적으로 일하는 연금술사를 보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그의 하루는 오늘도 보람차게 지나갔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