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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18화 (218/300)

[218화] 다시 시작하는 스탄다비아

던전의 비닐하우스에서는 잘 자란 던전 고유 식물들의 수확이 한창이었다.

“휴~ 이거,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네.”

“그러게, 게이트를 한 번 보여 보라니까.”

네로가 나뭇가지에 편하게 자리로 잡고 앉아 육포를 뜯으며 말했다.

“아니, 무슨 영혼을 바칠 수 있을 정도의 충성이라는 게 말이 돼요? 여기가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아니, 조선시대의 충신이라고 해도 영혼은 안 바칠걸요.”

“뭘 또 발끈하고 그래. 혹시나 해서 해 본 이야기인데. 내가 이야기했잖아. 이건 내가 만든 조건이 아니라고. 나도 조건이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하아~함.”

네로는 졸린 듯 하품을 하며 영혼 없는 대답을 이어 갔다.

얄밉게 들리는 네로의 말에 경일은 일을 하다 말고 그를 한 번 쏘아봤다.

‘확, 육포를 뺏어 버릴까? 아니야, 주아 씨한테 말해서 특제 고양이 사료를 먹이라고 해야겠어. 한 달 내내.’

“너 눈빛이 좀 음흉하다? 보아하니 무슨 음모를 꾸미는 모양인데. 안 그래도 내 수염이 조만간 다 자랄 거 같았는데, 확, 던전에 새롭게 발견될 던전 고유 식물 안 알려 준다. 아니다. 오늘 당장 광산 관리에서 손을 떼야겠어. 내가 하품이나 하고 있다고 놀고 있다 생각하는 모양인데, 진짜 노는 게 어떤 건지 내가 한 번 보여 줘?”

언제 졸았냐는 듯이 네로가 눈초리를 치켜뜨고 근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본 바탕이 워낙 귀여워 화날 때 표정이 더 귀여웠다.

어린아이가 토라진 모습이라고나 할까.

경일은 눈이 하트로 변할 거 같아 곧바로 고개를 숙여 표정 관리를 했다.

“제 눈빛이 음흉하다니요. 일이 힘들어서 잠깐 나온 표정이니 오해하지 마시고요. 어떻게, 육포는 괜찮습니까? 거래하는 식육점에서 특별히 부탁한 홍두깨살로 네로님을 생각하며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경일은 재빨리 대화 주제를 돌렸다.

“네로님도 보셨다시피 육포 만드는 게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나 네로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육포의 맛만 봐도 느껴지지 않습니까?”

“음~ 그래. 육포가 맛있긴 하네.”

경일이 입에 발린 소리로 네로를 꼬시자, 그의 표정에서 화가 사라졌다.

“오늘 저녁에는 양식으로 준비해 놨습니다. 심플한 요리이면서도 묵직한 느낌이 있는 스테이크입니다. 잘 익은 고기는 눈을 즐겁게 만들지요. 거기다가 맛있는 소스와 가니쉬를 곁들이면, 네로님도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큼, 그래. 그럼 나도 힘내서 광산 관리를 해야지. 확실히 문제 많은 놈들을 잡아 놔서 그런지 사건 사고가 매일 터져. 나 정도 되니까 관리가 가능한 거야.”

“아, 네. 그럼요. 역시 네로님이 최고이십니다.”

경일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두 손을 맞잡아 가슴에 대고 네로를 향해 웃어 주었다.

아주 간신이 따로 없었다.

‘칫~ 일을 안 하면 밥을 못 먹는데, 무슨 특별 관리를 해.’

네로에게 등을 보인 채 일하던 경일은 입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경일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이 네로는 그의 등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육포를 맛있게 뜯었다.

다음 날, 한참 바쁜 시간이 지나고 조금은 한가한 시간.

분식점에 이 동네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단정한 오피스 룩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손주아의 인사에 그녀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네. 저기, 사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네.”

그녀의 정중한 태도에 손주아는 곧바로 주방으로 갔다.

“사장님, 손님 오셨는데요.”

“알았어.”

한참 저녁에 쓸 재료를 준비하던 경일은 손을 씻고 홀로 나왔다.

그런 그를 향해 여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명함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우해수 부길드장님의 비서 이민영입니다. 기존의 비서가 그만두면서 제가 김경일 님의 업무를 처리하게 되어 인사차 찾아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일단 앉으세요.”

경일은 빈 테이블로 그녀를 안내했다.

“우리 분식점 차가 괜찮습니다.”

좋은 꿈을 꿀 수 있는 던전의 이름 없는 식물로 우려낸 차를 권했다.

전화로 할 수 있는 일을 직접 이곳까지 와 인사를 하는 걸 보면, 우해수가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기존의 비서는 나를 함정으로 내몰더니, 버티지 못하고 관둔 모양이군. 아마 믿었던 우성범에게도 버림받았겠지. 쯧쯧, 우해수 곁이 가장 안전한 장소였는데, 알아서 그 옆을 떠나다니. 조만간 한 번 들러야겠어.’

이미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상, 사람 찾기 스킬로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로써 그녀는 한동안 지구에서 사라져 광산에서 일하는 것이 확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거친 남자들과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테지만, 그건 경일이 염려할 바가 아니었다.

경일이 비서가 버림받았다고 짐작한 건, 우성범의 동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길석의 무리를 처리한 뒤, 또다시 무슨 일을 꾸밀지 몰라 사람 찾기 스킬로 한 번씩 우성범을 찾아갔다.

한 번 다녀간 곳에 게이트를 열 수 있으니, 그가 있는 곳을 한 번만 갔다 오면 그 뒤부터 우성범을 감시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경일이 살펴본 우성범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길석과 그 무리가 한날한시에 사라진 것에 그는 깊은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볼살이 쪽 빠지고 창백한 게, 이전의 혈색 좋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우성범은 경일이 전화를 받은 다음 날, 그의 동태를 확인하러 절대 입지 않을 거 같은 허름한 옷을 입고, 평생 한 번도 가 본 적도, 아니, 갈 생각이 없던 산동네로 직접 찾아갔다.

멀리서 분식점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장사하고 있는 경일을 보고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분명 경일이 창고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오길석의 무리와 그가 만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스무 명이나 되는 헌터는 사라지고, 저 새끼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멀쩡하게 장사하고 있고… 내가 정녕 건들면 안 될 존재를 건드렸던 건가?’

그 뒤로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을 정도였다.

우성범은 그 뒤로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주축 헌터가 스무 명이나 사라진 터라, 그가 세운 범성 기업과 길드는 올 스톱 상태였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해도 모자랄 판에 가장 중요한 인사가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범성 기업과 길드는 망했다고 봐야 했다.

자기 한 몸 챙기기도 벅찬 와중에 비서가 버려진 것은 당연했다.

우성범과의 연줄이 끊어진 비서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표를 내고 숨는 것밖에 없었을 터.

혼자만의 생각을 마친 경일은 이민영에게 필요한 몇 가지 물품을 부탁했고, 그녀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 * *

선조의 땅을 되찾은 스탄다비아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오고 가장 감격한 이는 역시 카스만이었다.

“영주님, 설마 제가 죽기 전에 이곳으로 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 늙은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선조님들이 이런 대업을 이루신 영주님을 저승에서나마 칭찬하고 계실 겁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앞으로 스탄다비아가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바뀌는지 제가 확실히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카스만 경도 제 옆에서 오래오래 같이 영광을 누리셔야죠.”

“그럼요. 영주님은 무조건 잘해 내실 겁니다. 이 늙은이가 모든 걸 똑똑히 보고 기억해서 저승에 계신 선조님들에게 분명히 전하겠습니다.”

자포리자의 단언처럼 스탄다비아는 하루가 무섭게 발전했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중요 거점의 방벽들은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 곳도 많았지만, 그 형태는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선조가 처음 방벽을 지을 때 얼마나 신경 써서 지었는지, 그들의 손길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사미르, 어떤가? 이 정도면 보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럼요, 영주님.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버티고 있어 놀랐습니다. 그리고 시멘트가 있으니 보수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건 물과 모래를 섞는 것만으로도 접착제가 되니, 짧은 기간 내에 완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직은 많이 불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서두르지는 말게.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 영지민의 안전이야. 그다음이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게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야.”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로부터 온돌방 등 지금까지 제가 건축한 것만 해도 얼마인대요. 영주님의 마음에 아주 쏙 들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래, 자네만 믿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하고.”

“알겠습니다.”

사미르의 지휘 아래 영지민들이 모여들었다.

자포리자는 이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지 않았다.

일에 대한 대가로 식량을 제공했다.

가우스 교의 높은 분들이 경일이 보낸 식량을 뺏기 위해 스탄다비아를 특별 관리 구역으로 지정할 정도였으니, 식량의 인기는 엄청났다.

매 끼니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은 영지민들이 자진해서 지원해 일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는 방벽의 공사는 거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큰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건 많은 힘이 들어가다 보니, 그만큼 위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크기가 비슷한 돌을 쌓아 그 사이에 잔돌을 넣어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 기존의 방벽을 쌓아 올리는 방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실수해도 위에 올린 돌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런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단연 시멘트의 존재였다.

“이야, 세상에 이런 것이 있을 줄은 몰랐어.”

이번 공사에 참여한 알루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그러게 말이야. 이게 이름이 시멘트라고 했나?”

“그래, 맞아. 시멘트. 이것만 있으면 어떤 것도 만들 수 있어. 이까짓 방벽을 수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시멘트에 돌을 올리는 것만으로 고정이 되니, 이보다 편리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이야. 그리고 벽돌이라는 것도 있으니, 옛날처럼 큰 돌을 쓰지 않아도 돼서 일이 너무 쉬워. 오죽했으면 공짜로 식량을 타가는 기분이란 말이지.”

“나도 그래. 일이 쉬워서 일당으로 식량을 타 갈 때 눈치가 보일 정도라니까. 더군다나 오늘은 고기도 나눠 준다던데?”

“고기? 그 맛있는 고기를 준단 말이야? 이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이는걸. 고기를 받으려면 오늘은 더 열심히 일해야겠군.”

“영주님은 천사야, 천사. 이번에 프라인과 아드리온에서 통행세로 얼마나 많은 돈을 뜯어 갔어? 그런 힘든 와중에도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이렇게 챙겨 주고 말이지.”

“하여간, 나쁜 놈들이 너무 많아. 우리는 지금까지 남들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는데 말이야. 앞에서는 온갖 잘난 척을 하는 높은 귀족들일수록 하는 짓을 보면 몬스터랑 다를 게 없다니까.”

“그렇게 말이야. 영주님이 이곳에 온 이유도 그놈들과 싸우기 위해서라잖아. 그러니 더 튼튼하게 지어야 해. 이게 우리의 목숨 줄이야 마찬가지야.”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곳으로 이주해 온다길래 걱정도 되고, 겁이 많이 났었는데, 역시 영주님을 따르길 잘했어. 강이 있어서 농사지을 걱정도 없고. 땅이 또 얼마나 기름진지 씨를 뿌리는 족족 자랄 거 같더라니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를 노리고 오는 놈들은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할 거야. 방벽을 보고 기가 죽을 놈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다 통쾌해지네.”

알루의 말대로 시멘트와 벽돌이 만난 방벽은 기존보다 더 크고, 더 단단한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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