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오판
자포리자는 경일로부터 무한정에 가까운 식량이 들어오고 있어 일단 농사일은 제쳐 두고, 적의 침입을 대비하는 일을 가장 먼저 실시했다.
상인의 왕래가 사라지고, 통행세를 걷을 수 없게 된 프라인과 아드리온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영지전밖에 남지 않았다.
왕국의 종교도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적의 침입을 대비하는 일이 가정 먼저일 수밖에 없었다.
강가에는 자포리자의 주도로 거대한 건물이 세워지고 있었다.
바로 배를 만드는 조선소였다.
넓은 강을 끼고 있으니 이제 모든 무역은 배로 통행하게 될 것이었다.
육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용과 인력으로 거래를 할 수 있어 무역이 시작되면 스탄다비아는 더욱 빠르게 발전해 나갈 수 있을 터였다.
텅, 텅, 텅!
사람들이 굵은 나무를 도끼로 내려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크고 곧은 나무는 많았다.
강철로 된 도끼가 커다란 나무를 잘도 쓰러뜨렸다.
경일이 보내 준 고철은 단순히 스탄다비아의 무력만 높인 게 아니었다.
무기뿐만 아니라 장신구, 농기구, 그릇 등 생활 전반에 두루두루 쓰였다.
낫, 호미 등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좀 더 쉽고 빠르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노동생산성이 크게 높아졌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의 기초가 될 것이었다.
잘라 낸 나무는 경일이 보내 준 배 설계도에 따라 가공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 누구도 배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만드는 법이 자세하게 적힌 설계도에 따라 배가 건조되어 갔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긴 했지만, 이것도 배를 만드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기존의 대장간보다 거의 열 배에 가까운 크기의 대규모 대장간도 같이 지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재련법으로 강도를 높인 철로 만든 무기를 팔 계획이었다.
무기와 관련된 것은 팔 생각이 없었으나 몬스터가 이곳의 가장 큰 적인 것을 안 이상, 무력을 올리기 위해 결정된 사항이었다.
모든 영지민들이 자포리자의 지휘 아래 영지에 꼭 필요한 시설부터 차근차근 만들어 나갔다.
병사들은 영지 주변의 몬스터를 처리하며 영지를 안정시켜 나갔고, 비누의 재료인 지방을 부지런히 모았다.
일부의 사람들은 염색에 필요한 여러 재료를 찾아 산과 들을 누비고 다녔다.
이제는 염색된 천을 팔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비누와 함께 염색된 천이 풀리면, 스탄다비아의 자립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스탄다비아는 말 그대로 자고 나면 변해 있었다.
벽돌은 방벽뿐만 아니라 영지민들의 집을 순식간에 만들어 냈다.
온돌을 베이스로 만든 벽돌집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자포리자를 진정으로 따르는 영지민들만 모인 만큼, 그들은 일치단결했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 만큼 스탄다비아는 더욱 빠르게 자리를 잡아 갔다.
이주한 지 두 달도 되기 전에 첫 번째 배가 건조되었다.
50명은 너끈히 탈 수 있을 정도의 큰 배가 강 위에 떠서 당당하게 위용을 내뿜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야. 스탄다비아를 노리는 적은 모조리 밟아 버리겠어.”
자포리자의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
.
.
세 마리의 말이 빠르게 질주했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말이 지나간 곳엔 먼지구름이 뽀얗게 피어올랐다.
가장 앞서 달리는 이는 프라인 영주 패드래건이었다.
연신 말고삐를 당기는 그의 얼굴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를 수행하는 양옆에 있는 기사들의 분위기 역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작은 마을이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촌장이 패드래건의 일행을 향해 빠르게 다가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그래, 게렉스 영주는 어디에 있는가?”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이장이 안내한 곳은 그나마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허름한 집의 더러운 대문을 본 패드래건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장이 눈치 빠르게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었다.
패드래건이 들어서자 게렉스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간단하게 목례를 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오래간만일세.”
거실의 중간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고급스러운 천으로 덮여 있었다.
패드래건보다 더 사치스러운 게렉스가 평민이 쓰는 더러운 의자에 앉을 리가 없었다.
허름한 집을 보고 기분이 상했던 패드래건의 얼굴이 의자를 싸고 있는 고급스러운 천을 보자 조금은 펴졌다.
둘은 의자에 앉았다.
“한잔하시지요.”
게렉스가 준비해 온 술을 내밀었다.
패드래건이 허름한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싸 보이는 잔을 들었다.
술이 잔을 채우는 동안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가 급하다는 듯이 다급히 달려온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크으~”
패드래건이 목이 말랐는지 단숨에 들이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이들은 스탄다비아에 모든 사람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고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급하게 자리를 마련했다.
얼마나 급했으면 평소라면 절대 오지 않았을 마을을, 지리적 거리 때문에 약속 장소로 잡았다.
스탄다비아가 이주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인과 아드리안에게 알려졌다.
상인 마차의 왕래가 사라지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거 참, 어이가 없군. 그놈은 진정 미친놈인가?”
패드래건은 혈압이 상승한 듯 얼굴에 열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게요. 설마 선조의 땅으로 간다는 핑계로 몬스터 숲으로 들어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자포리자는 우리가 영지전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기 싫어도 그렇지, 그 많은 영지민들을 현혹해 끌고 들어가 죽이다니. 세상에 그런 악마 같은 놈이 있을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자포리자가 영지민들과 함께 자살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몬스터의 숲은 그만큼 무서운 곳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몬스터의 숲이 확장되면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몬스터의 숲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영지전을 걸어야 했어.”
패드래건은 마치 자신의 살점이 뜯긴 기분이었다.
아니, 오른팔이 통째로 잘려 나간 거 같았다.
그에게 스탄다비아는 이미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비누의 값어치를 눈치챘고, 알리사의 영주 가문이 가지고 있던 마나 연공법이 자포리자의 손에 들어간 사실도 알아냈다.
거기다가 조사를 통해 그의 병사들이 특별한 강철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그것을 뺏으려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럴 때마다 의외의 변수에 발목이 잡혀 스탄다비아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실제로 패드랜건은 자신의 발목을 잡던 모든 변수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고, 이제 병사들을 끌고 쳐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포리자는 베르아스 왕국의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최악의 짓을 저질렀다.
“설마, 그놈이 그런 짓을 저지를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소문으로는 영지민들을 목숨보다 아낀다고 하더니. 5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몬스터 밥으로 만들지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게렉스도 속이 타들어 가긴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통행세 덕에 짭짤하게 수익을 올린 덕에 그동안에 쌓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포리자가 비누의 거래를 끊는 바람에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통행세가 당연한 듯 자기 돈으로 여겼고, 그 돈이 끊기자 크게 분노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모두 자포리자에게로 향했다.
그 역시 영지전을 준비하고 있던 터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온몸의 피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소식에 허탈과 실의에 빠졌다.
이들에게 스탄다비아는 마지막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의 통행세로 급한 불을 끄기는 했으나, 아직 문제의 불씨는 살아 있었다.
이제 불을 끌 통행세가 사라졌으니 불씨는 다시 활활 타오를 것이었다.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다 일어난단 말인가?”
“그러게요. 저도 눈앞이 캄캄합니다.”
패드래건과 게렉스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술이나 마시며 자포리자를 규탄할 뿐이었다.
“알리사와 스탄다비아 땅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글쎄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솔직히 지금은 여력이 없습니다. 땅에 관한 건 시간을 좀 두고 의논했으면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네. 서로가 힘든데 굳이 지금 땅을 가지고 싸울 필요는 없지.”
이들에겐 남은 건 알리사와 스탄다비아의 텅 비어 버린 땅뿐이었다.
보통 때라면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계륵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비누와 마나 연공법, 강철에 비하면 그깟 빈 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느껴졌다.
더군다나 두 영지가 모두 상황이 좋지 않은 터라, 알리사와 스탄다비아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옛날 같았으면 한쪽이 땅을 차지하려고 하면 억지로라도 막아야 하는 관계였지만, 광산의 개발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이들은 동맹과도 같은 관계로 발전했다.
이제 서로 대화가 가능해진 만큼, 땅을 가지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의 대책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지만, 그들로서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빈속에 그저 쓴 술만 밀어 넣을 뿐이었다.
그나마 같은 처지인 두 사람인지라 서로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약간의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애틋한 눈빛을 뒤로하고 이들은 헤어졌다.
이들의 심각한 오판은 스탄다비아에겐 커다란 행운이었다.
스탄다비아가 선조의 땅에 정착한 걸 알았더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영지전을 걸었을 것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약한 스탄다비아가 몬스터 숲을 뚫고 들어갔는데, 못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스탄다비아는 그 덕에 천금보다 소중한 시간을 벌었다.
몬스터 숲을 거쳐 자포리자와 영지민들이 있는 스탄다비아의 선조들의 땅까지 들어올 간 큰 이는 없을 것이다.
아니, 굳이 이곳까지 들어올 이유가 있는 사람이 없으니, 스탄다비아가 건재하다는 것을 들킬 염려가 사라진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스탄다비아는 이들의 오판 덕에 착실히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하나의 도시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벽돌로 지어진 튼튼한 집들이 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끼고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고, 생활에 필요한 여러 기반 시설들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도시처럼 복잡한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서 집을 짓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단지 외벽을 올리고, 공간을 분리할 벽을 만들고, 지붕을 덮고 온돌을 깔면 하나의 집이 완성되었다.
만약 온돌을 깔지 않았더라면 더 빨리 집을 완성했을 것이다.
이전의 스탄다비아와 달리, 반듯하게 지어진 집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자포리자를 가장 기분 좋게 한 것은 방벽의 모든 보수가 끝이 났다는 사실이었다.
일정 구간의 방벽은 벽돌과 시멘트로 새롭게 지어지기도 했다.
스탄다비아를 둘러싸고 중요 거점마다 세워진 방벽은 적의 침입은 물론 몬스터의 침입 또한 막아 줄 것이었다.
새롭게 지어진 방벽 위에 서서 자포리자는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스탄다비아는 아름다웠다.
자연에 파묻혀 있던 도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이 세계에서 가장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로 탈바꿈했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축하드리옵니다.”
카스만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일을 자포리자는 기어이 성공시킨 것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