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설마 게이트가 보여요?
영지민들이 머물 집이 모두 지어지면서 스탄다비아는 급속도로 안정되어 갔다.
대장간과 비누 공장, 염색 공장 또한 건설이 완료되어 활발하게 돌아가며 제품의 생산을 시작했다.
일부 영지민들은 새로운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렸다.
새로운 제련법으로 탄생한 단단한 농기구는 농사의 효율을 높여 주었고, 같은 노동량으로도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영지민들은 신이 났다.
100년 동안 묵은 땅은 무엇을 심든 간에 잘 자랄 거 같았다.
강에서 끌어온 물을 이용할 수 있게 되자 논농사가 가능해졌다.
땅을 갈아엎어 단단히 굳은 땅의 흙을 풀어 주고 잡초를 제거했다.
일일이 돌과 자갈들을 골라내고 자포리자에게 배운 새로운 이앙법으로 벼농사를 시작했다.
이제 자신들도 경일이 보내 준 천상의 맛을 내는 쌀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모습은 역시 조선소였다.
오늘도 조선소에서는 목수들이 모여 새로운 배를 건조하고 있었다.
이미 만들어진 큰 배가 강을 누비고 있었다.
배를 타 본 적이 없어 일부 병사들과 영지민들이 배를 모는 연습이 한창이었다.
앞으로 이 배는 스탄다비아에 생산된 물품을 싣고 무역을 시작할 것이다.
그와 함께 스탄다비아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고, 많은 이들이 강을 따라 이곳으로 올 것이었다.
경일의 엄청난 지원은 순식간에 5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을 넘어, 이 세계에 몬스터와 싸울 전진기지를 세운 것과 같았다.
자포리자는 병사들의 수를 더 늘렸고, 마나를 깨우친 이들의 신분을 따지지 않고 모두 기사로 받아들였다.
이번에 개발된 키아노티로 만든 마나 포션은 기사들의 마나를 빠르게 늘려 주었다.
처음에는 5만의 영지민을 이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곤 했는데, 이제는 이 정도 숫자의 영지민들로 이 땅을 채우기엔 부족해 보일 지경이었다.
모든 영지민들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며 성과를 만들어 내자 스탄다비아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와 함께 경일의 눈앞에 스탯이 늘어나고, 레벨이 올랐다는 메세지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 이어졌다.
네로는 분식점 앞에서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 손주아를 보고서는 늘 화를 냈다.
가장 바쁜 사람은 손윤찬이었다.
손윤찬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연금술사들을 모아 본격적인 포션 생산에 들어갔다.
이 정도 속도라면 조만간 던전병 치료 포션이 시장에 풀릴 것이었다.
“스탄다비아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고, 본격적으로 앞으로 치고 나갈 일만 남았구나.”
스탄다비아는 이제 자신의 노리는 적을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자포리자는 이 모든 것을 훌륭하게 극복해 냈다.
경일도 네로에게 이 세계에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스탄다비아의 성공적인 안착을 보고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암던이 어떤 일을 벌이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자신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건, 스탄다비아처럼 평소보다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가장 열심히 한 일이 던전 고유 식물의 재배였고, 그다음이 포션의 대량 생산을 준비한 것이었다.
앞으로 닥쳐올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매일 마나 연공법을 수련했고, 스탄다비아로 넘어가 자포리자와의 대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로의 시너지로 경일과 자포리자는 더 빠르게 강해졌다.
“아저씨.”
“건아, 어서 와. 미연이도 같이 왔네?”
“네, 안녕하세요.”
미연이가 이제 제법 숙녀답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봤을 때는 왈가닥이었는데, 아이들은 성장이 빨랐다.
하루만 지나도 달라질 정도였다.
경일에게 아이들이 밝게 성장하는 모습은 힐링, 그 자체였다.
만약 던전을 만나고 분식점 말고 다른 일을 했더라면, 지구가 몬스터에게 정복당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아로 어렵게 자란 그는 삶에 그다지 큰 미련이 있지 않았다.
처음 게이트를 발견하고, 그가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 그곳으로 들어갔다기 보다는 삶에 애착이 없는 이유가 더 컸다.
네로에게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이들이 바로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의 미래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안녕하세요.”
건이가 살짝 쑥스러워하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인사를 하면서도 손을 꼭 잡고 있는 게 둘의 사이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건이는 떡볶이랑 만두고, 미연이는 떡볶이와 야채 튀김을 주면 되지?”
“네!”
“네.”
입을 맞춘 듯 같은 타이밍에 대답을 했다.
자주 보다 보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외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경일은 얼른 앞 접시에 아이들이 시킨 음식을 담아 주었다.
건이는 떡볶이를 먹으면서도 미연이를 빤히 바라봤다.
가끔 입에서 양념이 흘러넘칠 때도 건이는 미연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건이야, 미연이를 왜 그렇게 보니?”
경일이 건이의 행동이 궁금해 물었다.
“미연이를 많이 보면 헤어지더라도 계속 떠올릴 수가 있잖아요. 그럼 집에서 밥 먹을 때도, 잘 때도, 다음 날에도 눈을 뜨자마자 미연이 얼굴이 생각나거든요.”
건이의 순수한 사랑에 경일은 한쪽 옆구리가 시리다 못해 동상이 걸릴 지경이었다.
‘나 참, 이제 아이들의 사랑이 부러워 미칠 정도라니.’
자신이 처지가 왠지 쓸쓸해지는 경일이었다.
“아저씨, 잘 먹었습니다.”
미연이가 다소곳이 인사를 하고 건이 손을 잡고 떠났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는 경일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마칠 시간이 됐다.
오늘은 이길호가 던전을 간 터라 세 명이서 마감을 했다.
“사장님, 수고하셨어요.”
“네, 누나. 내일 봐요.”
“사장님, 저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네. 주아씨도 잘 가요.”
선호연이 인사와 함께 먼저 나가고, 손주아도 곧 뒤따라 나갔다.
경일은 그녀들이 돌아간 걸 확인하곤 네로를 챙기고 문단속을 했다.
던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게이트가 열리기를 원했다.
그러자 경일의 눈앞 공간이 일렁이더니 하나의 원을 만들어 갔다.
곧 테두리가 파랗게 빛나는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그런데 네로와 함께 게이트를 들어가려는 순간, ‘헉’하는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손주아가 분식점 바깥에서 안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놀란 듯 입이 크게 벌어졌고, 눈이 앞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경일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하며 잠갔던 분식점 문을 열었다.
“주아 씨, 뭐 놔두고 간 거 있어?”
“네. 다이어리를 놔두고 가서…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저거 게이트 아니에요?”
경일이 너무 태연하게 물어보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다 얼른 자신이 본 게 맞는지부터 물었다.
“응? 무슨 게이트?”
경일은 순간 손주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허억! 설마 주아 씨, 저게 보여?”
자신 이외에는 절대 보일 리가 없는 게이트를 손주아가 봤다는 사실에 경일은 그녀와 똑같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보이죠. 저렇게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게 안 보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이럴 수가!”
경일의 목소리가 크게 격앙되었다.
그 모습에 손주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사장님, 제가 보면 안 되는 걸 본 거예요?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잖아요.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자신이 실수한 거라 생각한 손주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주아 씨 때문이 아니라, 어, 그게… 주아 씨가 게이트를…….”
당황한 경일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내일 모두 말씀드릴게요.”
경일은 일단 궁금해하는 손주아를 억지로 보냈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네로가 즐거운 듯 말했다.
“거봐, 내가 보일지도 모르니 주위 사람들에게 한 번 보여 보라고 했잖아.”
네로의 말에 경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하품이나 하면서 성의 없게 말하던 그가 아니었는가.
그랬던 그가 마치 자신의 성과인 듯 말하는 모습이 얄미웠다.
“아니, 영혼까지 받칠 수 있을 정도의 충성이라면서요. 주아 씨가 나를 그 정도까지 믿는다는 소리예요? 내가 주아 씨 아버님을 도와주긴 했지만, 겨우 그 정도로 그런 말도 되지 않은 조건이 충족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그게… 듣고 보니 좀 그렇긴 하네.”
네로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평상시 본 바로는 손주아가 경일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자신이 말한 조건에 들어맞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 그게 말이지… 이게 굉장히 오래전에 생긴 조건이거든.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조건이 바뀐 건가? 하긴, 신님이 이 정도 센스가 없는 분이 아니시지. 아마 시간이 흐르면서 그 조건도 그 시대상에 맞게 바뀐 거 같아. 신께서 바쁘셔서 따로 나에게 알려 주는 걸 잊으셨나 봐. 하하…….”
지금까지 한 번도 민망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네로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저에게는 이게 왜 네로님의 직무 유기한 걸로 들릴까요?”
경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네로를 쳐다보았다.
“하하하…….”
멋쩍게 웃는 그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쉬운 건 줄 알았다면, 더 빨리 게이트를 보여 줄 걸 그랬어요. 안 그래도 요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바쁜데 말이에요.”
“헙헙, 뭐, 지금이라도 빌리면 되지. 안 그래?”
경일이 한 번도 일을 도와주지 않았던 네로를 타박하자, 그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민망해했다.
다음 날, 출근한 손주아는 매우 궁금해하는 눈치인데, 경일은 저녁에 이야기해 주겠다며 그녀를 달랬다.
“형님, 누나, 오늘 다 같이 회식 한 번 해요. 할 말도 있고. 죄송하지만, 오늘만 수한이는 다른 분께 맡겨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길호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걸 알아채고 곧바로 대답했다.
장사가 끝나고, 경일이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테이블에 차렸다.
하지만 다들 음식을 먹기보단 긴장한 표정으로 모두 경일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나쁜 일은 아니니 긴장을 푸시고요. 자, 여기를 한 번 봐 주세요.”
세 사람의 시선이 경일이 가리킨 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곧바로 공간이 일렁이고 게이트가 나타났다.
“허억!”
“설마… 이거 게이트?”
“대에박!”
어제 한 번 본 손주아였지만, 그녀는 이길호 부부와 함께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길호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그의 얼굴은 매우 심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가 아는 게이트는 모두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놀란 이길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형님, 진정하세요. 설마 제가 여러분들을 위험하게 하겠어요.”
경일에 말에 이길호의 얼굴이 펴졌다.
그의 말 한마디에 위험한 게이트를 앞에 두고도 안심하는 걸 보면, 이길호가 경일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역시 주아 씨가 보인 거로 봐선 형님 부부도 보일 줄 알았어.’
경일은 천천히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그동안 궁금하셨을 거예요. 제가 던전 고유 식물을 어디서 구하는지. 사실 저는 저만의 던전을 가지고 있어요.”
이들은 경일의 말에 경악했다.
개인이 던전을 가지고 있다니, 그런 말은 생각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이 게이트가 원래라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최근 조건이 변했어요. 음, 왜 그렇게 됐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그저 그렇게 됐다는 것만 알 뿐. 제 짐작으로는, 저를 믿어 주고 제가 믿는 분에게만 보이는 거 같아요.”
경일은 굳이 이들에게 이 세계의 진실을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들에게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두 명은 일반인이고, 이길호는 아직 한참 발전해야 하는 헌터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