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22화 (222/300)

[222화] 스탄다비아의 부활

풍족한 땅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발전하는 스탄다비아를 보면서 자신이 이곳의 소속이라는 것이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자포리자는 병사의 수를 늘리고 영지민들에게도 일정 시간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새롭게 지어진 방벽에서 훈련하면서 유사시를 대비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지가 안정되자 자포리자와 그의 군대는 매일 몬스터 숲을 쓸고 다녔다.

선조들이 이곳 몬스터에게 쫓겨난 만큼, 이 일대에 수많은 몬스터가 있었다.

매일 수많은 몬스터와 실전을 치렀다.

약한 고블린부터 오크, 그리고 트롤까지 갖가지 몬스터들과 싸웠다.

이전 같았으면 상대도 하지 못했을 몬스터들을 향해 병사들은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몬스터가 강해도 스탄다비아 군대에게 속절없이 무너졌다.

한편 비누의 효과는 그 무엇보다 확실했다.

귀족들은 스탄다비아가 무너진 것에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비누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크게 실망했을 정도였다.

비누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물로만 씻던 옛날로 돌아가라는 건 악몽과도 같았다.

그러던 와중 다시 비누가 나타나자 소문은 빠르게 왕국으로 퍼져 나갔다.

탄두스가 묶는 여관에는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염색된 천은 단번에 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탄두스 경, 제발 우리와 거래를 해 주십시오.”

“우리는 무조건 다른 상단보다 비싼 가격에 사 가겠습니다.”

“우린 왕국의 제1상단입니다. 비누와 염색된 천을 독점 계약하고 싶습니다.”

머리를 숙이는 상단이 있는 반면, 머리를 꼿꼿이 세우는 곳도 많았다.

그들은 고위 귀족의 이름을 팔아 탄두스를 압박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가차 없이 거래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건 모두 자포리자의 명이었다.

그도 고위 귀족들과 척을 지는 행위는 스탄다비아의 미래에 있어서 좋은 것이 없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포리자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가는 것은, 베르아스 왕국을 더 이상 섬기지 않겠다는 의미가 깔려 있었다.

자포리자에게 국왕은 이미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에게 주군은 경일이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이 있는 지금, 더 이상 그들의 세계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염색된 천은 베르아스 왕국에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냈다.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염색된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자신을 과시했다.

이 사실은 아드리온의 게렉스 영주의 귀에도 들어갔다.

누구보다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그가 베르아스 왕국을 강타한 새로운 유행을 모를 수가 없었다.

“뭐라고? 지금 왕국에 엄청나게 유행하고 있는 염색된 천이 모두 스탄다비아에서 나온 거라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눈썹이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그렇습니다, 영주님.”

“아니, 스탄다비아는 몬스터의 숲으로 들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 만약 자네 말대로 스탄다비아가 살아 있다고 해도 물건을 옮기려면 이곳이나, 프라인을 지나갈 수밖에 없어. 그런데 아직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옛 선조의 영지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 영지가 큰 강을 끼고 있어 배를 이용해 물건을 유통하고 있답니다.”

“허~ 그럴 수가.”

여러 감정이 담긴 탄식이 게렉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상인은 게렉스의 감정은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 말만 했다.

“지금 왕국의 모두 상인들이 스탄다비아와 줄을 대려고 난립니다. 이번에 비누의 공급이 끊겨서 귀족들이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와중에 염색된 천까지 나왔으니, 상단의 높으신 분들이 직접 스탄다비아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와 거래하는 상단에서 샘플로 가져온 염색된 천을 보고 그는 눈을 떼지 못했다.

기존의 색깔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세계의 기술로 만든 천은 색깔이 엷고, 그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놓인 스탄다비아에서 생산된 염색된 천은 선명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색상을 내뿜고 있었다.

얼마 전 그가 비싸게 산 옷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더군다나 천을 빨아도 색깔이 잘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귀족들이 더욱 난리가 날 수밖에 없지요. 이게 우스갯소리 같지만, 연회에 가면 스탄다비아의 염색된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부류와 아닌 부류가 서로 나누어질 정도라고 합니다.”

“그럼 스탄다비아는 떼돈을 벌고 있겠군.”

“그럼요. 왕국의 모든 돈이 스탄다비아로 향하고 있다는 소리가 있을 정돕니다. 타국의 상인들까지 베르아스 왕국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알겠네. 거래에 대해선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이만 물러가게.”

“네, 영주님.”

상인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게렉스는 상인이 나가자 멍한 얼굴로 온몸의 힘이 빠져 의자에 기대듯이 몸을 뉘였다.

이 놀라운 사실에 잠시 그의 뇌가 정지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나갔다.

“여봐라, 얼른 말을 준비해라. 지금 당장 프라인으로 갈 것이다!”

얼마나 급했는지 게렉스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향해 큰 소리를 질렀다.

그는 곧바로 몇 명의 기사들과 함께 프라인으로 말을 타고 달렸다.

와당탕탕탕!

패드래건은 한창 업무 중에 복도에서 들리는 소란에 인상을 찡그렸다.

스탄다비아가 몬스터의 숲으로 사라지고, 그 뒤로 그의 기분은 매우 날카로워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에 작은 일에도 화를 냈고, 성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성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봤다.

그 뒤로 이곳은 쥐 죽은 듯한 고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일어난 소란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무슨 일…….”

버럭 화를 내던 그의 말은 노크도 없이 집무실에 들어온 누군가에 의해 끊어졌다.

순간 치밀어 오르려던 화가 방에 들어온 이가 게렉스임을 알아보고는 곧 의문으로 바뀌었다.

“하악, 하악. 영, 영주님.”

게렉스는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다짜고짜 패드래건의 집무실로 뛰어온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프라인 기사들은 감히 그를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스탄다비아가 사라지고 둘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

같은 아픔과 고민을 공유하고 있는 터라, 이들이 광산을 두고 그 오랜 시간 싸워 온 관계가 맞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아니, 게렉스 백작, 이게 무슨 일인가?”

평상시 누구보다 외모에 신경을 쓰던 그의 꼴은 엉망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먼지와 섞인 땟국물이 줄줄 흘렀고, 그가 늘 자랑했던 옷은 흙먼지로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하악, 하악, 그, 그게 스, 스탄다비아…….”

“스탄다비아? 이미 없어진 스탄다비아가 왜?

게렉스가 숨이 차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패드래건이 답답한지 그의 말을 낚아채 먼저 이야기했다.

“없, 없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두 눈을 크게 뜬 패드래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이걸 한 번 보십시오.”

호흡이 돌아온 게렉스가 내민 건, 상인에게 사들인 파란색으로 염색된 비단이었다.

“이게 뭔가?”

선명한 파란빛을 내는 염색된 비단을 본 패드래건은 내심 크게 놀랐다.

지금까지 이렇게 선명한 색을 내는 비단은 처음 보았다.

남자인 자신이 봐도 아름다울 정도니,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영주님, 지금 왕국에서 일어난 유행을 모르십니까?”

“뭐, 내 사정을 다 아는 자네니까 솔직히 말하지. 요즘 상황이 좋지 않아 중앙 정계 진출을 미룬 상태이네. 그래서 요즘 외출 자체를 하지 않아서 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다네.”

패드래건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으나, 이미 게렉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굳이 숨기지 않았다.

“지금 이것과 같은 여러 색깔로 염색된 비단이 나타나면서 귀족 사회가 난리가 났습니다. 권세나 돈 좀 있다고 하는 귀족들은 돈을 신경 쓰지 않고 염색된 비단을 사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연회에서 이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었냐 입지 않았느냐 따라서 무리가 나눠질 정도랍니다.”

“음~ 내가 봐도 훌륭하긴 하네. 이것에 비하면 기존의 비단이 쓰레기 같은 느낌이 들 정도군.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뛰어나구먼. 그런데 스탄다비아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염색된 비단 이야기는 또 뭔가?”

패드래건이 스탄다비아의 이야기를 순간 잊을 만큼 염색된 비단이 주는 충격이 강렬했다.

“그걸 만든 게 바로 스탄다비아입니다.”

“뭐라고? 정말 이걸 스탄다비아가 만든 것인가? 그럼 정말 스탄다비아가 몰락한 게 아니란 말인가?”

얼마나 놀랐는지 패드래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육중한 영주 전용 의자가 그의 다리에 밀려 넘어지며 ‘쿵’하는 묵직한 소리를 냈다.

“제가 조금 전에 없어진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설마 몬스터의 숲에서 살아남았단 말인가?”

“자포리자는 우리에게 보물을 주기 싫어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니라, 선조의 영지로 들어간 것이라 합니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했단 말인가? 그곳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그렇게 쉽게 뚫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

“저도 그 점은 의문입니다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게렉스가 탐욕으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패드래건을 바라봤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정말 중요한 건 스탄다비아가 있는 곳이 확인됐으니, 지금이라도 영지전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누와 천을 염색하는 기술까지, 이제 그곳은 최고의 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스탄다비아를 차지한다면 우리의 앞길은 탄탄대로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영주님도 힘들게 중앙 정계 진출을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여러 계파에서 알아서 모셔 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자네의 말이 맞군.”

“저는 영지전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스탄다비아로 들어가는 돈이 엄청나다고 합니다. 이대로 스탄다비아에게 시간을 줄수록 영영 그곳을 칠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왕국의 모든 시선이 스탄다비아로 몰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그곳의 위상이 커지기 전에 쳐야 합니다. 만약 자포리자가 비누와 염색된 천을 판 돈으로 용병이라도 모집한다면, 영지전을 할 기회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잔뜩 흥분해 지금이라도 스탄다비아에 쳐들어가자는 게렉스와 반대로 패드래건은 현실을 직시했다.

“물론 자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나, 최소한 그놈이 어떻게 몬스터의 숲을 뚫고 지나갔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들이 몬스터 숲을 뚫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의 무력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무작정 덤비다가 오히려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네.”

최대한 흥분을 누르며 패드래건은 신중하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저도 몬스터 숲을 뚫고 들어가 옛 선조의 영지에 자리를 잡은 것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포리자가 몬스터 숲에 들어간 것은 우리와의 영지전을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지 않습니까?”

“음…….”

게렉스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듯이 패트래건이 침음을 흘렸다.

“그 말인즉슨, 우리와 싸울 바에는 몬스터 숲을 들어가는 게 더 났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무력이 훨씬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장에라도 영지전을 걸어야 합니다. 이대로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낼수록 스탄다비아는 우리의 손에서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흐음.”

게렉스의 열변에도 패드래건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는 듯이 여전히 고심스러운 얼굴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