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이건 계약 위반이잖아요
던전이 큰 만큼 한 번에 나타나는 몬스터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헌터들의 숫자도 적지 않은 만큼,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헌터들이 걸어가는 등 뒤로 몬스터가 흘린 피의 길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몬스터와의 싸움은 끝이 없었다.
사방이 뻥 뚫린 사막인 만큼, 몸을 숨길 공간도 없었다.
멀리서도 헌터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들을 발견한 몬스터는 망설이지 않고 덤벼들었다.
“이건 끝이 없잖아. 제기랄, 힘들어 죽겠네.”
“도대체 얼마나 몰려오는 거야. 그만 좀 와라, 이 징그러운 새끼들아.”
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체력이 약한 몇몇 헌터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숫자의 힘은 강했다.
절대 이길 수 없던 존재이지만, 쉴 새 없이 밀어붙이자 상처를 입은 헌터들이 생겨났다.
특히 힘든 건, 밤이었다.
몬스터의 습격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새벽에 계속해서 이어진 습격은 날이 훤하게 밝아지고서야 끝이 났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헌터들의 얼굴은 초췌했다.
더군다나 다시 고개를 낸민 뜨겁게 타오르는 붉은 태양에 헌터들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모두 힘내라. 사막만 벗어나면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거야.”
강상우가 헌터들을 이끌어 나갔다.
상황이 힘들어질수록 그의 실력은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식사는 해야 했다.
헌터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가지고 온 전투 식량을 먹었다.
물을 부어 뜨겁게 데워진 전투 식량은 이렇게 더운 사막에서는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건조된 그대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첫 숟갈부터 입안에 열기가 가득 차고 음식과 함께 모래가 씹힌다.
“퉤! 퉤!”
참지 못한 몇 명의 헌터가 음식을 뱉어 냈다.
“먹을 수 있을 때 억지로라도 먹어 둬.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 곳이 던전이다.”
경험 많은 헌터의 조언에 헌터는 인상을 찡그리고 억지로 음식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언제 몬스터의 습격이 있을지 몰라 급하게 식사를 마친 헌터들은 던전 핵을 향해 출발했다.
“와, 형님, 장난 아닌데요. 심장이 쫄깃해졌어요.”
계속된 전투에 질린 듯 이세준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이제 던전에 들어온 게 좀 후회가 돼?”
“아니요. 전혀요. 힘들고 위험할수록 보는 맛이 더 짜릿합니다.”
‘참 세상에는 별의 별사람이 다 있구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경일이었다.
던전에 들어온 지 겨우 하루가 지났지만, 헌터들은 뒤집어쓴 몬스터 피에 달라붙은 모래 먼지로 인해 몰골이 엉망이었다.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격렬한 움직임을 할 수밖에 없던 헌터들은 신발에 들어간 모래 때문에 걸을 때마다 발이 쓸려 인상을 썼다.
그나마 멀쩡하게 보이는 이는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뿐이었다.
뜨거운 태양 밑에 놓인 헌터들은 안 그래도 더운데 계속된 몬스터와 싸움에 불쾌지수가 최고조로 치솟았다.
이곳에 모인 헌터들의 레벨이 높은 만큼 수입도 높았고, 남들보다 더 나은 생활환경을 겪어서 그런지 못 견뎌 하는 헌터들도 많았다.
“정지.”
앞으로 이동하는 하던 헌터들의 발걸음이 강상우의 명령에 멈췄다.
일행의 가장 앞쪽에 서 있던 그는 뒤돌아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왔다.
“이제부터 싸움의 뒷정리는 여러분들이 한다. 몬스터의 가죽을 벗길 때는 특히 신경을 쓰도록.”
강상우의 명령조에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빠르게 눈을 껌뻑이는 게,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건 계약이랑 다릅니다. 우리는 던전 부산물을 옮겨 주기로 계약하고 던전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이건 우리 일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이세준이 발끈해서 따지고 들었다.
“던전에 들어온 이상 이곳의 책임자인 내 말이 법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싸워야 할 헌터들의 체력을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건 너희들의 목숨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니, 군소리 말고 따르도록. 그리고 처음이라 봐주지만, 한 번만 더 내 말에 토를 다는 놈이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가만히 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요?”
서슬 퍼런 강상우의 말에도 이세준은 지지 않고 소리쳤다.
경일은 이세준이 남들과 다른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헌터의 압박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대항할 수 있는 건, 보통의 용기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지구도 아니고 법이 존재하지 않는 던전이었다.
“그래? 그럼 당장 여기서 꺼져라. 나도 내 명령을 불복하는 놈은 필요가 없다. 너 같은 놈은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될 뿐이야.”
강상우가 허리춤에 있는 검을 잡으려던 손을 멈추고 이세준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원래 성격대로라면 곧바로 이세준을 베었을 텐데, 그러기엔 이곳에 눈이 너무 많았다.
강상우의 기세가 집중되자 이세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며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뒷걸음질 쳐졌다.
“으으으…….”
분한 듯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상우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당황하며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이런 부당한 압력에 누군가가 나서 주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자신도 나서기 힘든 일에 다른 이가 나서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이상한데…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과 척을 지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닌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경일은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각자와 계약한 헌터들을 원망스러운 눈길을 바라봤으나, 그들도 이 일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헌터들의 입장에서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레벨이 훨씬 낮은 헌터가 단지 스킬 하나 있다고 상전처럼 대우받는 모습이 꼴 보기 싫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지독한 더위와 계속된 몬스터와의 전투로 짜증이 난 상태인데, 자신들의 일을 하나 덜어 준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강상우가 총대를 메준 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곳의 책임자인 강상우의 눈 밖에 나는 것이 가장 곤란했다.
던전 공략은 이제 시작인데, 괜한 일에 끼어들어 앞으로 불이익을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1팀장,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당신 마음대로 계약을 바꿀 수는 없어요.”
강상우를 1팀장으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는 해성 길드의 부길드장 우해수 뿐이었다.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을 의견을 강하게 표출했다.
“여긴 던전입니다. 그리고 이곳을 책임지는 사람은 나란 말입니다. 계약보다 내 판단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최우선 목표가 던전 폐쇄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헌터들의 컨디션 관리가 중요합니다.”
그의 말은 원론적으로 말하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간단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앞으로 해성 길드의 행사에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의 지원을 받는 게 힘들어질 것이었다.
해성 길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강상우의 의견을 동의하기 힘들었다.
강상우 개인의 명성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해성 길드에는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더군다나 그가 핍박하는 사람 중에 경일이 끼어 있었다.
해성 그룹이 야심차게 출시하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이가 바로 그였다.
혹시나 경일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거래가 끊어지게 된다면, 그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몬스터 뒤처리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후폭풍이 밀려올 수 있는 문제였다.
“1팀장, 내가 분명 반대의 의사를 밝혔는데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거죠?”
우해수의 목소리는 차가운 얼음처럼 냉랭했다.
뜨거운 햇빛이 비치고 있었지만, 이곳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들이 가진 위치를 잘 알고 있는 헌터들은 누구도 이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다.
“이곳의 책임자는 접니다. 이런 식으로 나의 권위를 뭉개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혀 불꽃이 튀었다.
우해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강상우 개인이 가진 헌터로서의 위상이나, 길드 내의 위치가 낮지 않다 해도 자신은 해성 그룹의 후계자였다.
그런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무대포로 밀고 나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에 자신과 그렇게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모습은 의외였다.
우해수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던전 안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헌터가 강상우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 이상의 분열은 좋지 않았다.
어찌 됐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강상우의 말대로 던전 폐쇄였다.
결국 그녀는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급해도 사장님께 부탁드리는 것이 아닌데… 이 일에 대해서는 던전을 폐쇄한 뒤 책임을 물겠습니다. 지금은 죄송하지만, 던전 폐쇄를 위해 조금만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해수가 경일에게 사과를 건넸다.
경일이 작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강상우의 급발진에 의아함을 느낀 건, 우해수 뿐만이 아니었다.
경일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처음 강상우를 봤을 때부터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강상우는 자신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던전을 들어오고 나서 더욱 확고해졌다.
알게 모르게 강상우의 시선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건, 분명 적의였다.
보통의 헌터라면 절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경일을 관찰하고 있었다.
경일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 상황을 지켜봤다.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바빠졌다.
헌터들이 사냥한 몬스터를 발골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이 파티의 책임자인 강상우가 이들을 무시하자, 다른 헌터들 역시 무시하기 시작했다.
“에잇, 씨발. 내가 이런 걸 하려고 온 게 아닌데.”
몬스터의 가죽을 벗기던 이세준이 화를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칼을 던져 버렸다.
상대적으로 헌터들보다 레벨이 낮은 터라 자연환경이 더욱 가혹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수없이 많은 몬스터를 발굴하다 보니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몇몇 헌터들이 그런 이세준을 노려봤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은 게, 이대로 가다가는 문제가 터질 소지가 다분해 보였다.
“세준아, 참아라. 계속 그렇게 눈에 띄게 행동해서 좋을 게 없다.”
“아니, 형님, 이건 아니잖아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세상에 어딨습니까?”
“그래, 말이 안 되지. 그런데 세준아, 의외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단다.”
경일은 이세준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비정한 현실을 가르쳐 주었다.
던전을 만나기 전, 누구보다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게 바로 자신이 아니었던가.
불합리한 일을 밥 먹듯이 수도 없이 겪었고, 힘이 없어, 먹고 살기 위해 죽어도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여야 했다.
이세준은 어린 나이에 각성하고 인벤토리 스킬까지 생겼으니, 이런 푸대접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가 단지 고레벨 헌터의 싸움을 보고 싶어서 이곳에 왔다는 건, 그만큼 세상이 쉬워 보였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세준의 얼굴에서 불만이 떠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입으로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전투의 뒤처리를 하는 동안 헌터들은 편하게 쉬었다.
빡센 던전 공략 중에 생각지도 못한 휴식은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고, 강상우에 대한 믿음은 더욱 높아졌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