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꼬리 만 개인 줄 알았더니…
“안 돼!”
“이런!”
“위험해!”
너무도 급박하게 벌어진 일에 헌터들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강상우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샌드웜이 강상우을 삼키기 직전, 행동을 멈춘 것이었다.
“허억!”
놀란 강상우가 그 틈에 바닥을 기다시피 도망쳤다.
헌터들 중 그 누구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샌드웜을 쳐다봤다.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강상우가 다친 이상,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강상우의 자리를 대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이상, 그저 샌드웜만 바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샌드웜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거 아냐?”
누군가의 작은 의심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호기심이 가장 많은 누군가가 자리에서 살짝 발을 굴렀다.
하지만 여전히 샌드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더욱 대담하게 발을 굴렀다.
“죽은 게 틀림없어. 이 정도의 진동에도 안 움직이잖아.”
한 명, 두 명 그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고, 호기심이 강한 헌터들이 먼저 샌드웜에게 다가갔다.
샌드웜의 피는 뜨거운 햇빛에 말라 가고 있었다.
몸에 가득한 잔털은 모두 힘없이 축 처져 있었고, 입은 힘없이 벌어져 있었다.
“죽었다. 죽었다고!”
샌드윔의 죽음을 확신한 헌터 한 명이 큰 소리를 지르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헌터 한 명이 죽긴 했지만, 지금까지 샌드웜과의 싸움으로 잃은 헌터의 수를 생각했을 때 이건 대단한 성과였다.
아주 작은 희생으로 악몽과도 같은 샌드웜을 죽인 것이다.
헌터들의 머릿속에서 강상우가 죽은 헌터를 미끼로 썼다는 생각은 어느샌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샌드웜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몬스터였다.
가죽은 약했고, 연체동물이라 뼈도 없었다.
신체 어느 부분도 쓸모가 없었다.
유일하게 쓸모 있는 건, 마나석뿐이었다.
마나석을 채취하고, 헌터들은 재빨리 그곳에서 벗어났다.
또 다른 샌드웜이 나타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저 새끼 분명 헌터를 자신 대신 미끼로 쓴 거 맞죠?”
경일에게 다가온 이세준이 조용히 속삭였다.
“…….”
경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근데 형님까지 미끼로 쓰려고 한 거 같은데, 왜 중간에 관뒀을까요?”
경일은 이세준이 의문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저 멀리 치료를 받고 있는 강상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상우의 행동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경일이었다.
그가 처음 샌드웜의 공격을 피한 건, 실력보다는 운이란 걸 눈치챘다.
‘다음 샌드웜의 공격을 피하기엔 불안해 보이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지?’
경일의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그가 근처에 있던 헌터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린 것이다.
‘쯧쯧, 다른 헌터를 미끼로 쓸 모양이군.’
그의 의도를 눈치챈 경일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아까 봐 두었던 자리로 이동했다.
모든 이의 시선이 강상우에게 쏠린 터라 그가 움직인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자리한 곳은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바닥이었다.
모래가 덮여 있어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가로세로 3미터 정도의 단단한 돌바닥인 걸 알 수 있었다.
헌터를 이용해 위기를 벗어난 강상우는 예상대로 다음 미끼로 자신을 선택하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보는 눈이 꼽지 않더니, 이럴 줄 알았지.’
경일은 자신을 향해 내뿜는 강상우의 기세에 떠는 척 연기를 했다.
강상우는 눈치채지 못하고 샌드웜을 이용해 경일을 죽이려고 달려왔다.
경일과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그는 경일이 서 있는 바닥이 바위처럼 단단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 갈 때, 경일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강상우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샌드웜이 아무리 강해도 단단한 돌바닥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강상우는 급하게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다친 다리로 샌드윔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샌드윔이 모래를 뚫고 나와 입을 벌린 순간,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천운이었다.
자신이 살아난 건.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려 왔다.
힐링 포션을 마시고 안정을 되찾자 이가 뿌드득 갈렸다.
아까 경일이 자신을 향해 비웃은 걸 똑똑히 보았다.
자신이 경일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들키고 만 것이다.
‘내가 노리고 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그는 설마 자신이 은밀하게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일이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가 레벨이 높아 봐야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자신처럼 고레벨인 헌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강상우였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헌터들은 또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샌드웜과의 싸움이 힘들었다고 이대로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사막지대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들의 소망이 통했는지 사막지대가 끝이 나고, 거짓말처럼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가는 걸로 하지.”
강상우의 말에 헌터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조금 이른 저녁을 먹고 다들 휴식을 취했다.
“오늘부터 불침번은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서는 것으로 한다.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 거라 생각한다.”
강상우가 말에 헌터들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에 반해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 열 명의 얼굴은 썩어 갔다.
그리고 또 한 명 우해수의 얼굴도 잔뜩 굳어졌다.
강상우에게 한마디 하려다가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샌드웜의 등장으로 안 그래도 헌터들의 사기가 가라앉았는데, 여기서 또다시 분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이런 미친놈이!”
이세준이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으나, 강상우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죄송해요. 1팀장이 나랑 좀 껄끄러운 관계이긴 해도 저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았는데…….”
우해수가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닙니다.”
경일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이미 경일은 우해수와 다르게 강상우가 저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저놈과 난 생전 처음 본 관계야. 그런 그가 나를 노릴 이유가 없어. 그럼 누군가가 사주했을 것이고, 저놈도 알고 나도 알 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 우성범 밖에 없지. 겁을 먹고 집에만 박혀 있어서 한동안 신경을 쓰지 않았더니…….’
경일은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우성범이 내가 던전에 들어간다는 걸 알고 수작을 부린 모양이군. 꼬리 만 개인 줄 알았는데… 제법이야. 마지막 발악을 해 본다 이거지? 강상우가 우해수에게도 적대적으로 대하는 걸 보니, 이번 기회에 두 명 다 제거할 생각이군. 권력이 무섭기 무섭네. 대기업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피를 나눈 동생도 제친다 이거지? 어디 네놈 뜻대로 될지 한 번 두고 보자고.’
생각을 마친 경일이 우해수에게 말했다.
“앞으로 제 옆에 있는 게 좋겠습니다.”
경일의 뜬금없는 말에 우해수는 의문이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지만, 경일은 우해수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 우성범과 엮인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자신의 비밀이 상당 부분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거래 관계인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다였다.
우해수가 자기 말을 따른다면 지켜 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일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강상우는 해성 길드에 심어 둔 우성범의 심복이었다.
밖으로는 범성 기업을 세워 자신의 세를 불리는 동시에 비자금을 마련했고, 안으로는 강상우를 이용해 해성 길드를 장악할 생각이었다.
해성 길드의 길드장 자리를 미끼로 강상우를 이용해 이번 기회에 경일과 우해수를 죽일 생각이었다.
강상우에게 경일이 위험한 놈이라고 경고해 주었다.
하지만 실제로 경일이 힘을 드러낸 걸 본 적이 없으니, 그의 경고는 공염불로 끝나고 말았다.
‘해성 길드와의 거래 한 번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큰데, 이거…….’
남매의 후계자 싸움에 말려들어 또다시 곤란한 일을 겪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우해수는 자신의 시선에도 경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질문을 하려다가 이내 멈췄다.
그녀도 강상우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던 터라, 일단 경일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아까 1팀장이 샌드웜을 끌고 사장님 쪽으로 갔어. 마지막에는 방향을 틀긴 했지만, 위험할 뻔했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내가 지켜야겠어.’
경일의 의도와 다른 이유로 그의 말을 따랐지만, 이 결정으로 우해수는 이곳에서 가장 안전해졌다.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힘들어졌다.
죽은 몬스터의 뒤처리에 밤에 불침번까지 서야 해서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했다.
“힘들어… 여기서 나가면 이 일을 공론화시켜 이 던전에 참석한 길드와는 절대 계약하지 않게 하겠어.”
“조용히 해, 이 멍청아. 여기는 던전 안이란 걸 잊지 마. 지금은 쥐 죽은 듯이 있는 게 안전해.”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은 힘들었지만, 최대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형님, 힘들지 않으세요?”
이세준은 처음의 밝은 얼굴과 다르게 기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견딜 만해.”
“앞으로 며칠이나 이 짓을 해야 할까요? 아마 이번 던전 폐쇄가 끝나면 한동안 던전은 쳐다도 보지 않을 거 같아요.”
“일단 지금의 일만 신경 써. 앞으로 샌드웜 같은 몬스터가 또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설마 그러겠어요. 아무리 여기가 무등급 거대 던전이라고 해도 그런 최상위 몬스터가 연달아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제가 이쪽에 관심이 많아서 확실히 알고 있어요.”
이세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다고 계속해서 그럴 확률은 없었다.
스탄다비아와 지구를 잇는 게이트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는 형편이니, 이변은 언제 또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숲으로 들어온 헌터들은 뜨거운 햇빛에서 해방된 것만으로도 기뻐했다.
순식간에 자연환경이 이렇게 극과 극으로 바뀌는 것이 말도 되지 않는 것이지만, 여긴 지구의 상식이 통하지 않은 던전이었다.
이 숲에 주로 서식하는 몬스터는 늑대 얼굴을 한 이족 보행 몬스터 라이칸이었다.
주로 C급 던전에 나타나는 몬스터로, 타는 듯한 선명한 붉은 털을 가진 라이칸이 헌터들의 앞에 나타났다.
“캬오우~”
“캬아아~”
“크르르르륵.”
앞으로 튀어나온 주둥이에서 연신 붉은 침을 흘리며 헌터들을 노려봤다.
무리를 짓는 몬스터답게 엄청난 숫자였다.
“형님, 숫자가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헌터들을 포위하듯 둘러싼 엄청난 수의 라이칸을 보고 질려 버린 이세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조심해. 분명 여기저기서 난전이 벌어질 건데, 잘못하다간 위험할 수도 있어. 헌터들은 분명 정신이 없을 테니, 자기 몸은 자기가 직접 지켜야 해.”
경일의 경고에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이 더 새하얘졌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 어디서 눈을 부라리는 거야. 오늘 이것들의 눈을 모두 파 버리겠어.”
강상우가 큰소리로 소리치며 라이칸의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의 뒤를 따라 헌터들도 뛰기 시작했다.
전략이 끼어들 자리가 없이 힘과 힘의 전투가 시작됐다.
그의 덩치만큼 커다란 강상우의 검이 라이칸의 몸을 두 동강 내버렸다.
피가 튀고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확실히 강상우는 강했다.
그는 늑대 무리에 뛰어든 한 마리 사자였다.
그의 발톱이 휘둘러질 때마다 라이칸의 몸이 분리되며 쓰러져 갔다.
하지만 다른 헌터들의 사정은 달랐다.
이곳에 모인 헌터들은 대부분 C급 던전에서 활동했고, 이렇게 많은 숫자의 라이칸은 그들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