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라이칸의 창이 헌터의 배를 뚫고 들어가 등을 뚫고 나와 있었다.
라이칸은 자신의 손에 죽어 가며 비명을 지르는 헌터를 보며 기분이 좋게 웃었다.
경일의 예상대로 난전이 벌어졌다.
라이칸과 헌터들의 비명이 조용했던 숲을 가득 채웠다.
“죽어!”
라이칸이 내지른 창을 피해 심장에 검을 박았다.
곧바로 심장에 박힌 검을 회수해 자신을 노린 또 다른 창을 막았다.
헌터들은 정신없이 막고, 찌르고, 피하고, 베었다.
라이칸이 흘린 피로 땅바닥이 흥건해졌다.
누군가가 그 피를 밟아 미끄러졌고, 그 순간 라이칸의 창이 몸에 박혔다.
라이칸은 가장 뒤쪽에 있는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에게도 들이닥쳤다.
그런 라이칸을 막은 건, 다름 아닌 우해수였다.
그녀의 검이 화려한 선을 그릴 때마다 라이칸의 몸이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캬아악!”
흥분한 라이칸이 온 힘을 다해 칼을 내려쳐 보지만, 우해수는 허무하리만큼 쉽게 피해 버렸다.
‘단지 해성 그룹의 핏줄이라 그 자리에 앉은 줄 알았는데, 실력이 만만치 않네. 저 정도면 강상우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는 않겠군.’
전위에서는 강상우가 날뛰고, 후위에서 우해수의 활약으로 기세는 점점 헌터들에게 넘어왔다.
헌터들의 비명보다 라이칸의 비명이 더 많아지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승리의 추는 헌터들에게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헉, 헉, 헉, 헉.”
헌터들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라이칸과의 전투가 끝이 났다.
전투에선 이겼지만, 몇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헌터들은 익숙한 듯 죽은 헌터를 곧바로 던전의 흙 속에 묻었다.
경일과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다.
대규모 전투가 끝난 뒤로는 라이칸의 습격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아마 첫 전투에서 숲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라이칸이 죽은 듯했다.
헌터들은 꾸준히 몬스터를 사냥하며 던전의 핵으로 나아갔다.
강상우가 가끔 경일의 동태를 살폈으나, 그도 보는 눈이 많아 특별한 수를 쓰지는 못했다.
숲의 끝에 다다르자 헌터들은 던전 핵의 존재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던전에 들어온 지 열흘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끝이 보이자 헌터들의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그동안 모두 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은 초췌했고, 입고 있던 갑옷은 몬스터의 공격에 맞아 우그러지고, 온갖 피와 때가 함께 묻어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욱 초라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었다.
“와 씨, 짜증 나.”
이세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걸어가는 그를 보면 들고 있는 여러 개의 가방에 가려 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가방은 모두 다른 헌터들의 개인 짐이었다.
강상우가 이들을 함부로 대하자, 다른 헌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침번에 이어 이제는 자신의 개인 짐까지 이들에게 맡겼다.
자신들도 헌터인 이상, 가방의 무게는 버틸 수 있지만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은 버틸 수가 없었다.
경일은 강상우의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당연한 듯이 개인 짐을 경일에게 맡겼다.
“잘 들고 다녀. 혹시라도 가방에 상처라도 나면 몇 배의 크기로 네 몸에 새겨줄 테니. 알아서 잘하라고.”
강상우가 비릿하게 웃으며 경일의 뺨을 톡톡 쳤다.
경일은 뺨을 맞으면서도 오히려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뭐지? 또라인가? 하여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 놈이야. 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도저히 기회가 안 생기네.’
가방을 맡기고 돌아가는 강상우의 뇌리에 경일의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생겼다.
헌터들은 던전 핵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드디어 숲이 끝나고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엄청난 크기의 벽이었다.
마치 만리장성을 만난 듯 벽은 끝없이 뻗어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하~ 사막에, 숲에 이젠 끝을 알 수 없는 건물까지…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우리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지?”
“그래, 던전의 핵은 아마 이 건물 안에 있을 거야.”
“저 문 좀 봐. 저 정도 크기면 거인이 이 안에 살고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냐?”
얼마나 오래됐는지 거대한 벽은 푸르른 이끼로 덮여 있어 속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분명 낮인데도 햇빛이 잘 들지 않는지 주변은 어둠침침했다.
발밑에 낮게 깔린 안개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거 같은 공포를 일으켰다.
발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축축한 느낌에 싸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씨발, 어쨌든 들어가야 하는 곳이잖아. 그럼 바로 들어가자. 발밑이 안개로 보이질 않으니 여기가 더 기분이 나빠.”
“나도 그래. 뱀 같은 게 물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거잖아.”
“성문 같은 저 거대한 문이 닫힌 거 안 보이냐? 일단 문부터 열어야 들어가든지 말든지 하지.”
누군가의 말대로 거대한 문은 누구의 입장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끼이이이익!
그 순간이었다.
마치 문이 헌터의 말을 들은 것처럼 스스로 열리고 있었다.
오래된 경첩이 쓸리면서 나는 철판을 못으로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헌터들의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저게 뭐야?”
문이 저절로 열리는 모습에 헌터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흔들리는 시선으로 열리는 문을 쳐다봤다.
이곳의 모든 헌터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단 한 명, 경일은 무심하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 뒷산에서 우연히 만난 던전에서 이미 건물을 한 번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그때 던전 체인지가 일어나는 바람에 꽤 고생했었지. 그러고 보니 이곳의 던전도 마찬가지구나. 가만 보면 하나의 던전에서 등급에 상관없이 여러 몬스터가 나타나는 게, 던전 체인지가 연속으로 일어나는 것과 똑같잖아? 그때 건물 안에서의 싸움이 가장 위험했는데… 아마 이곳도 마찬가지겠지?’
거대한 문이 활짝 열리고 속살을 드러냈다.
헌터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거대한 복도였다.
문보다 두 배 이상은 커 보이는 복도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음침한 복도는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불길함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이거 더럽게 찝찝한데.”
“제 발로 지옥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야…….”
“안 그래도 오기 싫은 곳에 억지로 끌려와서 기분이 안 좋은데, 이런 음침한 곳까지 들어가야 한다니. 이번 일이 끝나면 헌터 생활 접고 모아 둔 돈으로 장사나 해야겠어.”
“맞아. 그동안 무거운 세금은 꼬박꼬박 뜯어 가는 것도 모자라 이런 위험한 일까지 시키고 말이야. 나라에서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헌터들은 막상 문이 열리자 아무도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은 복도를 보자 발밑에 깔린 안개가 상대적으로 덜 무서워진 것이다.
아무도 건물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못 하고 있는 순간,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아악, 뭔가가 발목을 물었어!”
“뭐, 뭐야? 분명 뭔가가 내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어.”
“이런! 안개 속에 무언가가 있어. 다들 건물로 들어가!”
안개 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헌터들을 공격하자, 그들은 정신없이 건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콰앙!
모든 헌터들이 복도로 들어오자 문이 열릴 때와는 반대로 빠르게 닫혔다.
얼마나 빠르게 닫혔는지 육중한 문이 부르르 떨렸다.
“이런.”
퇴로가 차단되자 헌터들은 당황한 듯 한층 움츠러들었다.
몇몇 헌터가 문을 당겨 보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 당했어.”
안개 속에서 발목을 물린 헌터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겨우 살짝 긁힌 듯한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혹시나 독 반응이 있나 지켜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우리를 이곳으로 몰아넣으려고 한 것이 틀림없어.”
“씨발, 이건 마치 던전이 살아 있는 거 같잖아.”
“여기서 나가야 해.”
“나, 나, 나는 폐쇄 공포증이 있다고.”
“다들 뭐 해. 전부 달라붙어 문을 부숴야지@”
누군가 크게 다친 것도,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고, 단지 건물에 들어온 것뿐인데 헌터들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다.
“어차피 이곳으로 들어왔어야 했으니 다들 호들갑 좀 그만 떨어.”
강상우가 단호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다잡았다.
“앞으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놈들은 내가 가만히 안 둘 테니 알아서들 해.”
그의 위협에 두려움에 떨던 헌터들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강상수가 무리의 앞에 서서 그들을 이끌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런 불길한 곳에서 앞으로 나서고 싶지 않았으나, 자신만 바라보는 헌터들의 기대로 인해 어쩔 수가 없었다.
복도는 끝이 없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었는데, 아직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건물에 방이 하나도 없어.”
누군가의 말처럼 지금까지 한 번도 방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이곳은 복도라기보다는 통로라고 불러야 더 정확할 거 같았다.
아무런 위험이 없이 그저 복도만 이어지자 헌터들의 긴장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 순간이었다.
피잇!
“끄르륵.”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목에서 피가 끓는 소리가 들렸다.
헌터 중 한 명의 목에 화살 하나가 관통해 있었다.
목 중간을 뚫린 헌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피를 쿨럭쿨럭 토해 내고만 있었다.
“제기랄!”
헌터들의 긴장이 풀린 순간을 정확하게 노리고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곳에 있는 헌터들은 고작 화살 하나에 목을 내줄 만큼 약한 이는 한 명도 없었으나, 방심한 순간을 귀신같이 노리고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가 밟은 곳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목이 뚫린 헌터는 눈이 뒤집혀 그대로 쓰러졌다.
“이건 트랩이잖아.”
“모두 움직이지 마!”
누군가의 외침에 강상우가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과 함께 헌터들의 움직임이 사라졌지만, 그와 함께 복도에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이게 뭐야? 설마?”
원래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진동이 점점 커지면서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씨발, 거대 거미다.”
화살이 전투를 알리는 신호인 듯 복도 끝에서 엄청난 수의 거대 거미가 복도의 천장, 바닥, 벽을 타고 몰려들었다.
새까만 갑피를 가진 거대 거미가 몰려오는 모습이 꼭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헌터들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언제 어디서 트랩이 발동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거대 거미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사사사사삭!
큰 덩치와 다르게 거대 거미는 작은 벌레가 기어가듯 조용히 헌터들에게 다가왔다.
거대한 낫과 같은 두 개의 집게 턱이 연신 움직이며 창처럼 뾰족한 다리 끝을 벽에 꽂아 넣으며 빠르게 움직였다.
집게 턱 위에 핏빛의 스무 개 눈이 연신 헌터들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으아아악!”
그 징그러운 모습에 일부 여자 헌터들이 비명을 질렀다.
“준비해!”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복도에서 만난 이상, 싸움은 피해 갈 수 없었다.
“키키키킥.”
“키긱.”
“키키키키.”
성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목 안에서 무언가가 마찰하여 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거대 거미가 덤벼들었다.
핏이!
거대 거미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창과 같은 앞다리를 앞으로 길게 뻗었다.
깡!
헌터의 검과 거대 거미의 다리가 부딪치며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와아아아아!”
“모두 거미를 죽여!”
헌터들은 각자의 무기를 꼬나 쥐고 거대 거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앞으로 수십 개의 창과 같은 거미 다리가 뻗어 왔다.
몸을 고정하고 있는 두 개의 다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리들은 모두 헌터들을 노렸다.
문제는 공간을 꽉 채우고 다가오는 거미의 다리를 피할 공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