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식량
“사장님, 이상하지 않아요?”
우해수의 말에 경일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도 우해수와 마찬가지로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누군가가 벽을 부스는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그 뒤로는 통 들을 수가 없었다.
경일이 이변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건, 넉넉한 식량 때문이었다.
식량이 넉넉하다 보니 지금의 상황을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경일은 방의 한쪽 공간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가방이 보였다.
이것들로 추론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이 물 없이는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헌터들이니 그보다는 길 테지만, 지금쯤이면 개인 짐 가방이 없는 헌터들은 죽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부 길드장님 짐작대로 아마 많은 헌터들이 이미 죽었을 겁니다.”
“휴… 강상우, 그 사람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헌터들이 너무 많이 죽었군요. 왜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나서는.”
이 일에 우성범이 끼어 있을 거라고는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경일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자력으로 이곳을 탈출해야 했다.
자신이 탈출하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지키면서 싸우는 건 몸이 한 개인 이상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나? 둘이서 최선을 다하는 수박에는? 내가 길을 뚫고 부길드장님 헌터들을 방어하는 방식이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탈출할 수 있을 거야.’
경일은 결심을 굳혔다.
이제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탈출을 시도해야 했다.
그 순간이었다.
꽝, 꽝, 꽝, 꽝!
저 멀리서 벽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오자, 쥐 죽은 듯이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여기에 있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이세준이 벽을 두드리며 자신들이 있다는 걸 알리려 했다.
경일도 제발 누군진 모르지만, 자신들이 있는 이곳으로 와 주길 빌었다.
사람들의 기도가 통했는지 벽을 부수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려왔다.
우해수가 벽을 향해 무기를 내려치자, 나머지 사람들도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벽 너머에 거대 거미가 존재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이들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꽝, 꽝, 꽝, 꽝!
이 소리가 상대에게 닿기를 희망하고 열심히 벽을 부수었다.
상대도 벽을 부수는 소리를 들었는지 벽을 때리는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됐다, 됐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에 다들 기뻐했다.
쩌쩌쩍!
드디어 사람들이 있는 방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강상우와 그의 팀원들이었다.
“이런, 이런, 쥐새끼들이 여기 모여 있었네.”
강상우가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뒤집어씌웠다.
“쥐새끼들이 그동안 살이 아주 통통 올랐네. 누구는 물 한 통에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이것들은 편안하게 앉아서 남의 식량으로 파티를 했구나.”
그러고 보니 강상우와 그와 팀원들의 갑옷에는 붉은 피가 가득했다.
어떤 부분은 오래돼서 검은색으로 변색된 피도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거대 거미의 피 색깔은 무색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전부 사람의 피란 이야기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어야 갑옷이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묻을 수 있지? …저 새끼가 식량을 구한다는 핑계로 아예 헌터들을 사냥하고 다녔구나. 분명 나와 우해수를 제거하기 위해 이 상황을 이용한 게 틀림없어.’
경일은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강상우는 자신의 숨겨 둔 칼이었던 서동우가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자 몹시 초조한 상태였다.
이제 던전 폐쇄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보는 눈이 많아 경일과 우해수를 죽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우성범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앞으로 우해수와 경일을 죽일 기회가 다시 올지 의문이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반드시 이들을 제거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미로가 생겨났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 상황이 큰 기회임을 깨달았다.
미로는 많은 헌터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안 그래도 우성범은 우해수와 경일을 죽여야 하니, 헌터들을 살려 데리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이 던전에 자신이 죽인 헌터는 물론 우해수와 경일의 죽음까지 같이 묻을 생각이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들을 죽였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을 터.
그는 헌터들을 만나는 족족 모두 죽여 버렸다.
하지만 며칠을 돌아다녔는데도 우해수와 경일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더욱 열심히 그들을 찾아 돌아다녔고, 수많은 헌터들이 죽어 나갔다.
그의 손에 죽은 헌터가 50명이 넘었을 때, 드디어 경일과 우해수를 찾을 수 있었다.
우해수는 설마 강상우가 헌터들을 죽였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녀는 강상우의 무례한 행동에 발끈하며 나섰다.
“1팀장, 이게 무슨 무례한 이야기입니까? 쥐새끼라니요. 그리고 엄밀히 말해 이 모든 일의 책임은 당신에게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이들을 무시하고 깔보니, 헌터들이 자신의 짐까지 모두 이들에게 맡긴 거지 않습니까. 오히려 분란을 일으킨 사람이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하다니요.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서릿발 같은 기세로 우해수는 강상우의 잘못을 지적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녀답지 않게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목에 힘줄이 선명하게 불거져 나올 정도였다.
강상우는 자신을 나무라는 그녀의 모습에 분노가 폭발했다.
“하, 씨발. 부모 잘 만난 거 하나밖에 없는 년이 어디서 큰소리야? 내가 네년보다 헌터로서 모든 게 더 위야. 근데 네가 내 위에 있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된다는 소리라는 거야.”
그는 지금까지 속에 쌓아 둔 울분을 토해 냈다.
“해성 길드를 여기까지 키운 게 누구야? 바로 나야. 나라고. 알겠어? 지금까지 온갖 개고생 해서 키워 놨더니, 어디서 낙하산으로 들어와 남의 것을 털도 안 뽑고 삼켜. 내가 순순히 네 밑에 있을 거라 생각했어? 넌 오늘 여기서 죽는 거야.”
폭풍 같은 기세를 일으켜 우해수의 기세를 가볍게 밀어낸 강상우는 가면을 벗고 본격적으로 그녀를 겁박했다.
강상우의 급발진을 예상하지 못한 우해수는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핏기가 사라지면서 창백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큰 충격을 받은 듯 그녀의 표정은 석고처럼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당황해하는 그녀를 더욱 몰아붙이기 위해 강상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나만 너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게 아니야. 나보다 더 너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그게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크크크.”
강상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약간의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더욱 몰아붙였다.
“너도 모르진 않을 거야. 표정을 보니 외면하고 싶은 모양인데, 네가 생각하는 설마가 사실이야. 바로 네년의 오빠, 우 회장님이 너를 죽여 달라고 사주했어. 안 그래도 나도 네년이 이가 갈리도록 싫었는데, 아주 잘됐지 뭐야. 그 대가도 엄청나고 말이야.”
강상우는 우해수에게 온갖 폭언을 퍼붓고는 시선을 경일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너도 죽을 준비해라. 너처럼 운이 좋은 놈은 처음 봤지만, 오늘로써 너의 그 질긴 운도 끝이야. 너 같은 놈이 뭐가 무섭다고 우 회장님이 조심하라고 한 건진 모르겠지만, 네놈도 끝이야.”
강상우는 즐거운 듯 비릿하게 웃으면 경일을 노려봤다.
경일과 같이 지내던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자신들을 구해 줄 사람이 온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사신이었다.
이들이 자신들을 살려 주지 않을 거란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개자식아, 네가 그러고도 인간 새끼냐? 네 부모는 네가 이렇게 쓰레기인 건 아냐? 내가 죽어서 네 부모에게 네가 한 짓을 그대로 알려 주마!”
다른 이들이 두려움에 빠져 도망갈 곳을 찾고 있는 거에 반해 이세준은 강상우에게 욕을 퍼부었다.
웃고 있던 강상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을 보니 이세준의 욕이 제대로 먹힌 듯했다.
하룻강아지보다 못한 놈이 감히 자신의 부모까지 들먹이며 욕을 해 댔으니 강상우의 속이 뒤집히는 건 당연했다.
할 말은 다 하고 사는 스타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죽음 앞에서도 기죽지 않은 모습에 경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런 미친 새끼가. 방금 네가 한 짓은 죽어서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저 새끼는 죽이지 마. 네가 지옥을 보여 줄 거니까.”
“네, 팀장님.”
우해수는 오빠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지만, 그렇다고 정신을 못 차린 건 아니었다.
자신의 배다른 오빠라면 충분히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충격으로 핏기가 가신 얼굴은 창백했지만, 해성 길드를 이끄는 실질적인 수장답게 단단한 눈을 한 채 강상우를 노려봤다.
4대 1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대로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곤 자신의 검을 단단히 거머쥐었다.
“네가 저년을 상대할 동안, 너희는 나머지 헌터들을 죽여. 나에게 욕을 한 놈은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만 하나 자르고 살려 놓고.”
“알겠습니다.”
우해수의 기세가 변한 걸 보고 강상우가 팀원들에게 명령하고 그녀의 앞에 섰다.
세 명의 팀원이 헌터들에게 다가왔다.
겁을 먹은 헌터들이 까마귀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이곳은 방 안이었고, 그들이 곧 벽에 막힐 수밖에 없었다.
두려운 듯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팀원 중에 한 명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걸은 채 경일에게 다가왔다.
챙!
그 순간, 우해수와 강상우의 검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서로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출발 신호라도 된 것마냥 경일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어, 어, 어…….”
헌터는 경일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폐가 뚫린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아무도 헌터가 죽는 걸 보지 못했다.
강상우는 우해수와의 싸움에 집중했고, 나머지 두 명은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움직이기 시작한 경일은 행동은 빠르고 단호했다.
순식간에 방심하고 있던 나머지 팀원을 정리해 버린 것이다.
세 명의 팀원이 허무하게 죽자 강상우는 곧 이변을 알아차렸다.
“이런 미친!”
강상우는 자신만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우해수와 거리를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경일의 활약에 사람들은 소 눈망울처럼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경일을 등지고 있던 우해수만이 이 사실을 모른 채 갑자기 물러선 강상우를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봤다.
“우와, 와아아아아아! 형님 짱!”
역시 가장 먼저 반응을 한 건 이세준이었다.
작게 시작된 함성이 뒤로 갈수록 커져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와 함께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같이 함성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깡충거리며 뛰었다.
죽음 직전에 건져졌으니, 그 기쁨이야 오죽했으랴.
우해수는 자신의 등 뒤에서 일어난 소란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강상우가 재빨리 우해수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의외의 상황이 벌어져 놀라진 했지만, 그도 지금까지 온갖 역경을 뚫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헌터였다.
그런 그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전국에서 이름이 알려질 정도의 헌터인 만큼, 그의 검은 날카로웠다.
최단 거리를 가장 단순한 동작으로 우해수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그의 회심의 일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우해수의 심장을 찌르기 직전, 검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직선으로 뻗어 가던 칼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얼마나 큰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자신의 검을 때린 건, 바로 경일의 검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