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난놈
“하하하하!”
경일이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즐거운지 강상우가 모래를 가르고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챙!
경일의 검이 강상우의 검을 힘겹게 막아섰다.
챙, 챙, 챙!
힘보다 스피드를 살린 강상우의 검이 사납게 경일의 목숨을 노렸다.
경일이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강상우의 검을 막기가 벅찬 것이었다.
피잇!
결국, 강상우의 검이 경일의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경일이 급하게 뒤로 물러서며 강상우와 거리를 벌렸다.
강상우는 이미 다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했는지 굳이 곧바로 경일을 쫓아 공격하지 않았다.
“하하하하! 내가 말했지. 꼭 육체가 강한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고. 가장 중요한 건 경험과 창의력이야. 이런 허접한 수에 넘어가는 걸 보니, 지금까지 기껏해야 몬스터 몇 마리 잡아 보고 혼자서 연습한 게 다인 모양이군.”
강상우는 매우 통쾌한 듯 조롱을 가득 담은 말투로 경일을 마음껏 비웃었다.
경일은 강상우의 비웃음에 눈에 모래가 아직 빠지지 않았는지 가늘게 눈을 뜨고 구겨진 종이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몬스터 몇 마리 잡아 본 것도 맞았고, 지금까지 훈련 위주로 검술을 닦은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그 훈련이라는 것이 절대 실전에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단의 훈련은 실전을 방불케 했고, 어떤 때는 실전보다 더 격렬하게 싸웠다.
힐링 포션이 도입되자 기사들의 훈련은 한층 더 치열해지고 격해졌다.
단지, 기사의 명예가 걸린 싸움인 이상, 그들의 싸움은 순수하고 깨끗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더러운 수를 처음 경험한 경일이 밀린 것이었다.
경일은 힐링 포션을 한 모금 마시곤 나머지는 상처에 부었다.
그의 얼굴에선 어느새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왠지 더 섬찟하게 다가왔다.
“이제 좀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하지만 이미 늦은 거 같지 않아?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의 상처가 꽤 결릴 텐데 말이야. 분명 나보다 힘도 세고, 빠른데 오히려 계속해서 밀리니 자존심이 좀 상하겠네.”
강상우가 계속해서 약을 올리며 경일의 심기를 흔들어 놓았다.
비겁해 보이지만 목숨을 건 싸움에서 정정당당을 따지는 게 더 웃기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것이 그의 실력이었으니까.
“자, 덤벼 애송아.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하고 뒤져야 억울하지 않을 거 아니야.”
느글거리는 얼굴로 강상우가 조금 전 경일이 한 말을 그래도 돌려주었다.
강상우가 경일을 향해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다가갔다.
“형님! 힘내세요! 저런 쓰레기한테 지면 안 돼요!”
이세준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용기를 내 경일에게 응원을 보냈다.
“저런 개자식이!”
한주먹도 되질 않을 놈이 자신을 향해 욕을 하자, 강상우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넌 특별히 팔다리를 자르고, 몸뚱이는 거대 거미의 먹이로 던져 주마.”
“흥!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네놈이 그렇게 될 거 같은데?”
이세준이 다리를 달달 떨면서도 끝까지 강상우의 약을 올렸다.
그 모습에 무표정했던 경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이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다니, 나름 대단하긴 하네.’
힐링 포션의 효과로 고통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우해수와 경일이 먹은 힐링 포션이 기존의 제품보다 몇 배 더 뛰어난 걸 알았다면, 강상우가 저렇게 여유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마나 포션의 주재료인 커미네스보다 더 효능이 높은 키아노티처럼,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던전 고유 식물로 만든 힐링 포션이었다.
손윤찬의 실력 또한 최고조로 올라가 있어 최고의 힐링 포션이 탄생했다.
기존의 힐링 포션이었다면 우해수는 벌써 죽어야 했지만, 아직 살아 있는 건 모두 새롭게 개발한 힐링 포션 덕이었다.
“천천히 가지고 놀려고 했는데, 네놈 때문에 안 되겠어. 너에겐 약속대로 끔찍한 고통을 맛보여 주마.”
강상우가 이세준을 한 번 노려보고는 경일에게 덤벼들었다.
꽝!
서로의 힘이 실린 두 개의 검이 맞부딪쳤다.
육중한 충격이 옆구리 상처까지 밀려와 경일이 살짝 인상을 썼지만, 그렇다고 버티지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경일이 의외로 잘 버티자 짜증이 난 듯 강상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 순간이었다.
경일에 손에서 어마어마한 진동이 느껴짐과 동시에 검이 조금씩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거였구나!”
우해수의 검을 잘라 낸 걸 신경 쓰고 있던 경일은 곧바로 검을 놓으며 뒤로 빠졌다.
그와 함께 경일의 검을 잘라 낸 강상우의 검이 경일을 쫓아왔다.
앞쪽 가슴을 강상우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하~ 빠르네. 이번 수로 끝내려고 했더니.”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우해수의 검이 잘리는 걸 보고 방비를 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처음 당했다면 강상우의 말대로 이번 한 수로 승부가 끝났을 수도 있었다.
경일도 놀라긴 했지만, 사실 지금 가장 놀란 건 이세준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이 있다 보니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려 버렸다.
“하하하하하하!”
그 모습에 강상우가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 네놈의 처지가 실감이 되나 보지? 어디서 거지 같은 게 함부로 까불어. 오늘이 네 인생에서 최악의 날이자, 마지막 날이 될 거야. 기대해도 좋아. 내가 이런 쪽으로 꽤 소질이 있거든.”
강상우가 떠들든 말든 경일은 인벤토리에서 다시 무기를 꺼냈다.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놈이라 예비 무기가 있을 거라 짐작은 했지. 뭐, 그것도 잘라 버리면 되니까 별로 상관은 없어.”
“방금 진동은 스킬인 건가?”
경일이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강상우는 자랑스러운 듯 함박웃음을 짓고 이야기했다.
“그래, 초진동이라는 스킬이지. 이 스킬 앞에서는 어떤 무기도 다 잘려 나가지. 사람의 몸은 당연히 더 쉽고. 크크크크크.”
“글쎄, 과연 네놈의 말대로 될지 보자고.”
경일이 먼저 공격해 들어가는 모습에 강상우가 감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용기가 대단한데? 질 걸 뻔히 알면서도 덤비는 게 쉬울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과연 그럴까?”
경일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강상우는 굳이 경일의 몸을 노릴 필요가 없었다.
스킬이 있으니 적의 무기를 무력화시키기만 하면, 이 싸움은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보다 스피드가 빠른 경일의 검을 피해 충분히 거리를 벌리고, 오로지 경일의 검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끼긱긱긱긱긱긱!
검과 검이 만나 칠판을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초진동을 하는 검과 그 무엇이든 벨 수 있는 마나가 실린 검이 만나자 실로 용호상박의 모습을 연출했다.
서로가 조금도 밀리지 않고 서로의 검을 잘라 내려 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이게 말이 돼? 이런 건 들어 본 적이 없어.”
놀란 강상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네놈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 이거, 쓰레기인 줄은 알았지만, 이기적이기까지 한 새끼였네.”
경일이 강상우의 놀란 모습을 보곤 조소를 지었다.
“씨발! 스킬이 두 개인 헌터는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이미 인벤토리 스킬이 있는 놈이 어떻게 또 다른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거야?”
“아하~ 그래서 그렇게 놀란 거였어? 뭐, 내가 아주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해.”
경일은 굳이 강상우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강상우가 마나 연공법을 스킬로 오해하긴 했지만, 이건 엄밀히 말해 스킬이 아니었다.
강상우가 최선을 다해 더 강한 진동을 일으켜 보지만, 경일의 마나도 만만치 않았다.
초진동을 마나로 막아 냄으로써 서로 동률을 이르렀다.
이제 스킬의 우위가 아닌 진정한 실력으로 이 싸움이 결정 날 것이었다.
강상우가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의 스킬은 검에만 국한되어 있지만, 경일이 익힌 마나 연공법은 검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에도 영향을 끼쳤다.
결국 그는 검을 거두고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다 이겼다고 생각한 싸움의 정세가 한순간에 뒤집혀 버렸다.
그의 얼굴이 핼쑥해진 만큼, 이세준의 얼굴엔 핏기가 돌아왔다.
“와하하하하하! 아이고, 고소해라. 삼일천하도 아니고, 겨우 3분천하였어. 씨발, 졸라 쪽팔리겠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인 양 온갖 거드름을 피우더니, 나 같으면 쪽팔려서 벽에 대가리 박고 자살하겠다. 내 사지를 잘라 거대 거미의 먹이로 준다고 했지? 이제 내가 네놈의 사지를 잘라 거대 거미의 먹이로 주마.”
이세준이 조금 전 당한 모욕을 복수하기 위해 신랄하게 강상우를 공격했다.
강상우는 얼마나 약이 올랐는지 창백했던 얼굴엔 열이 올라 다시 핏기가 돌 정도였다.
“닥쳐, 이 새끼야! 넌 내가 꼭 죽이고 만다!”
직접 검을 맞대고 싸우는 경일보다 그의 뒤에 숨어서 깐죽대는 이세준이 더 미울 정도였다.
“죽여 봐. 이 머저리 새끼야.”
경일은 굳이 이세준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죽지 않고 덤비는 모습이 자신과 닮은 점이 있어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강상우의 악독함을 징벌하려면 오히려 이것으로 부족했다.
“으드드득!”
강상우의 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이제 그만 끝내자.”
이제는 경일이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챙, 챙, 챙, 챙, 챙!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서로 얽히며 치열하게 서로를 제압하려 움직였다.
둘 다 승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힘과 스피드에서 우세한 경일이 강상우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경험과 창의력? 기껏 눈에 모래나 뿌리는 놈이 입만 살아서는. 여기서도 창의력을 한 번 발휘해 봐. 대신, 빨리하는 게 좋을 거야. 난 네 비겁함에 질려 버렸거든.”
“잠, 잠깐, 잠깐만 멈춰. 할 말이 있어.”
강상우가 급하게 뒤로 물러나며 애원하듯 말했다.
“이번엔 부탁하는 작전이냐? 실망인데. 좀 더 창의력을 발휘해 봐.”
경일이 인정사정이 검을 후려쳤다.
강상우는 경일의 서슬 퍼런 기세에 밀려 막는 것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개 같은!”
갑옷이 가르고 들어온 경일의 검이 강상우의 옆구리에 긴 스크래치를 남겼다.
옆으로 쭉 그어진 상처를 따라 새빨간 피가 몽글거리며 맺히더니, 곧바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경일은 자신이 입은 상처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강상우는 옆구리의 상처가 결려 움직임이 갈수록 부자연스러워졌다.
결국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심장에 경일의 검을 허용했다.
“커억!”
식도를 타고 올라온 새빨간 피를 토해 내며 그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내렸다.
삶의 미련이 가득 담긴 그의 눈동자에서 점점 생기가 빠져나갔다.
“우와아아아아아!”
이세준이 기뻐 날뛰자 숨죽이고 있던 헌터들도 기뻐했다.
“형님! 믿고 있었다고요! 에라이, 빌어먹을 놈! 카~악, 퉤!”
“나보다 네가 진짜 난놈이다. 내가 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대들었어? 용기인 건지, 만용인 건지.”
경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당연히 용기죠. 전 불의를 보면 못 참거든요.”
이세준이 가슴을 활짝 펴며 자신을 어필했다.
“네가 보기엔 철이 없는 거 같은데. 뭐, 그건 그거고, 일단 여기서 나가자. 부길드장님도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하니까.”
“네!”
이세준이 눈치 빠르게 우해수를 부축했다.
경일은 우선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할지 알아야 했기에 감각을 집중했다.
여전히 사방에서 던전 핵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던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트릭일 것이다.
그는 조금 전 강상우와 싸움에서 마나를 일으켰을 때, 사방에서 느껴지는 던전 핵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감각을 집중하며 처음 던전 핵의 존재감을 느꼈을 때의 느낌과 같은 곳을 찾았다.
“됐다.”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한 방향을 선택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