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35화 (235/300)

[235화] 사절단

꽝, 꽝, 꽝, 꽝!

실력이 숨길 필요가 없게 되자 경일은 전력을 다해 벽을 부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경일은 사람들을 이끌고 앞으로 전진했다.

당연히 거대 거미를 만날 때도 많았다.

다행히 크기가 정해진 방이라 거대 거미의 숫자는 일정량을 넘지 못했다.

복도에서처럼 수많은 거대 거미가 덤비면 경일이라도 위험할 수 있었지만, 방에 갇혀 있는 거대 거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가끔 경일을 지나쳐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을 습격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몸은 하나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세준이 용기 있게 나서서 시간을 끌었다.

그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만용이 아닌 용기인 게 맞았다.

그런 이세준에게 경일은 힐링 포션을 아끼지 않고 먹였다.

피잇!

거대 거미의 단단한 갑피가 마나가 깃든 검에 가볍게 잘려 나갔다.

크기기긱긱!

목을 긁는 듯한 섬찟한 소리와 함께 거대 거미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거대 거미들을 처리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벽을 뚫고 가다 보면 헌터의 시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다들 힘을 합쳐 나아가는 방법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이기심을 버리고, 부족한 식량을 조금씩 양보하며 힘을 합쳐 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충분히 뚫을 수 있는 시련이었는데… 안타깝네. 이 모든 건 강상우의 이기적인 욕심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 그가 조우한 헌터들을 규합해 나가기만 했어도 벌써 던전의 핵을 깰 수 있었을 텐데.’

실제 경일이 던전의 핵으로 향하면서 뚫은 벽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헌터들이 이미 많은 벽을 뚫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경일은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마지막 벽을 뚫었다.

벽이 무너지면서 던전 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이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던전 핵은 고고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던전 핵을 깨부쉈다.

그와 함께 육중한 소리가 들렸고, 헌터들을 가두었던 벽이 사라지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형님,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고생했다.”

이것으로 던전 폐쇄에 성공했다.

경일은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에게 자신이 싸운 것을 비밀로 해 줄 것을 부탁했다.

헌터들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얼마나 지켜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멀기는 했으나, 다들 기분 좋게 돌아갈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살아남은 인원은 19명이었다.

80명의 넘는 헌터가 이번 던전 공략에서 죽었다.

미로가 발동된 후로 헌터들은 대부분 같은 헌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번 던전 공략에 너무 많은 헌터들이 죽자 헌터 협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살아남은 헌터 중 몇몇은 자신의 몫이 늘어났다면서 기뻐하기까지 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여러모로 씁쓸한 결과를 남기고 무등급 거대 던전 폐쇄는 끝이 났다.

* * *

패드래건 영주의 집무실에서는 두 사람이 한창 작당 모의 중이었다.

“영주님, 영지전 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게렉스가 물었다.

“그런대로 준비하고 있네. 자네는 어떤가?”

“저도 나름 준비하고 있긴 한데, 역시 돈이 문제네요. 병사들 월급도 밀린 상태인데다가 낡은 장비들을 교체하는데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뭐, 나도 사정은 마찬가지네.”

이들은 처지는 좋지 않았다.

거의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두 영지는 누구라고 할 거 없이 막대한 빚에 허덕이고 있었고,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이자를 갚기에도 버거운 상태였다.

이런 처지에 목돈이 들어가는 영지전 준비를 하려니 가랑이가 찢어질 판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영주님…….”

게렉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눈빛을 빚내고 패드래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을 받은 패드래건의 눈에서 기대감이 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알고 보니 게렉스는 누구보다 모사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통행세 때도 그렇고, 영지의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영지전 전에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단을 보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항복을 권유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패드래건이 다리를 꼬고 앉아 상체를 뒤로 젖히곤 의자에 기대 팔을 꼬며 게렉스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영지전을 하지 않고 자포리자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뜯어내는 겁니다. 혹시, 알리사 영주 나바론 스타테인 자작을 기억하십니까?”

“알고는 있지. 스탄다비아와의 영지전에서 지는 바람에 목이 달아나지 않았나? 그 멍청한 작자는 왜?”

갑자기 주제와 상관없는 인물의 이야기가 나오자 패드래건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겨우 스탄다비아에 무너질 만큼 멍청한 놈이었지요. 자포리자가 발톱을 숨긴 것도 모르고 방심하다가 제대로 당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건 스탄다비아와 알리사의 영지전이 일어난 이유입니다.”

게렉스가 눈을 빛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알아본 바로는 나바론 자작은 매년 스탄다비아에서 거액을 뜯어 왔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건 우리도 충분히 시도해 볼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백작님이나 저나 영지전 준비로 허리가 휘다 못해 부러질 지경 아닙니까? 그러니 영지전을 하지 않고 나바론 자작처럼 스탄다비아에서 돈을 뜯어내는 겁니다. 통행세를 걷을 때 꽤 짭짭하게 이득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염색된 천도 말고 있으니, 그 몇 배의 돈을 영지전 없이 뜯어낼 수 있을 겁니다.”

“음, 스탄다비아를 정복하지 않고 협박해서 돈을 뜯자라…….”

패드래건이 손을 씻듯이 얼굴 앞에서 두 손을 비비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게렉스의 의견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한 번 모사를 꾸미다가 호되게 당한 기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마나 연공법과 비누 만드는 방법, 그리고 무기를 빼돌리려다 돈은 돈대로 잃고 영지 최고의 기사도 잃지 않았는가.

자포리자가 자신을 얼마나 비웃었을지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 하고, 그때 이후로 자포리자에게 더욱 깊은 원한을 가졌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쓸어버리겠다는 마음을 먹은 터라 게렉스의 의견에 동의하는데 망설임이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긴 힘들었다.

당장에도 돈이 들어갈 곳이 천지였다.

이대로 가다 까딱 잘못하면 영지전을 준비하다 자신이 먼저 무너질 판이었다.

‘당장 망하게 생겼는데, 내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지.’

패드래건은 게렉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나쁜 의견은 아닌 거 같군.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패드래건도 동의하고 나서자 이야기는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그래 얼마를 요구할 생각인가?”

“한 달에 오천 골드씩 어떻습니까?”

“오천 골드?”

게렉스의 말에 패드래건이 놀란 듯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네. 그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야 많이 받으면 좋지만, 가능하겠는가?”

오천 골드는 왕국 재상의 3년 치 연봉에 맞먹는 액수였다.

그런 엄청난 돈을 다달이 그것도 두 영지에 각각 내라니, 패드래건이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게렉스는 이전에 프라인을 막아 준다고 돈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자포리자는 그때의 요구를 곧바로 거절했고, 그는 자존심이 상할 때로 상한 상태였다.

이번 기회에 게렉스는 자포리자의 등골까지 빨아 먹을 작정을 했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지요. 영지민을 쥐어짜든, 몬스터를 쥐어짜든. 그리고 이번 기회에 스탄다비아의 병력을 아예 해산시킬 생각입니다. 대신, 우리의 병력이 스탄다비아에 상주하는 거지요. 그놈의 팔다리를 모두 잘라 버리면 우리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호, 아주 좋은 생각이야. 우리의 병력이 스탄다비아에 상주하면 굳이 영지전을 하지 않아도 되지. 역시 자네의 머리는 따라올 자가 없어.”

패드래건이 게렉스의 계획이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영지전을 승리하는 것보다 더 큰 승리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둘은 벌써부터 배가 불렀다.

“아 참, 사절단은 누구로 보낼 생각인가?”

“스벤슨 호킹 자작은 어떻습니까? 자포리자와 같은 자작이니 무게감에서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똑똑한 작자이니 우리의 뜻을 잘 이해해서 알아서 잘할 거라 생각합니다.”

“스벤스 자작이라… 뭐, 나쁘진 않군. 좋아, 사절단의 대표로 그를 보내기로 하지. 그럼 사절단의 규모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우리의 힘을 과시해야 하니 규모는 좀 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포리자가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니, 이번 기회에 혹시 모를 영지전을 대비해서 군대의 진입로까지 조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몬스터 숲 안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혹시 모를 몬스터의 위험에 대비도 하고요.”

“좋군. 그럼 기사 스무 명에 병사는 200명으로 해서 가는 걸로 하지.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네!”

“네, 백작님. 그 정도 인원이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기사와 병력은 곧바로 동원할 수 있으니, 최대한 이른 시간 안에 사절단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중요한 문제는 모두 논의가 끝났으니 술이나 한잔하세나. 오늘 자네가 온다고 해서 좋은 술을 준비해 놓았네.”

“감사합니다, 백작님.”

“뭘 감사까지. 이제 우리는 가족 같은 관계 아닌가. 앞으로도 자네와 내가 힘을 합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어? 스탄다비아의 징벌이 끝나고 나면 그 힘을 바탕으로 이 지역의 패자로 거듭나 보자고. 그럼 중앙 정계에서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야.”

“역시 큰 그림을 그리는 건 백작님을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하하하, 아닐세. 자네의 작전이 최고지. 머리 쓰는 건 자네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거야.”

이들은 서로를 칭찬하며 기분 좋은 술자리를 가졌다.

3일 뒤, 스탄다비아를 향해 스벤슨 호킹 자작이 이끄는 사절단이 출발했다.

스무 명의 기사와 200명의 병사가 특별히 신경 쓴 갑옷을 입고 출정하는 모습은 나름 위엄이 넘쳤다.

이 정도라면 스탄다비아에게 위압을 주기에 충분하리라.

“출발하지.”

스벤슨이 옆에 있는 기사에게 말하자 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출발!”

스벤슨을 포함한 221명의 사절단이 스탄다비아로 출발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사절단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준비해 둔 말을 타고 달렸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가는지 말의 입에서 연신 더운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고삐를 채 가며 더욱 빠르게 달려 나갔다.

.

.

.

사절단은 알리사를 지나 옛 스탄다비아의 영지에 도착했다.

“대단하군. 이런 영지를 두고 새로운 곳으로, 그것도 몬스터의 숲으로 들어가다니 속이 아주 쓰렸겠어.”

스벤슨의 눈에 넓게 펼쳐진 농지와 그 옆을 끼고 흐르는 수로가 보였다.

급하게 떠났는지 수확하지 못한 농작물이 잡초와 함께 웃자라 있었다.

자신의 땅과 다르게 풍성하게 자라고 있는 농작물을 보니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싶어질 정도였다.

“스탄다비아는 농사가 잘되지 않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농사가 잘됐지?”

이건 스벤슨 혼자만의 감상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기사들과 병사들까지 농작물에 눈을 뺏기고 있었다.

특히 병사들은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었고, 가족들도 모두 농사를 짓고 있는 처지라 임무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농작물을 수확하고 싶을 정도였다.

사절단이 농지를 지나 도착한 곳은 알리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위해 새롭게 지어진 마을이었다.

반듯하게 닦인 길은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바둑판처럼 생긴 길을 따라 기존의 양식과 다른 튼튼한 황토 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둘러본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