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나쁜 예감
“소문으로 들은 자포리자라는 인물은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몽상가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이건 몽상가라기보다는 선지자에 가까운 사람이군.”
자포리자의 소문이 안 좋은 건 당연했다.
게렉스나 패드래건이 자신의 적을 칭찬할 리가 만무했으니까.
이 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잘 정비된 마을을 본 스벤슨의 눈이 반짝였다.
스탄다비아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자포리자가 얼마나 이곳을 아꼈는지 그의 노력이 보일 정도였다.
당연히 자포리자라는 인물에 대한 편견이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상대할 인물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게레스와 패드래건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자작님,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이번에 동행한 가문의 기사장 셀렉이 스벤슨의 안색이 좋지 않을 것을 보고 물었다.
“이번 임무는 득보다 실이 많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두 영주님은 자포리자가 겁을 먹고 옛 영지로 도망을 갔다고 했지만, 이곳을 둘러보니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스탄다비아가 열악한 상황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런 곳에서 이만큼의 발전을 이루어 냈다는 건, 자포리자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뜻과 일맥상통하지.”
스벤슨은 게렉스가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지식을 추구하는 학자에 가까운 사람인 만큼 호기심이 강하고 누구보다 관찰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누구보다 빠르게 사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옛 스탄다비아를 둘러보는 것만으로 자포리자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추론해 냈고, 그런 인물과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자신들의 군사력이 훨씬 뛰어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포리자가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벤슨은 걱정을 가슴에 안고 옛 스탄다비아를 지나 몬스터의 숲으로 들어섰다.
몬스터 숲으로 들어서자 기사들과 병사들이 침을 꼴깍 삼킬 만큼 긴장이 되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하늘을 닿을 듯 뻗어 있는 키 큰 나무들과 함께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낙엽이 썩어 가며 나는 흙냄새와 언젠지 죽었는지 모를 뼈만 남은 동물들의 사체도 간간히 보였다.
하늘에 잔뜩 낀 구름은 햇빛을 가렸고, 안 그래도 음침한 몬스터 숲이 더욱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잔뜩 흐린 날씨까지 더해지자 그들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처음 와 보는 곳이었고, 무엇보다 몬스터 숲의 악명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긴장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그 수가 훨씬 적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긴장은 풀렸고, 여기저기서 안도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휴, 괜히 쫄았네.”
“그러게 말이야. 생각보다 몬스터 수가 얼마 없는데?”
“여기가 몬스터 숲이 맞긴 한 거야? 소문으로 들은 거랑은 너무 다른걸? 이 정도라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스탄다비아에 도착할 수 있겠어.”
“몬스터 숲에 관한 소문이 과장된 게 틀림없어.”
“뭐, 어쨌든 몬스터가 없으면 우리야 좋지.”
기사들과 병사들은 얼굴이 밝아진 것과 다르게 스벤슨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이상한데… 여기가 몬스터 숲이 맞긴 한 건가? 몬스터가 이렇게 없을 수도 있나? 몇십 년 동안 들었던 소문이 거짓일 리가 없잖아. 이건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는 이 상황이 설명되질 않아.’
몬스터 숲으로 들어갈수록 스벤스의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 갔다.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좋은 일이었지만, 자신의 예상과 정반대로 흘러가는 이 상황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밀려오기 직전의 고요 같았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잖아. 괜히 예감이 안 좋다고 미리 움츠러들지 말자.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잖아.’
그는 발길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영지의 대표로 가는 사절단을 개인적인 느낌만으로 되돌릴 수 없었다.
그가 맡은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조금만 더 가면 스탄다비아인데, 여기까지 온 마당에 포기는 절대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성과는 가져가야 했다.
시간이 지나고, 숲에 어둠이 밀려들었다.
병사들은 익숙한 듯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몬스터를 막아 줄 울타리를 대충이라도 만들고, 곳곳에 불을 밝혀 어둠을 밀어냈다.
어설프지만 나무와 풀을 이용해 스벤슨과 기사들이 잘 곳을 만들었다.
다들 동네 뒷산에서 야영하는 듯이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맞이한 몬스터 숲의 첫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간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 보니 병사들의 컨디션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스탄다비아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5만 명이 지나간 만큼 숲에는 많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절단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스탄다비아로 나아갔다.
“자작님, 몬스터 숲이라 가는 길이 험할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병력이 움직이는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입니다.”
세렉의 말에 스벤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임무 중에는 새로운 스탄다비아로 가는 길을 정찰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틀의 행군 끝에 스탄다비아가 가까워졌을 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란 벽이었다.
정확히는 협곡을 막아선 커다란 방벽이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방벽은 한눈에 보기에도 튼튼해 보였다.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단단하고 늠름한 모습에 스벤슨의 얼굴에 커다란 당혹감이 피어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들이 이곳으로 옮겨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거대한 방벽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놀란 건 스벤슨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려는 듯 급히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돌아간다. 서둘러!”
스벤슨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옛 스탄다비아의 모습을 보고 예감이 안 좋았던 터라, 그는 긴장을 풀지 않았었다.
그러다 방벽을 보는 순간, 영지전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모든 병력이 덤빈다고 해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방벽을 뚫으려면 방벽을 무너트릴 마법사와 몇만의 병력이 필요해 보였다.
그의 다급한 명령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새 나타난 스탄다비아 병력이 길목을 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스벤슨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스탄다비아 병력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간다고 미리 알린 것도 아니었고, 아직 스탄다비아에 들어선 것도 아니었다.
멀리서 방벽의 모습을 확인했고, 그 순간 곧바로 되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만약 방벽 위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해도 공간 이동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뒤에서 나타날 수 없었다.
스벤슨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질 않았다.
사실 사절단이 프라인에서 출발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바로 첩보장 블라도였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동태를 꾸준히 살피던 그가 이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스탄다비아에 복귀해 이 사실을 알렸다.
자포리자는 사절단을 대비해 병력을 모았다.
처음에는 방벽에서 이들을 맞아 싸울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생각을 바꾸었다.
사절단의 규모로 봤을 때, 이들이 싸우지 않고 돌아갈 확률이 높아 보였던 것이다.
안 그래도 복수만을 꿈꿔 왔는데,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에 방벽이 있다는 사실은 무조건 숨겨야 하는 극비였다.
방벽은 프라인과 아드리온과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종교 군과 싸우기 위한 것이었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프라인과 아드리온과의 영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숨길 생각이었다.
혹여나 프라인과 아드리온이 방벽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영지전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포리자는 미리 숲에 병력을 숨기고, 이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럴 수가…….”
스벤슨은 스탄다비아의 군대에 포위당하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자신들이 온 것을 이들이 미리 안 것도 의문이지만, 사절단인 자신들을 포위한 것도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스탄다비아의 흉흉한 기세를 본 스벤슨은 곧바로 자포리자의 의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들을 절대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스벤슨이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앞으로 나와 스탄다비아 군대를 보고 소리쳤다.
“우리는 프라인과 아드리온을 대표해서 온 사절단이다. 난 사절단의 책임자인 스벤슨 호킹 자작이다. 그쪽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그의 말이 끝나자 큰 덩치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자포리자였다.
“내가 스탄다비아 영주 자포리자 보일이다.”
“자포리자 자작, 지금 그대의 행동은 무슨 뜻인가? 사절단으로 온 우리를 포위하다니,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당장 군대를 물리고 대화에 응하라.”
스벤슨이 자포리자를 꾸짖듯 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하!”
그 모습을 본 자포리자가 입을 크게 벌리고 시원하게 웃었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귀족이란 작자가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가!”
스벤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포리자를 째려보았다.
“지금 감히 우리에게 예의를 따지는가? 간자를 보내어 우리의 보물을 훔치려 하고, 그게 안 되니 힘으로 온갖 핍박을 한 그대들이. 좋다. 뭐 빤한 이야기일 테지만, 여기까지 온 성의를 생각해서 이야기를 들어주지.”
자포리자가 흥미로운 얼굴로 스벤슨을 바라봤다.
스벤슨이 곧바로 입을 열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런 분위기에 한 달에 오천 골드를, 그것도 각각의 영지에 바치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상황인데, 거기다 대고 기름을 붓는 바보짓이었다.
거기다 만약 이 말을 한다면 곧바로 자포리자가 뛰어와 자신의 목을 벨 것만 같았다.
‘오히려 곧바로 영지전을 신청하는 것이 저자의 기분을 덜 나쁘게 하는 방법일 거야. 설마 영지전을 신청하러 온 사절단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겠지?’
스벤슨은 지금까지의 관습을 믿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스탄다비아에 영지전을 신청하러 왔다. 오늘부터 한 달 뒤, 영지전을 할 것을 제안한다.”
“영지전이라? 그래, 좋다. 우리도 바라던 바다.”
“그럼 영주님의 말을 전달했으니 우리는 돌아가겠다.”
스벤슨은 자연스레 할 말을 마쳤다는 듯이 길을 열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스탄다비아의 군대는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것인가? 길을 열라!”
스벤슨이 힘주어 이야기해 보지만,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자포리자가 그의 롱소드를 칼집에서 뽑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이건 자신들을 보낼 줄 의사가 없다는 표현이었다.
“우리는 사절단이다. 지금까지 사절단에게 위해를 가한 적은 왕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베르아스 왕국의 귀족으로서 이 무슨 추태인가! 당장 길을 비켜라!”
스벤슨은 흉흉한 분위기에 지지 않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주어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는 사절단이 아니다. 우리의 적일뿐이다. 아니, 스탄다비아를 핍박하고 우리의 보물을 노리는 도적 떼일 뿐이다. 나에겐 적에게 베풀어 줄 아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은 같은 하늘을 이고 함께 살 수 없는 스탄다비아의 원수다.”
자포리자의 엄중한 선언에 순간적으로 커진 눈동자에 이어 스벤슨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어 갔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