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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37화 (237/300)

[237화] 반격의 시작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자포리자를 쏘아보려 노력했지만, 왠지 자신 없어 보이는 그의 눈빛은 자포리자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것은 법도에 어긋난 짓이라고, 만약 자신들을 죽이면 프라인과 아드리온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영지전을 원하는 자포리자에겐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곤 입을 닫았다.

자포리자의 선언으로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가장 지위가 높은 자신이 되었다.

저들은 절대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

“모, 모두 싸울 준비를 해라.”

스벤슨이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명령을 들은 병사들의 움직임이 신통찮았다.

자신들보다 몇 배 이상 많아 보이는 스탄다비아의 군대를 보고 지레 겁을 먹은 것이었다.

“이런 제길! 이 멍청이들이!”

답답한 마음에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이들은 우리를 절대 살려 주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보고서도 모른단 말인가. 이들이 여기 있는 이유를 정녕 모르겠느냐? 저들은 저 방벽을 숨기려 하고 있지 않으냐! 방벽을 본 우리를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야!”

최선을 다해도 힘든 싸움인데, 싸우기 전부터 마음에서부터 지고 들어갔다.

스벤슨이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해 보지만, 스탄다비아 군대의 압도적인 기세에 이미 마음이 꺾여 버린 병사들의 눈은 살아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역전시킬 뭔가가 필요했다.

“세렉, 일기토를 신청해라.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믿을 건 자신의 기사인 세렉 밖에 없었다.

세렉은 차마 자신이 주군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차피 자신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로 보아 스탄다비아와의 전투는 피할 수 없다.

그럴 바에야 일기토를 신청해 기사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나마 자신을 가장 영광스럽게 만들 수 있는 길이었다.

세렉은 천천히 말을 몰고 앞으로 나갔다.

“난 기사 세렉이다. 자포리자 자작에게 일기토를 신청한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그의 목소리는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이미 패색이 짙은 것을 잘 알고 있는 병사들은 그에게 한가락 기대를 걸었다.

그건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스벤슨도 그가 이기기를 간절히 빌었다.

만약 일기토에서 지게 된다면, 이 전투는 더욱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끝은 당연히 자신의 목숨이리라.

자포리자가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의 옆에서 굵고 중우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주님, 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십시오. 반드시 저자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기사장 칼튼이 강렬한 눈빛으로 자포리자의 눈을 바라봤다.

“알겠다. 그럼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지.”

자포리자는 칼튼이 질 거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스탄다비아에서 자신에 이어 두 번째로 강했고, 이젠 소드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을 정도였다.

칼튼이 이토록 빠른 성장을 보인 건, 경일이 이번에 새로 보내 준 마나 포션 때문이었다.

기존의 것보다 몇 배로 뛰어난 효능을 가진 마나 포션을 거의 물처럼 마실 수 있게 된 뒤부터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건 왕국에서 가장 부자인 왕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귀한 마나 포션을 물처럼 마시다가는 왕국의 재정이 파탄 날 수도 있었다.

세렉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며 나아가는 칼튼에게서 한 지역의 패자다운 위상이 서려 있었다.

그의 눈은 깊으면서도 더없이 맑게 빛나고 있었으며, 행동 하나하나에 위엄이 넘쳐흘렀다.

세렉은 칼튼이 자신을 향해 오는 모습을 보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가 풍기는 기세는 자신이 결코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세렉을 태운 말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앞발을 들며 뒷걸음질 치려고 했다.

급하게 말고삐를 당겨 안정시켜 보지만, 겁을 먹은 말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군인 스벤슨을 처량하게 바라보았다.

제발 이 싸움을 말려 달라는 무언의 뜻을 담은 눈길을 보냈지만, 스벤슨은 고개를 돌림으로써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에게도 남은 수단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스탄다비아의 기사장 칼튼이다.”

칼튼이 자신의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햇빛을 받은 미스릴 검이 강렬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그와 동시에 마나가 주입되어 파란빛을 내뿜었다.

형체가 없던 마나가 점점 진한 빛을 내더니, 검을 둘러싸고 또 하나의 검을 만들어 냈다.

세렉은 칼튼의 검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지금껏 저처럼 짙은 색깔과 분명한 형태를 가진 오러를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검을 흘깃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공허했다.

최선을 다해 검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지만, 형태는커녕 옅은 빛을 내며 안개처럼 퍼져 나갈 뿐이었다.

활력 없는 그의 얼굴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했다.

칼튼은 생각보다 약한 상대에 실망했지만, 일기토에 임하는 기사로서의 예의는 잃지 않았다.

그는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세렉은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몸놀림으로, 온몸의 힘을 짜내 칼튼의 검을 막았다.

다행히 늦지 않게 칼튼의 검을 막을 수 있어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이 경악으로 바뀌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칼튼의 검이 조금의 속도도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이상했다.

분명 검으로 막았는데…….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칼튼의 검이 그의 검을 두부처럼 자르고 지나가는 것을 본 것이다.

서걱!

검이 잘린 소리가 그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목이 몸과 분리되어 차디찬 바닥을 굴렀다.

“와아아아아아아!”

스탄다비아의 군대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반대로 사절단의 사기는 바닥으로 기어들어 갔다.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온 기사들의 얼굴도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자신들 중 가장 강한 세렉이 단 한 수도 받아 내지 못하고 명을 다했다.

왠지 자신들이 모두 덤벼도 칼튼, 한 명도 당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당해 내지 못할 것이었다.

“이 새끼들아, 정신 차려! 기사란 작자들이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다니! 기사의 수치로 남고 싶지 않으면 정신 차려!”

늘 점잖았던 스벤슨이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기사들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댔다.

“항복하라. 무기를 버리고, 손을 머리 뒤에 올리고, 바닥에 꿇어앉은 자는 살려 준다. 그렇지 않은 자는 모두 목을 베겠다.”

그 순간, 자포리자의 엄중한 목소리가 전장을 뒤덮었다.

마나가 실린 목소리는 사절단의 모든 이들의 귀에 그대로 꽂히듯이 들렸다.

쨍그랑!

가장 먼저 무기를 버린 자는 한 병사였다.

그가 바닥에 꿇어앉아 손을 머리 뒤로 올리고 깍지를 끼자, 마치 도미노처럼 병사들이 같은 행동을 했다.

그들은 패배를 자인한 자의 조심스러운 눈길로 자포리자를 바라보았다.

“안 돼! 모두 일어서! 싸우라고! 싸우란 말이다!”

스벤슨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말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자신이 누구보다도 먼저 항복을 선언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이 사절단의 대표인 자신을 살려 줄 리가 없었다.

스탄다비아의 군대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질서정연했으며, 발걸음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잘 먹어서 그런지 그들의 얼굴엔 생기가 넘쳤으며, 힘 있는 모습이었다.

절대 일개 변방의 군대가 가질 수 있는 위상이 아니었다.

최소 왕의 직할부대나 가질 수 있는 위엄이 그들에게서 흐르고 있었다.

기사들을 제외한 모든 병사가 무기를 버리고 항복을 선언했다.

그나마 기사들이 스벤슨을 둘러싸고 버티고 있지만, 무기를 쥔 그들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이 새끼들아, 모두 일어나서 싸워! 만약 이대로 항복한다면 영지에 있는 너희의 모든 가족들의 목을 벨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여기서 싸워서 죽는 것이 가족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스벤슨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병사들을 향해 무섭도록 화를 냈다.

그 모습에 반 정도 되는 병사들이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자신의 목숨이 중요해도 가족의 생명보다 귀할 수는 없었다.

“모두 그대로 있어라. 너희 가족들의 안위는 걱정하지 말라. 영지전이 끝나기 전까지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프라인과 아드리온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곳의 소식이 전해질 리가 없으니 가족들은 안전할 것이다.”

자포리자의 지엄한 말에 병사들은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고, 그 모습을 본 스벤슨은 미쳐 날뛰었다.

“모두 일어나서 싸워라! 영지전에서 누가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우리의 병력은 스탄다비아의 다섯 배가 넘는다. 영지전이 끝나는 순간, 너희와 가족들의 목숨은 끝이라는 것을 모르겠느냐?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싸운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 어서 일어나 싸우라고!”

스벤슨이 입에 거품을 물고 병사들을 향해 저주와 멸시를 담은 목소리로 악을 써 보지만,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족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협박은 통했지만, 영지전의 승리를 조건으로 하는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자신들이 속해 있는 군대는 절대 스탄다비아의 군대를 이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이런 미친! 이 버러지 같은 것들아 나를 지키라고! 너희의 목숨을 모두 바쳐 나를 지키란 말이다. 그것이 정의고, 너희의 의무다!”

얼굴은 물론 피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스벤슨은 이 상황이 믿겨지지 않는지 발을 쿵쿵 구르며 연신 욕을 내뱉었다.

자작까지 오른 귀족이라곤 상상도 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저잣거리의 파락호와 같은 모습에 기사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순간, 고작 이런 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회의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온갖 폼을 다 잡던 귀족도 목숨 앞에서는 특별할 게 없었다.

아니, 더 추한 모습이었다.

스벤슨의 모습에 실망한 기사 하나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 도화선이 되어 나머지 기사들도 모두 항복을 선언했다.

“히익!”

놀란 스벤슨의 입에서 공포로 점철된 신음이 튀어나왔다.

이제 이곳에 서 있는 이는 스벤슨, 혼자뿐이었다.

어차피 죽을 모습 죽어도 무릎을 꿇기 싫었으나, 다리는 그런 그의 바램을 무참히 거절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저놈의 품에 영주가 써 준 친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와라.”

“네.”

기사 한 명이 재빨리 스벤슨에게 다가가 그의 품을 뒤졌다.

그 순간, 스벤슨은 정신을 차렸다.

영주가 써 준 친서는 절대 자포리자에게 보여선 안 됐다.

스탄다비아의 군대를 보기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다달이 오천 골드를 바치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나마 곱게 죽으려면 이것을 보이면 절대 안 됐다.

하지만 아무리 친서를 뺏기지 않으려 버텨 보아도 기사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기사는 가볍게 그에게서 영주의 친서를 뺏어 자포리자에게 가져다주었다.

자포리자가 봉투에서 친서를 빼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태산 같은 얼굴에 깊은 굴곡이 생겼다.

자포리자의 표정에 분노가 서려 가는 것을 본 순간, 그는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저놈의 목을 한 달 뒤 알리사의 우르비노 언덕에서 영지전을 하자는 편지와 같이 상자에 넣어 프라인 영주성 앞에 버리고 와라.”

“알겠습니다.”

칼튼이 검을 빼들고 스벤슨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헤엑!”

스벤슨의 눈에는 칼튼이 커다란 낫을 든 사신처럼 보였다.

그는 뒤로 기어가며 칼튼과 멀어지려고 애썼다.

그 추한 모습에 기사들과 병사들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자신들에게는 당연하다는 듯이 죽을 자리로 뛰어 들어가라고 온갖 협박을 일삼은 그가,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적에게 자비를 구하는 모습은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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