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시작된 영지전
“그래, 그 모든 게 우리 것이 된다니, 그건 기분이 좋군. 짜증이 나는 놈이긴 해도 어찌 보면 우리에겐 은인이랑 다름없기도 해. 오늘 놈의 목을 베려고 했는데, 살려 줘야겠어. 크크크, 죽여 달라고 애원해도 절대 죽이지 않을 거야. 내 인생 최고의 전리품이 될 예정이니, 그만큼 대접을 해 줘야지.”
“하하하하! 백작님의 창의성은 정말 끝내줍니다. 전 저놈의 목을 벨 생각만 했지, 그런 멋진 계획은 생각지도 못 했습니다. 이거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요? 저도 정기적으로 들러 놈의 얼굴을 보면서 술 한잔해야겠군요.”
그들은 이미 영지전에서 이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 병력에서만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일부러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는 싸움인 것이다.
양쪽 군대의 정렬이 완전히 끝났을 때, 태양은 그들의 머리 위에 위치해 있었다.
완전무장 한 군대는 내리쬐는 햇빛에 온몸이 달아오르고, 긴장감에 싸우기 전부터 온몸에 땀을 흘렸다.
사기는 당연히 프라인과 아드리온 연합군이 훨씬 높았으나, 의외로 땀을 흘리는 병사도 이쪽이 월등히 많았다.
마나를 몸속에 품고 있는 경일이 남들보다 추위와 더위에 강하듯, 날씨의 영향이 적은 것으로만 봐도 스탄다비아의 군대가 질적으로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영주는 이런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이들이 지금까지 마신 마나 포션의 개수를 알았다면, 감히 두 영주는 영지전을 벌일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특히 스탄다비아가 옛 선조의 땅으로 감으로써 이들은 스탄다비아의 정보를 얻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시도해 보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간자를 파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몬스터 숲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 만큼 뛰어난 실력자가 필요한데,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가 간자로 갈려고 할 리도 없었고, 만약 보낸다고 해도 그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휘하의 기사를 보내기도 애매했다.
몬스터의 숲을 혼자 뚫고 지나가야 하는 만큼, 힘들게 키운 기사를 몬스터에게 허무하게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침투시키려면 여러 명의 기사가 필요한데, 그 역시 부담이 컸다.
우선 기사들이 좋아할 만한 임무도 아닌데다가, 스탄다비아의 정찰이 필요하냐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워낙 그들의 사정은 잘 알고 있는 터라 이주했다고 해서 그들이 크게 나아질 것은 없었다.
비누와 염색된 천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하지만, 군사력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늘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사력을 단기간에 늘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역시 용병뿐이었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죽을 게 뻔한 싸움에 뛰어들 용병은 없었다.
제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목숨이었으니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스탄다비아 군대를 봐도 그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스탄다비아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그들의 병력은 고작 400명이 다였으니까.
패드래건과 게렉스는 뜨거운 햇빛을 가려 주는 천막 안에 설치된 편안한 의자에 눕듯이 앉아 술을 홀짝였다.
이미 이들에겐 지금의 영지전은 색다른 유희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제스턴, 시작하지.”
“네, 영주님.”
기사 제스턴은 이번 연합군의 지휘를 맡았다.
패드래건 백작의 수석 기사로,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자였다.
이 일대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그가 이번 영지전을 이끌었다.
제스턴이 두 영주가 있는 천막에서 벗어나 기사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 영지와 다른 갑옷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바로 용병들이었다.
게렉스는 치밀한 자였다.
사자도 토끼를 잡을 때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아무리 쉬운 싸움이라지만, 변수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었다.
그가 생각한 변수는 자포리자였다.
자포리자가 알리사에서 가장 강한 기사를 이긴 것은 유명한 이야기.
작은 알리사에서 이름을 날린 정도로는 자신의 기사를 따라오지 못하겠지만,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해 놓는 게 현명한 법이었다.
그래서 준비한 게 높은 경지의 용병 팀이었다.
그들의 몸값은 비쌌지만, 영지전에서 자신들이 입게 될 피해를 줄일 수 있으니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헤레이스 경, 준비해 주십시오.”
제스턴이 용병들 중 한 명인 헤레이스에게 정중히 말했다.
자신이 영지전의 총사령관이긴 하지만 헤레이스는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피닉스라는 용병 팀의 대장이자, 자신보다 높은 소드 익스퍼드 상급의 대단한 실력자였다.
사실 그의 팀은 이런 변방에 올 급이 아니었으나, 게렉스가 아는 귀족을 통해 이들을 특별히 초청했다.
헤레이스는 게렉스가 아는 귀족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고, 높은 보수에 혹에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헤레이스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휴렉스, 몸 상태는 어때? 이번 영지전의 시작은 너로 할 생각인데.”
“감사합니다.”
헤레이스가 지목한 이는 팀의 막내인 휴렉스였다.
이번 기회에 영지선의 선봉이라는 경험을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이런 변방의 영지전쯤이야 막내가 나가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헤레이스의 명을 받아 전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막내라곤 하지만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대머리에 거구인 그는 둥글게 생긴 얼굴형에 치켜 올라간 두 눈, 머리카락이 턱에 붙은 듯 풍성한 턱수염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덩치만큼 커다란 검에 마나를 불어넣고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오러가 이글거리는 검과 거구에서 나오는 위압감이 합쳐져 아군의 사기를 올리고, 적에게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휴렉스라고 한다. 뒈질 스탄다비아의 촌놈 새끼들아. 이 어르신이 오늘 특별히 너희의 옹이구멍 같은 눈에 비친 세상이 아닌 진정한 넓은 세상이 있음을 보여 주마. 대신 그 값은 바로 목숨이 될 것이다. 나의 지도를 받는 영광을 누릴 자는 지금 나서라.”
용병다운 걸쭉한 비아냥거림이 전장을 뒤덮었다.
생각지도 못한 휴렉스의 욕에 어안이 벙벙해진 스탄다비아 군대가 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일순간 깨어난 듯 스탄다비아의 군대가 소란스러워졌다.
그 모습에 휴렉스는 자신의 의도가 통했다 느끼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깨진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굴은 물론 대머리까지 붉게 타올랐다.
지금의 소란스러움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겁먹은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외침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 많은 지원자가 나섰다.
거의 50명 정도의 인원이 앞으로 나와서는 서로 자신이 싸우겠다고 난리였다.
자신도 용병으로 많은 전장을 다녀 봤지만, 이런 어이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겨우 400명밖에 되지 않은 군대에서 50명이나 자신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모습에 휴렉스는 황당한 듯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곧 정신을 차린 그의 얼굴은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박살 난 그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이런 개 같은 놈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휴렉스가 열을 받아 욕을 내뱉어 보지만, 그의 말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서로 자신이 나서겠다고 싸우기에 바빴다.
누군가는 자신이 나가겠다고 크게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는 아예 소리 지르는 이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고, 누군가는 앞으로 걸어가는 이를 급하게 잡았다.
자포리자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히려 흥미로운지 입가에 얕은 미소까지 보였다.
승리자는 탄두스였다.
강해지기 위해 평생을 마친 남자로, 알리사에서 투항해 스탄다비아 병사가 된 이였다.
누구도 외면하는 정찰조를 지원하듯 솔선수범하는 모습에 이제는 누구도 인정하는 완전한 스탄다비아 영지민이었다.
진즉에 자포리자에 충성을 맹세했고, 옛날 용병으로 일한 경험이 있어 스탄다비아 임시 상단의 단주로 활동 중이었다.
상행을 나섬으로써 그토록 좋아하는 싸움에서 한발 물러난 그에게 이번 영지전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는 50명의 지원자를 제치고 휴렉스에게 당당히 다가갔다.
“어이, 반가워. 난 탄두스라고 한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모든 힘을 내서 한 번 싸워 보자고.”
한동안 상인으로 활동해서 그런지 그의 말투는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사근사근한 말투였다.
안 그래도 머리끝까지 열이 뻗혀 있는데,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탄두스의 사근사근한 말에 뇌가 두개골을 뚫고 나와 폭발할 거처럼 화가 났다.
“이런 후레자식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장검을 내려쳤다.
거대한 힘이 탄두스를 단숨에 갈라 버리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덮쳐 왔다.
순간,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탄두스의 얼굴이 진지해지며 휴렉스가 내지른 검을 맞받아쳤다.
쩡!
전장에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파동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양 진영에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
두 강자의 일기토는 단 한 수로도 충분히 이곳에 모인 모든 이의 피를 끓게 했다.
“이 개새끼가.”
휴렉스의 입에서 거친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변방의 촌놈이 자신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직 여유롭다는 듯이 자신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기까지 하지 않는가.
안 그래도 자신과 싸우려는 사람들의 물결에 자존심이 상한 마당에 쉽게 공격이 막히자 휴렉스는 뚜껑이 열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대머리에서 김이 나기 시작한 그는 온몸의 힘을 다해 장검을 내려쳤다.
꽝, 꽝, 꽝, 꽝, 꽝!
두 개의 검이 부딪치자 포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잡은 검에서 전달된 진동으로 휴렉스는 손바닥이 찢어질 거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탄두스가 자신의 검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올 때마다 그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휴렉스는 거구에서 보이듯 누구보다 힘에 자신이 있었고, 그의 검술 역시 힘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용병 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힘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마나를 깨우치고 그느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덩치도 작은 탄두스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힘으로 맞서 오자 그는 더욱 약이 올랐다.
“야, 적당히 해. 너 그러다 금방 지친다. 내가 요즘 싸움에 목말라 있었거든. 그래서 빨리 끝낼 수가 없어. 너도 봤다시피 무려 50명의 지원자를 물리치고 왔는데, 너무 빨리 끝나면 내가 얼마나 허무하겠냐?”
탄두스는 입가에 느끼한 미소를 매단 채 느물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이런 미친놈이!”
휴렉스는 자신을 무시하는 탄두스에 말에 눈이 돌아갔다.
불 맞은 멧돼지처럼 그는 온 힘을 다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의 장검에 맺힌 오러가 더욱 선명해지며 밝게 빛을 냈고, 이제는 힘뿐만 아니라 검을 휘두르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의 강한 기세가 전장에 퍼져 나가자,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연합군 측 사기가 올라갔다.
하지만 연합군에서 단 한 명만은 웃고 있지 않았다.
바로 용병 대장 헤레이스였다.
휴렉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휴렉스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다른 곳이었다면 그의 행동을 즉시 말렸겠지만, 일기토를 하고 있는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