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일기토
‘멍청한 놈. 진검 승부에서 흥분은 금물이라고 그렇게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너의 뛰어난 자질이 오히려 생명을 갉아먹는구나. 상대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라고 누누이 말했건만, 흥분해서 상대를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다니. 누구보다 장래가 촉망되는 녀석이었는데 아깝게 됐군. 그나저나, 가벼운 일거리라고 생각한 곳에서 저 녀석을 잃다니. 이거, 손해가 큰데.’
헤레이스는 이미 휴렉스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된 거, 더 날뛰다가 죽어라.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나으니. 첫 싸움부터 지고 들어가다니… 곤란하게 됐는걸.’
헤레이스는 냉정했다.
휴렉스의 죽음보다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게 .더 손해였다.
용병단에게 늘 가족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그런 헤레이스와 다른 의미로 얼굴을 찌푸린 사람이 있었으니.
기사장 칼튼이었다.
“하~ 저 녀석 지금 뭐 하는 거지? 이런 중요한 싸움에서 장난을 치고 말이야.”
칼튼은 탄두스의 의도를 파악했다.
뼛속까지 기사인 그는 그런 탄두스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뭐 어떤가.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하지 않았는가. 귀엽게 봐주자고. 사람마다 다 똑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이런 자리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모습도 나쁘지 않아.”
자포리자는 드디어 스탄다비아에 자신이 바라던 모습이 나온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기본적으로 여러 의견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여러 생각이 모여 더 나은 미래로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곳이 다른 곳도 아니고, 영지전을 하는 중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우리가 당한 치욕을 확실히 갚을 수 있는,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저런 모습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탄두스는 자신이 맡은 일은 확실히 하지 않나. 즐기는 듯이 보여도 누구보다 이 싸움에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 테니 두고 보세.”
자포리자는 걱정이 가득한 칼튼을 보며 빙긋이 웃어 주었다.
옛날 같았으면 칼튼은 자신 앞에선 감정 자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이 섞인 의견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튼은 탄두스를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고 있었다.
“헉, 헉, 헉, 헉, 헉.”
휴렉스의 입이 벌어지고 단내가 났다.
절대 지치지 않을 거 같던 거구가 새파래진 얼굴로 힘겹게 호흡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설마 이 정도 실력으로 영지전의 선봉으로 나온 거야? 나 참, 어이가 없네.”
그에 반해 탄두스의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더럽게 생긴 인상을 험악하게 만들면 쉽게 이길 거라 생각했어? 아까 봤지? 네가 아무리 욕을 하고 험악하게 표정을 지어도 너랑 싸우려고 사람들이 줄을 선 거. 싸움은 얼굴로 하는 게 아니야.”
“씨발, 헉, 헉 개새끼가 헉, 헉 뭐라는 거야.”
휴렉스는 지치긴 했지만,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탄두스가 오래간만에 하는 실전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 방어 위주로 싸웠기 때문이다.
‘많이도 필요 없어. 한 방, 한 방이면 돼. 공격은 나쁘지 않아. 아니, 평소보다 더 잘 들어가고 있어. 그러니 조금만 더 강하게, 더 빨리 공격하면 이길 수 있어.’
휴렉스는 자신의 검을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방어하는 탄두스 때문에 열이 뻗친 모습이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받아 주니 평소보다 더 뛰어난 공격을 할 수 있던 것이니까.
“이거, 곤란한데. 처음과 같은 힘도 날카로움도 패기도 없잖아. 이 싸움이 지루해지는 순간 너는 끝이야. 그러니 최선을 다해 봐. 마지막 경고야.”
“헉, 헉, 무슨 개소리야? 죽여 버리겠어!”
피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해하던 놈이 계속해서 잘난 척하며 입을 놀리자 휴렉스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탄두스의 조롱이 이어질 때마다 마음이 검에 베이는 기분이었다.
그는 더 힘을 내려 했지만, 이미 지쳐 버린 체력이 회복될 리 없었다.
그리고 가장 문제는 단전의 마나가 비어 간다는 점이었다.
휴렉스는 코너에 몰렸고, 이제는 무리를 해서라도 싸움을 끝내야 할 시점임을 깨달았다.
“이 미꾸라지 같은 자식!”
휴렉스는 모든 힘을 짜내기 위해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장검이 화려하게 춤을 추며 무려 120번의 베기를 실행했다.
지금까지 죽을힘을 다해 익힌 검술이 모두 펼친 것이다.
방어를 도외시한 채 자신의 모든 능력을 갈아 넣은 공격은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탄두스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그의 검을 피했고, 그럴 때마다 등줄기가 찌릿찌릿해졌다.
지금만큼은 그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모든 신경을 집중해 공격을 방어했다.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이 위험한 이 순간,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강맹한 공격이 점점 힘을 잃어 갔다.
휴렉스는 산소가 부족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때까지 검을 휘둘렀으나, 손톱만 한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그나마 갑옷을 스친 게 다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그제야 그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친개처럼 날뛰던 휴렉스의 뜨거운 뇌가 차갑게 식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가 자신보다 강자라는 것을.
‘지금껏 실력을 숨기고 나를 가지고 논 거였구나!’
휴렉스는 아차 싶었다.
평소 그의 성격이라면 더욱 미쳐 날뛰어야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공포로 물들었다.
휴렉스가 그런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탄두스가 그의 실력을 120퍼센트 끌어냈다는 것을.
그는 목숨을 걸고 상대의 실력을 모두 끄집어냈다.
어떻게 보면 서로의 실력이 모두 드러난 지금의 싸움이 가장 공평할 수도 있었다.
‘도망가야 해!’
용병인 그는 명예에 큰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적의 신발을 핥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었다.
눈치를 보며 살짝 발을 들어 보는데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흘깃 보니 신발에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는데.
마나를 익힌 자신이 이런 작은 무게에도 신경이 쓰이다니.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알 수 있었다.
‘제길!’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 자리를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빠른 몸놀림이 필요했다.
하지만 자신의 주특기는 힘이었다.
남들보다 힘이 강한 게 큰 자랑거리였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재능을 원망했다.
“포기야? 자꾸 똥 마른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만 싸움을 끝내고 싶잖아.”
탄두스가 ‘씨익’ 웃으며 검을 늘어뜨린 너무나 편해 보이는 자세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역겨워 한 대만 때릴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휴렉스는 그런 마음과 달리 정직했던 몸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고생했다. 너도 네 모든 기량을 펼쳤으니 그리 억울한 죽음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일기토에 의한 승패일 뿐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기를.”
탄두스가 땅을 박차며 뛰었다.
“허억!”
그 모습에 휴렉스의 입에서 깊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속도였다.
“살려…….”
휴렉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깔끔하게 잘린 그의 목이 질퍽한 진흙 바닥에 떨어져 박혔다.
그리고 그의 거구는 그대로 쓰러져 잘린 머리를 덮쳤다.
“와아아아아아아!”
“탄두스! 탄두스!”
“최고다!”
스탄다비아의 군대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반대로 프라인과 아드리온 연합군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끙…….”
헤레이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이미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일이 벌어지니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
오른쪽 얼굴이 따끔거렸다.
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제스턴의 나무라는 듯한 뜨거운 시선을 외면한 채 용병단의 이인자인 빌리를 불렀다.
“빌리, 맡겨도 되겠지?”
지금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단숨에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이였다.
“그럼요, 단장님. 제가 누군지 아시잖아요. 제가 바로 상대에게 죽어도 잊히지 않는 악몽을 선사하는 악몽의 빌리입니다. 제가 나서서 실패한 거,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습니까? 분위기를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저런 머저리 말고 진즉에 저를 내보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저 새끼… 휴~ 그래. 이왕이면 화려하게 이겨. 그래야 적의 기를 죽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헤레이스는 경박스러운 빌리의 말에 욱하고 치미는 분노를 겨우 삼킨 뒤, 지시했다.
“걱정하지 마시라니까.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하여간, 우리 단장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걱정만 늘었다니까. 이번에 돈도 많이 받았을 텐데, 나중에 술이나 한잔 진하게 사십시오.”
빌리는 눈치도 없는 건지 아니면 헤레이스의 기분 따위는 관심도 없는 건지 으스대기 바빴다.
마른 몸매에 긴 팔다리를 가진 빌리가 휘청이는 듯한 특이한 걸음걸이로 전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를 맞이한 건, 기사 라우터였다.
라우터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원래 알리사의 기사였다.
하지만 알리사와의 영지전에서 누구보다 기사다웠던 그의 모습이 자포리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포리자는 그의 기사도에 반해 기회를 주었고, 라우터는 자포리자의 인품에 반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진정한 기사의 길로 걸어갈 수 있게 됐다.
그런 그가 스탄다비아를 대표해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었다.
그만큼 자포리자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나는 피닉스 용병단의 이인자, 악몽의 빌리다.”
빌리는 자신의 마나가 깃든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입문한 만큼, 조금 전 휴렉스의 검보다 확실히 더 진하고 형태가 갖추어진 모습이었다.
비록 휴렉스가 지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을 정도로 잘 싸우지 않았는가.
그보다 최소 한 단계 이상 경지가 높아 보이는 빌리를 본 프라인과 아드리온 연합군은 기대감에 들떴다.
“너 같은 촌놈이 나랑 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운이 무척 좋은 거야. 돈만 아니었으면 이런 냄새 나는 곳에 오지도 않았을 거거든. 어쨌든 돈값은 해야겠지?”
라우터를 향한 빌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다.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빌리의 눈과 마주친 라우터의 얼굴이 동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경박한 놈이군.”
라우터의 말은 싸늘했다.
누구보다 기사도를 중시하는 그는 일기토의 기본 예의도 지키지 않는 빌리의 무례한 모습에 화가 났다.
“건방진 놈. 감히 어디서! 방금 한 말을 평생 후회하게 해 주마!”
경박하다는 말을 가장 싫어하던 빌리가 발끈했다.
그는 자신과 싸우는 상대의 이름도 듣지 않은 채 라우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건 쓰레기 같은 짓이었다.
한 진영의 대표로 나온 이가 일기토의 기본 예의도 무시한 채 이렇게 후안무치한 행동을 하다니.
같은 진영의 사람들도 얼굴을 찌푸릴 정도였다.
하지만 빌리의 얼굴에는 어떤 부끄럼도 없었다.
부끄러움은 그들의 몫이라는 듯이.
그의 마르고 긴 팔다리를 보고 짐작한 대로 몸놀림은 신속했고, 그가 휘두르는 검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빌리는 자신의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병신. 실력도 없는 놈이 예의나 따지고 말이야. 뭐, 이런 촌구석에서 기사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접받았겠지. 세상이 넓은 줄도 모르고 말이야. 예의 따지다가 평생 익힌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죽으면 무척이나 허무하겠지? 크크크.’
빌리는 이미 공격에 성공한 듯 얼굴에 라우터를 향한 커다란 비웃음을 걸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